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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 Ko Sep 23. 2019

내 돈 내놔! 이 자식들아!

아르바이트 잔혹사 (4)

고시원 침대에 멍하니 드러누웠다. 내가 뭘 잘못했지. 일이 조금 서툴렀다는 것을 빼면 잘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니, 서툴렀다는 것만으로도 잘릴 이유가 충분했던 걸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첫 아르바이트라고 인터넷에 아르바이트 후기를 검색하고, 면접 볼 때 주의사항 같은 것들을 미친 듯이 검색했던 나 자신이 한심했다. 어차피 이렇게 될 것이었는데, 왜 굳이 그런 수고로움을 사서 했던 것일까. 20살 초반부터 모든 일이 와장창 꼬여버린 것 같았다. 남들처럼 그저 평범한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었을 뿐인데, 부모님에게 손 안 벌리고 생활비 몇 푼을 벌고 싶었을 뿐인데, 이토록 비참한 결과를 맞아야 하는 걸까. 옷 벗고 나가라고 소리치던 사장에게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순순히 계단을 내려온 나 자신이 한심해졌다. 갈 땐 가더라도, 뭐라도 개겨봐야 했는데. 머저리처럼 계단을 터덜터덜 걸어 내려온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모르겠다. 한숨 자자.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다.


다음 날 아침. 고시원의 습기를 머금어 잔뜩 눅눅해진 이불을 걷어차며 일어났다.  왜 잘린 거야? 아니, 잘린 건 둘째 치더라도, 돈 한 푼 안 주고 쫓겨났다는 게 억울할 뿐이었다. 주말 새벽까지 잠 한숨 못 자고 일하면서 번 돈은 받아야겠다는 분노스멀스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사장한테 전화해서 '일 한만큼 돈은 달라'라고 이야기하기에는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어차피 전화해봐야 내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 리 만무했다. 다만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이 엿같은 마음을 치유하고 싶었고, 못 받은 돈을 확실하게 받고 싶었다. 답은 하나였다. 빼도 박도 못하게 신고는 것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봤다. 내가 신고할 만한 근거가 있는가? 누가 봐도 확실히 나는 피해자였다. 친구들한테, 그리고 부모님에게 일하다가 잘렸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혹시라도 내가 간과한 무엇인가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다행히(?) 그런 건 없었다. 다 집어치우고 돈을 받지 못했다는 것에 모두가 분노했다. 음, 역시. 나는 틀리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의 위로와 분노에 힘을 얻으며, 조심스레 노트북을 켰다. '알바 부당해고 신고'... '알바 임금 미지급 신고'... 검색창에 이런 검색어들을 두들겼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올린 하소연하는 글들이 주르륵 올라왔다. 질문 글에 달린 답변들을 꼼꼼히 읽어보면서 얻은 결론은 '노동청에 신고하라'였다. 몇몇 질문에는 사업주와의 계약 당시 근로계약서를 썼어야 하고, 수습기간 중 해고는 정당하다 라는 암울한 이야기들이 답변으로 달려있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노동청에 신고하면 못해도 일한 만큼 돈은 받을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만을 가지고 싶었다. 설령 돈을 못 받는다고 해도, 그 빌어먹을 호프집을 어떻게든 곤경에 빠뜨리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악랄한 복수를 계획했다.


노동청 홈페이지의 신고센터를 눌렀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꾹 눌러 담으며, 키보드 자판을 눌렀다. 최대한 침착하고, 논리적으로 진정서를 작성해야 한다. 중학교 생활국어 시간에 배운 육하원칙에 따라 한 글자, 한 글자 입력해갔다.


저는 XX구 OO동에 거주하고 있는 20살 고 아무개라고 합니다. 제가 이 민원을 제출하는 이유는 정확한 해고 사유 없이 계약 기간 만료 전에 해고당했고, 그동안 일했던 날짜의 급여 또한 받지 못하고 해고당했기 때문입니다.
(중략)

마지막으로 일한 만큼의 급여를 받고, 해당 점주의 처벌을 원한다는 문장과 함께 진정서를 제출했다. 후련했다. 뭐든지 해결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생겼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통장에 몇십만 원이 입금되리라.

다음 날, 02로 시작하는 번호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여보세요?" 핸드폰 너머로 친절한 상담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어제 인터넷으로 민원 신청하셨죠?" 올 것이 왔구나. "아, 네네. 맞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정당한 이유 없이 해고당하셨다고 하셨는데, 아르바이트 같은 경우에는..."

솔직히 뒤의 말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마지막에 상담원의 그 말 한마디 때문에 모든 내용이 휘발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냥 적당히 그쪽 점주랑 합의하시고, 민원 취소하시는 게 어떠세요?"


내가 이딴 말이나 들으려고 내가 동아줄 잡는 심정으로 그렇게 민원을 넣었던 것일까? 기본적으로 노동청이라면 노동자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게 아닌가? 난 그저 내가 일한 만큼의 돈을 받고 싶었을 뿐이었다. 근데 내가 저런 말이나 들어야 한다고?

