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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 Ko Aug 05. 2019

국밥 예찬론

뜨-끈한 국밥 든-든하게 먹어야지

언제부턴가 국밥이 좋아졌다. 어렸을 때는 뭐 저런 걸 먹나 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왠지 국밥이 좋아졌다. 배고프고, 꾸덕꾸덕하면서도 따뜻한 무엇인가를 먹고 싶을 때마다, 습관적으로 국밥집을 찾았다. 전날 술을 거하게 마시고 속이 쓰릴 때는 콩나물국밥을, 영 입맛도 없고, 먹고 싶은 것도 딱히 없지만 한 끼 배부르게 먹고 싶을 때는 순대국밥을, 칼칼한 맑은 국물을 먹고 싶을 때는 돼지국밥을 먹곤 했다.

계란이 올려진 콩나물국밥에 젓가락으로 살살 풀어 흰 거품이 몽글몽글 올라올 때, 잘 익은 석박지나 깍두기를 올고, 입을 최대한 크게 벌려 한 입에 배어 물어야 한다.

잘 익은 깍두기일수록 씹을 때마다 입 안에서 가득 터져 나오는 달짝찌근하면서도 시큼털털한 농익음을 잘 음미해야 하기 때문이다. 순대국밥에는 다데기를 티스푼 2개 정도 풀어 벌겋게 간을 해야 한다. 자칫 느끼해질 수 있는 국물의 맛을 잡아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적당히 간이 된 국물에 공깃밥을 탁 넣어 잘 젓고, 잘 익은 깍두기를 탁 올려 머리 고기와 함께 한 숟갈을 터프하게 입에 욱여넣어야 한다.


끔은 콩나물국밥도, 순대국밥도 당기지 않는 날에는 맑은 돼지국밥 한 그릇을 시켜 먹었다. 앞접시에 담겨 나오는 부추를 풀고, 다데기 한 스푼 정도를 넣어 간을 잘 맞춘 다음에, 얇게 썰린 돼지고기를 숟가락 위에 올려 게눈 감추듯 기도 했다. 그렇게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울 때마다 마음 한편에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훈훈한 기운을 가득 머금을 때면, 마냥 행복하다.

분명 어렸을 때는 국밥 같은 것에 관심이 없었다. 다른 애들처럼 치킨이나 피자에 환장하며, 가끔씩 엄마한테 사달라고 졸라대던 평범한 꼬마였다. 하지만 나이를 한, 두 살 먹을수록 뭔가 뜨끈하고, 꾸덕꾸덕한 무언가를 찾게 됐다.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한정식 식당에서 한 상 거하게 차려서, 상다리 휘어지게 나오는 그런 밥을 먹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단 한 그릇이라도 '아, 잘 먹었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밥을 먹고 싶었다. 고시원에서 공용 냉장고에서 꺼내먹는, 제대로 익지도 않은 김치에 편의점에서 사 온 720원짜리 라면을 끓여먹는 것에 진절머리가 날 때면, 밥다운 밥을 먹고 싶었다.


그래서였을까. 본능적으로 국밥을 찾게 됐다. 정말 '본능'이라는 단어가 적절할 것이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고, 내가 먹고 싶은 것이 '국밥'이라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뜨끈하고 꾸덕꾸덕한 것'이 국밥에 근접할 것이라고 때려 맞췄을 뿐이다. 그렇게 본능에 이끌려 먹은 국밥은 나를 따뜻하게 품어줬다.


몇 년 전에 물류창고에서 일할 때, 쏟아져 내려오는 상자 더미에 파묻혀 물건을 이리저리 분류하고, 몇 백 개의 아기 기저귀나 20 롤 짜리 휴지들을 들고 나르는 게 일상이었다. 혹은 전국에서 들어오는 몇십 장의 주문 내역서를 들고, 창고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생판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이거 사 와라~ 저거 사 와라~" 따위의 심부름을 하며, 빈 박스에 물건들을 쑤셔 박아 포장해 출고하는 것에 지쳐버리곤 했다. 그렇게 아침 8시 반부터 8시까지 일하고선 퇴근하면, 초주검이 된 상태로 퇴근해야 했다. 빈속으로  잠들 수는 없어 억지로 입에 뭐라도 쑤셔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면, 집 근처 콩나물국밥집에 갔다. 혼자 밥 먹기가 적적할 때면, 집에 계시던 어머니와 함께 소주 한 잔을 걸치면서, 뜨끈한 국밥 한 그릇을 먹곤 했다.


술 한 잔이 들어가고 나면 괜히 엄마에게 엿같은 내 인생을  푸념하곤 했다. 사는 게 너무 힘들다고. 언제까지 이렇게 팍팍하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나는 항상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곳에서 남들의 두 배, 세 배를 일하면서도 일당 7 만원 밖에 못 받는 것이 너무 화가 난다고 말하기도 했다. 2시간 일하고, 고작 10분, 20분씩 쉬어가며 때려 박는 노동력에 비례해서 버는 돈이 고작 이것뿐이냐고 괜히 엄마에게 열을 내기도 했다. 나보다 수 백배는 더 힘든 삶을, 나의 곱절을 살아온 당신에게 나는 두서없이 이런저런 얘기를 쏟아내기 바빴다. 


엄마는 말없이 한 숟갈을 먹었다. 엄마는 굳이 많은 위로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언젠가는 스쳐 지나간 이 순간을 추억하게 될 거야"라고 얘기할 뿐이었다. 나도 말없이 한 숟갈을 먹었다. 그저 추억이 될 이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안경에 김이 잔뜩 서리도록 훈훈한 콩나물국밥을 입 안에 가득 넣으며 조금은 행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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