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살, 퇴사하고 대만 한 바퀴
타이난 여행 2일 차 아침.
타이난에서의 하룻밤을 보낸 나는 눈을 뜨자마자 엄청난 후회를 했다.
아, 나의 판단미스이다.
타이난이 이렇게 재미있는 도시였다니…
구글맵을 둘러보면 볼수록 가보고 싶은 곳도, 먹어보고 싶은 것도 넘쳐났다.
고작 2박 3일, 그마저도 첫날은 오후부터 타이난 일정을 시작했고, 3일 차에는 오전 11시 기차를 타고 떠날 예정이니 굳이 따지면 약 2일 정도의 일정으로는 이 타이난을 충분히 즐길 수 없었다.
대체, 누구냐. 타이난은 당일치기면 충분하다고 한 놈이?
타이난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분위기가 좋았다.
오래된 도시가 가지고 있는 고즈넉한 느낌과 여유로움이 나의 긴장된 마음을 부드럽게 이완시켜 주었다.
다음에 또 기회가 된다면 그때는 타이난에서만 1주일 정도 체류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되면 타이난에 대해 더 깊이 있게 알 수 있을까?
일단 오늘은 갈 곳도, 먹을 것도 너무 많으니 서둘러 움직이기로 했다.
대만에서 2번째로 생긴 백화점인 하야시 백화점.
일본시기 때 오픈한 이 오래된 백화점 앞에서 오늘의 일정을 시작하기로 했다.
나는 하야시 백화점 앞에서 버스를 타고, 대만 드라마 '상견니'의 촬영지 중 하나인 '간정명품옥'으로 향했다.
새벽 내내 부슬비가 내리더니, 날씨가 많이 흐렸다. 하지만 시원한 바람이 불어서 오히려 훨씬 좋았다.
버스를 내려 사람 냄새 물씬 나는 골목길들을 따라 걷다 보니 드디어 골목길 한 구석에 빨간 간판이 인상적인 작은 가게가 나타났다.
바로 상견니의 세 주인공들이 냄비국수를 먹었던 그 가게! 간정명품옥이다!
드라마 속에서 보던 그 장소에 직접 오게 되다니, 새삼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갑자기 귓가에서 상견니의 ost인 ‘Last dance’가 들리는 것 같았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 황위쉬안이 된 것처럼 'Last dance'를 흥얼거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아담한 가게 내부에는 동네 사람 몇 명이 국수나 토스트 같은 음식으로 가볍게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가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아 가게 내부를 살펴보았다.
가게 벽면에는 당시 주인공들의 사진과 촬영 당시 찍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고, 실제 그들이 먹었던 접시와 그릇은 싸인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우스운 것은 타이난 시장도 이곳에 와서 국수를 먹었는지 사인한 접시가 있는데, 상견니 주인공들 그릇이 가장 센터에 있었다는 점이다.
나도 상견니의 여주인공 황위쉬안이 된 기분으로 냄비국수 하나와 꿀차를 시켰다.
(아니, 내 옆에 왜 모쥔제와 리쯔웨이는 없는 것인가?! 나에게 모쥔제와 리쯔웨이를 내놔라!)
드라마 '상견니'는 내가 대만 여행을 결정하고 보기 시작한 드라마이다.
사실, '상견니'는 대만에서는 2019년, 한국에서는 2020년에 방송을 했으니 생각보다 꽤 오래된 드라마이다.
나는 한동안 중국/대만 드라마를 보지 않았고, 보더라도 대륙 쪽 드라마, 그중에서도 후궁암투물을 좋아하는 편이라, 그런 종류의 드라마만 골라 봤었는데, 대만 여행을 결정함과 동시에 귀를 '중국어모드'로 만들어놓자며 '상견니'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완전히 '상친자'(상견니에 미친 자)가 되어버렸다.
오글거리지 않는 스토리와 ost.
배우들의 명품 연기.
거기에 허광한과 시백우의 꽃미모까지!
이 드라마에 푹 빠져서 중국어 공부라는 기존의 목적을 잊고, 밤을 새워서 드라마를 봤었다.
그래!! 이거다. 이거!
한동안 푹 빠져서 열광했던 드라마 속에서 주인공들이 먹었던 바로 그 국수를 보니 너무나 반가웠다.
국수 위에 빵부터 두부, 얇은 햄, 어묵, 계란까지 잔뜩 들어간 국수는 면발이 아주 독특했다. 한번 튀어낸 듯한 면발인데 꼬들꼬들한 식감이 아주 좋았다. 반절정도는 오리지널로 먹고, 남은 반은 식탁 위에 놓인 고춧가루를 조금 넣어서 매콤하게 먹어보았다. 아침부터 국수라니, 너무 위에 부담되는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뜨끈한 국물이 있어서 그런지 속이 아주 편안했다.
비록 내 옆에 모쥔제와 리쯔웨이는 없지만, 그래도 냄비국수는 맛있었다!
국물까지 싹싹 비우고, 시원한 꿀차를 한 모금 쭉-빨아 마셨다.
그리고 서둘러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타이난은 오래된 도시인만큼 독특하고 매력적인 골목이 참 많다.
션농지에도 그중 하나이다.
션농지에는 약 100년의 역사를 지닌 거리이다.
과거에는 타이난의 중요 5대 항구와 이어지는 하천 항구의 입구였기 때문에 모든 상인들이 이 길을 통해 타이난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당시 타이난에서 가장 번화했던 지역이었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서 점차 쇠락해 버렸다. 하지만, 이 낡고 오래된 거리는 최근 몇 년 사이에 문화 창의 예술 사업의 일환으로 젊은 타이난 예술가들을 위한 거리로 변신하였고, 다시 부흥에 성공하여 타이난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사실, 션농지에에 있는 가게들은 대부분 오후가 되어야 문을 열어서 이른 아침에는 별로 볼 게 없었다. 밤에 와야 더 아름다운 곳이긴 하지만, 낮의 션농지에는 조용하고 한적하여 거리의 오래된 건축물들을 여유롭게 구경하기에 나쁘지 않았다.
갑자기 중국에서 보냈던 대학원 시절이 생각났다.
나는 중국 산동성에 있는 산동대학교에서 대학원을 다녔는데, 그곳 역시 타이난과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특히 제남에도 '푸롱지에(芙蓉街)'라고 하여, 타이난의 션농지에와 비슷한 거리가 있었는데,
션농지에 구석구석을 거닐며, 어린 시절에 거닐었던 푸롱지에에서의 추억이 떠올랐다.
100년 이상된 오래된 목조 건축물, 그곳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 과거와 현대의 조합이 주는 독특한 정취가 그러했다.
마치 10년 전 대학원생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당시에는 푸롱지에 골목 곳곳에 있는 중고 서점에서 잡지책과 소설책을 사고, 생일에는 오래된 포목점에서 멋진 분홍색 치파오를 한벌 맞춰 입었었다. 친구들과 취두부를 파는 가게 앞을 지날 때면 숨을 참고 후다닥 뛰어서 가게 앞을 지나갔다. 그리고 어느 정도 뛰고 나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친구들과 함께 꺄르륵 웃었었는데... 그 당시 친구들은 다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무엇을 하던 열정이 넘쳐났던 그때가 그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