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찬란한 도피 17, 블루스크린문화창의공원, 리리과일가게

36살, 퇴사하고 대만 한 바퀴

by 나나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었다.

구글맵을 통해 열심히 검색해서 찾아낸 핸드메이드 펀위엔을 판매한다는 가게.

션농지에와도 멀지 않은 곳이라 열심히 걸어갔다.


그런데 오늘은 휴무라고 한다.

구글맵에는 영업 중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간혹 이렇게 구글맵의 정보가 틀리는 경우도 있다.

핸드메이드라고 해서 정말 먹어보고 싶었는데... 아, 너무 아쉽다.

냉정하게 내려가 있는 셔터문만 야속하게 바라보다 발걸음을 돌렸다.


IMG_9705.JPG?type=w773


하지만 나에게는 아쉬워하거나, 슬퍼할 시간도 없다.

걷다 보면 밥 먹을 곳 하나 정도는 나오겠지... 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저 멀리 예쁜 파란색의 담벼락이 눈에 띄었다.

'뭐지?'

궁금한 건 직접 가봐야 한다. 파란 담벼락의 정체는 바로 블루스크린 문화창의 공원이었다.

문화창의공원은 대만의 대도시마다 하나씩은 다 있는 곳인데, 도시 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도심 속의 구 건축물을 개조하여 젊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기도 하고, 아기자기한 기념품을 판매하기도 한다. 간혹 프리마켓 등이 열리기도 한다.(지난번 방문했던 타이중에도 문화창의산업단지가 있다.)


IMG_9707.JPG?type=w386
IMG_9711.JPG?type=w386


혹시 이곳에 밥 먹을 만한 곳이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아직 문 열은 가게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야외도 꽤 볼만한 것들이 많았다. 특히 블루스크린이라는 이름답게 문화창의공원 곳곳에는 진한 파란색이 포인트로 들어간 벽화나 미술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IMG_9713.JPG?type=w773


나는 블루스크린 문화창의공원을 구경하다가 입구에 예쁜 치파오들이 잔뜩 전시되어 있는 가게, '경화원' 안으로 홀린 듯이 들어갔다. 점심밥을 먹고 있던 사장님은 외국인인 나를 보고는 식사도 중단한 채, 열정적으로 자신의 가게를 홍보하기 시작했다.


'경화원'은 치파오를 대여하면 헤어와 메이크업을 해주고 블루스크린 문화창의공원 내에서 사진 촬영까지 해주는 가게였다. 나에게도 한복 대여 사업을 하는 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반가웠다. 심지어 그 친구가 하고 있는 사업과 매우 비슷했다.


소심한 관종인 나는 이렇게 전통의상을 입고 사진 찍는 일을 무척 좋아한다. 그래서 친구의 가게를 하면 꼭 한복을 입고 화보 사진을 찍고는 했는데, 대만에도 이런 가게가 있었다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어쩌면 이것은 내가 치파오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신의 계시가 아닐까?(그렇다. 나는 자기 합리화를 무척 잘한다.)


오랜만에 내면 깊은 곳에 잠들어있던 '관종'의 피가 들끓기 시작했다.

내가 사장님의 마수걸이가 되어드리기로 했다.


IMG_9743.JPG?type=w773 그렇다. 나는 관종이다.


입고 싶은 의상을 마음껏 골라볼 수 있었다.

치파오도 클래식한 디자인부터 6,70년대 홍콩 누아르 영화를 연상케 하는 스타일까지 다양했고,

한푸(汉服) 역시 비치되어 있어서 무엇을 입어야 할지부터 시작부터 막막했다.

나는 이곳이 '블루스크린'이니까 푸른색 계열의 치파오를 입기로 했다. 탈의실 캐비닛 안에 짐을 보관하고, 치파오를 입고 나오자 사장님께서 "한국인 고객은 처음이에요."라며 열정적으로 헤어와 메이크업을 해주셨다.


"어떤 스타일로 화장을 해줄까요?"

"사장님이 전문가시니까, 저는 전문가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를게요."

"OK, 맡겨주세요."


잘 모를 때는 무조건 전문가의 의견을 따르는 게 좋다. 사장님은 역시 전문가다웠다. 순식간에 화보 촬영에 맞는 진한 화장을 해주시더니, 엉망진창이었던 내 머리카락도 슥슥-빗어서 이리저리 꼬아 올려주었다. 그리고는 어디선가 비녀를 잔뜩 가지고 오셔서는 치파오 색에 맞춰 비녀를 꽂아주셨다.

평소에는 전혀 하지 않는 스타일로 변신하고 나니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대박! 너무 마음에 들어요!"