"아니, 제가 일 한 돈은 받아야 하지 않나요? 무턱대고 민원을 취소하라고 말씀하시는 게 말이 됩니까? 취소 안 할 겁니다."

머리꼭지가 돌아버렸다. 노동청이랍시고 있는 게 이딴 식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중, 고등학교 때 노동법이니, 근로자의 정당한 권리니 이런 건 대체 왜 배운 거지? 민원 넣어봐야 취소하라고 종용하는 상담원을 마주하며, 교과서 속 텍스트나 외워서 내신 점수나 잘 따겠다고 교과서를 뒤적거리던 것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통화 종료' 버튼을 미친 듯이 두들기고, 의자에 드러누웠다. 솔직히 분노나 억울함보다도 그저 막연한 배신감이 앞섰다.


믿었던 노동청에게 거하게 뒤통수를 얻어맞고서, 까딱하면 이대로 유야무야 끝나겠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요즘에는 '국민 신문고' 같이 청원 한 번으로 군부대 하나 정도는 우습게 뒤집어 버릴 수 있는 곳이 있지만,  당시에는 없었다. 고소라도 해야 하나? 그냥 막연하게 떠오르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르바이트 급여 한 번 받아보겠다고 고소 절차를 밟는 것은 쓸데없이 판을 키우는 게 아닌가 싶었다. 결국 부모님을 비롯해서 주변 친, 인척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조언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신고해~" "아니, 걔네는 왜 그렇게 뻔뻔하대?" 같은 덧없는 위로를 받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다노동청에 넣은 진정서가 상담원의 권유 한 마디에 휴지조각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익숙한 번호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호프집 사장이었다. 올 게 왔구나. 떨리는 마음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아니, 신고를 했어?"
"예. 돈도 못 받고 잘렸는데 당연히 해야죠."
"네가 뭔데 신고를 해? 일을 잘하기를 해? 다른 애들보다 조또 못하면서 무슨 깡다구로 돈을 받겠다고 해?" 어처구니가 없었다. 얘네 왜 이렇게 당당하냐?
"아니, 뭐 일 못하면 돈도 못 받습니까? 당신 자식새끼가 똑같은 대접받아도 그딴 식으로 얘기하실 거예요? 밑도 끝도 없이 쳐 잘라놓고서 말이 많으시네요?"

나도 이제 참을 만큼 참았다. 쌍욕은 못 하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다.
"당연한 거 아니냐? 내 자식이 일 못해서 잘렸으면 그런갑다 해야지. 뭐 어쩌고 저째?"
"시발 진짜.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시네요. 예, 그렇게 생각하세요. 나중에 법원이든 경찰서에서든 낯짝이나 봅시다. 그때도 이딴 식으로 말하실 수 있나 봅시다."
"하려면 해! 어린 새끼가 싸가지가 없네? 네가 할 수 있을 거 같아?"
솔직히 내가 고소를 할 정도로 금전적인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설령 고소를 한다 한들 과연 이길 수 있을지, 어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단 한 마디도 지고 싶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서, 한참 동안 화를 삭이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일 못하는 새끼. 첫 아르바이트를 비참하게 끝낸 나에 대한 한 줄 요약이었다. 더 이상의 부연설명이 필요 없었다. 테이블 번호도 제대로 못 외우고, 일 습득 능력도 떨어지는 한심한 인간. 솔직히 너무 억울했다. 처음으로 서빙 일을 배운 것이고,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던 것뿐인데, 이렇게까지 낭떠러지에 내몰려야 하는 걸까? 이젠 일 하는 게 무서워졌다. 내가 뭘 할 수 있지?

고시원 침대에 주저앉아 있기를 몇 시간, 문자 한 통이 왔다.

"학생, 계좌번호 알려줘."

분명 아까 한바탕 싸워댔던 호프집 사장의 그 번호임이 틀림없다. 단 몇 시간 만에 이렇게 꼬리를 내리고, 순순히 돈을 주겠다고? 그 몇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과정이야 어쨌든 일단 떼 먹힌 돈은 수중에 들어오는 것이다. 뭔가 덥석 계좌번호를 알려주는 것도 모양 빠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XX은행. 035..." 전송 버튼을 누르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당장 법원에 달려가서 고소장이라도 제출할 것 같았지만. 현실은 영화처럼 극적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호프집 사장도, 나도 그냥 순순히 현실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돈만 주면, 돈만 받으면 더 이상 얼굴 붉힐 필요도 없이 깔끔하게 끝날 일이었다. 굳이 신고니, 고소니 난리를 치면서 착실히 쌓아 올렸던 현실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30분쯤 지났을까. 고시원 앞 편의점의 ATM에 카드를 집어넣었다. 잔액: 236,421원. 아르바이트로 번 첫 돈. 부모님과 친척들에게 받은 용돈을 제외하고, 생판 처음 보는 사람 밑에서 일하면서 받은 돈이었다. 뭔가 돈이 좀 더 들어온 것 같기도 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야, 나 23만원 받음ㅋㅋㅋㅋ"
                                      "ㅈㄴ많이 받았네? 밥이나 사라"
"ㅈㄹㅋㅋㅋㅋㅋ"

오늘은 오랜만에 고기를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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