몇 번이나 쌍따봉을 날려드렸더니, 사장님께서는 배시시 웃으셨다.


우리는 순식간에 친구처럼 가까워졌다. 사장님은 가이드 겸 사진작가가 되어 나를 블루스크린 문화창의 공원 이곳저곳으로 데리고 다녔고, 수십 장의 사진을 찍어주셨다.

심지어 남의 영업장에 들어가서는 "이 친구는 한국에서 왔는데, 지금 환도 여행을 하고 있대요. 여기서 사진 좀 찍게, 장소 좀 빌려줘요."라고 하셨다. 피자 가게 사장님께서는 매우 쿨하게 촬영을 허락해 주셨다. 덕분에는 나는 마치 프로 모델이 된 것 마냥 한껏 내면 속 관종의 본성을 깨울 수 있었다.


사장님과 인스타그램과 라인 친구를 맺고, 저녁쯤에 보정작업을 마친 사진을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조금은 충동적이었지만, 특별했던 블루스크린 문화창의 공원을 떠났다.






'경화원'사장님이 해주신 메이크업과 헤어스타일이 마음에 들어서 그 상태 그대로 타이난 공자묘로 향했다.

재미있는 경험 때문에 한껏 들뜬 나머지,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배고프다는 것을 지각하자마자, 정말 걷잡을 수 없이 배고팠다. 당장 무엇이라도 먹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허기짐이 몰려왔다.

(생각해 보니, 나는 아침 일찍 냄비국수 한 그릇을 먹은 것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IMG_9795.JPG?type=w773


하지만 식당 대부분은 브레이크타임이라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저 멀리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무엇인가를 먹는 것이 보였다.

다가가보니, 무려 1947년부터 영업을 했다는 '리리 과일 가게'였다.


과일로만 배를 채우기가 애매해서, 시큰둥하게 메뉴판을 보고 있는데, 또우화가 눈에 띄었다.

또우화는 연두부같이 몰랑몰랑한 두부에 차가운 시럽을 뿌려 먹는 대만의 전통 디저트이다. 두부에 시럽이라...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조합이 궁금하기도 하고, 이제는 정말 한 발짝도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배고팠기에 일단 또우화로 급한 불부터 끄기로 했다.


IMG_9797.JPG?type=w386
IMG_9796.JPG?type=w386
예쁘고 정갈하게 놓인 과일들이 참 먹음직스럽다.


나는 레몬또우화를 하나 시켜서 먹기로 하고, 숙소에서 간식으로 먹을 종합과일세트도 하나 주문했다.

아저씨께 종합과일세트의 작은 것과 중간 사이즈가 얼마나 다른지 여쭤보니 아저씨께서 친절하게 직접 작은 사이즈의 과일상자를 가져와서 보여주셨다.


“이 정도 양이에요.”

“아, 그럼 저 혼자 먹기는 부족하네요, 중간 사이즈로 주세요.”


output_3528140837.jpg?type=w773 먹음직스러운 과일이 잔뜩 담긴 중간 사이드의 종합과일세트


내 너스레에 아저씨께서 웃으시며 즉석에서 과일을 손질해 주셨다.

키위부터 수박, 황금수박, 용과 등등 다양한 과일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한국돈으로 약 5천 원에 이렇게 다양한 과일을 먹을 수 있다니, 충동적으로 온 가게에서 '득템'을 한 기분이었다.


독특한 것은 과일과 함께 설탕을 준다는 것.


“이게 뭐예요?”

“설탕인데, 과일 찍어 먹으세요.”


과일은 원래도 당분이 많은데, 설탕까지 찍어먹다니… 생각만 해도 혈당이 오를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나중에 사장님 말씀대로 구아바나 용과 등 별로 달지 않은 과일을 찍어먹어니 정말 꿀맛이었다.


IMG_9800.JPG?type=w773


과일종합세트를 구경하는 사이, 주문했던 레몬또우화가 나왔다.

대만을 여행하면서 참 다양한 또우화를 먹었는데, 단연코 이 가게의 레몬또우화는 내 인생 또우화였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이느라 힘들고 지쳤던 몸과 마음을 시원하고 달콤한 레몬 시럽이 한번, 부드러운 두부가 또 한 번 달래주었다.


순두부라서 속도 편하고, 새콤달콤한 시럽으로 당충전도 하니 일석이조였다.

염치 불고하고, 그릇 밑바닥을 뚫을 기세로 시럽까지 싹싹 다 먹고, 다시 씩씩하게 공자묘로 향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찬란한 도피 16, 간정명품옥, 션농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