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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도피 39. 1박 2일 뤼다오 여행(1)

36살, 퇴사하고 대만 한 바퀴

by 나나

오늘은 뤼다오로 가는 날.


숙소 친구들의 도움으로 무거운 여행 캐리어는 민박집에 보관하고, 배낭에 필요한 물건만 단출하게 담아, 조용히 숙소 밖으로 나왔다.



이른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늘은 배를 타고 뤼다오로 들어가야 하는데, 날씨가 도와주질 않는다.

나는 일단 여행자 서비스 센터 직원이 알려줬던 대로 타이동 기차역에서 아침 7시 30분 푸강항구행 버스를 탔다.


항구에 도착해 보니 바람이 제법 거칠었다.

마음이 불안해졌다. 과연 뤼다오에 가는 배는 뜰 수 있을까?

뤼다오로 들어갈 때, 파도가 거칠다는데… 만약에 배가 결항되면 어떡하지?


만약의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며,

뤼다오에 들어갈 수 없다면, 타이동 근처에 있는 즈번으로 가서 온천이나 즐겨야겠다.라는 등

날씨로 인해 결항될 가능성을 생각하며 서둘러 여행 B안을 생각했다.


하지만, 내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선착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서둘러 푸강항구와 뤼다오의 왕복 티켓을 끊었다.

무려 1,120 대만달러! 한국돈으로 환산하면 거의 5만 원이나 되었다. 생각보다 무척 비쌌다.



배를 기다리며 한국에서부터 이 날만을 위해 챙겨 온 멀미약을 꼭꼭 씹어먹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뱃멀미와는 인연이 없었고, 아리산의 그 꼬불꼬불한 길도 전혀 문제없이 다녀왔는데

뤼다오에 대한 수많은 후기 글을 들은 적이 있어서 지체 없이 멀미약을 먹었다.

(아주 잘한 선택이었다! 뤼다오 갈 때는 멀미약 필수!)



드디어 탑승을 알리는 방송이 울리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배에 탑승하기 시작했다.

엄마에게 ‘나, 이런 배 탑니다.’하고 사진을 보여드리니 엄마는 바로 '통통배'라며 절대 타지 말라고 하셨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뤼다오를 안 가는 게 말이 되냐며, 나는 엄마 말을 무시한 채 바로 배에 탑승했다.(그렇다. 나는 말 안 듣는 청개구리 같은 딸이다.)



용감하게 배에 올랐으나, 배의 내부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사람들의 고통이 느껴지는 처참한 내부.


"아… 지금이라도 내릴까?"



좌석마다 놓여있는 구토봉투를 보면서도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때문에 나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배의 앞자리, 창가 쪽에 앉았다.(자유석이다.)


배의 앞자리, 창가석은 완전히 잘못된 선택이었다. 하아…


놀이동산에서 바이킹 타는 것을 생각했어야 했다.

바이킹도 앞자리, 구석이 제일 무서운 자리라서 늘 정중앙 자리만 사수하던 내가.

나는 대체 뭘 믿고 제일 무서운 자리에 앉았던 걸까?



고통의 한 시간이었다.



멀미약을 먹었기 때문에 구토를 하진 않았지만, 사방팔방에서 들리는 고통의 소리들과 미친 듯이 흔들리는 배. 침몰 직전의 타이타닉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수많은 신들의 이름을 외치며, 그저 무사히 섬에 도착하길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드디어 뤼다오에 도착했다는 방송이 나오고,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드디어 도착했다! 살았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최대한 빨리 배에서 하선했다.

그런데 비가 엄청 내리고 있었다. 서둘러 우산을 펼쳤으나, 우산을 펼치는 것이 무색할 것 정도로 비바람이 몰아쳤다.



대체 숙소까지 어떻게 가야 하나 하고, 서둘러 구글맵을 살펴보고 있는데,

내 앞에 어떤 오토바이 아저씨가 쓱- 나타나서 “스쿠터 대여하실래요?”라며 말을 걸어왔다.


나에게는 그림의 떡인 스쿠터.


그래서 “아니요. 괜찮아요.”라고 하고 무시했는데, 아저씨께서 계속 내 뒤를 졸졸 따라오시면서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어떻게 가려고? 숙소 어디야? 데려다줄게. 돈 안 받을 테니 뒤에 타.”라고 하셨다.

그렇게 대만에서 와서 처음으로 오토바이를 탔다.

낯선 사람의 오토바이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비가 너무 많이 내렸으니까.


이 사람이 과연 날 무사히 숙소로 데려다줄까? 하고 의심했다.

하지만 아저씨는 정말 나를 숙소로 데려다주셨다.(의심했는데 미안해요.)

비가 엄청 내려서 입고 갔던 청바지는 몽땅 젖었지만 그래도 아저씨 덕분에 숙소까지 편하게 올 수 있었다.


체크인 시간은 아니었지만, 숙소 사장님께서는 바로 체크인을 해주셔서 방에서 잠시 쉴 수 있었다.


조금 낡았지만, 에어컨은 잘 나오던 숙소.


멀미약을 먹어서 구토는 안 했지만 그 여파로 인해 머리가 무척 아팠다. 움직일 힘이 하나도 나지 않아서 일단은 그냥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으로 미뤄놨던 웹툰을 보며 잠시의 휴식을 취했다.


이 잠시의 여유 덕분일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조금 살아나는 듯했다.



체력이 돌아와서일까? 배가 고파왔다. 일단 구글맵에서 숙소 근처에 있는 식당을 검색해서 제일 가까운 곳에 위치한 곳을 찾아갔다.


달콤하고, 시원한 홍차 한 잔과 브런치 메뉴를 주문했다.


비주얼에 비해 그다지 맛은 없었지만, 그래도 배가 뭐라도 들어가니 점점 체력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 다행이었다.

대충 밥을 먹고, 가게 밖을 나가니 언제 비가 왔냐는 듯 하늘이 맑게 개어있었다.

비가 그쳐서 정말 다행이었다!


괜히 이런 사진도 찍어보았다.


내가 뤼다오에 온 이유 중 하나는 세계 3대 해저온천이라는 자오르 온천 때문이었는데, 숙소 사장님께 물어보니 생각보다 멀다며 걸어서는 절대 못 간다고 하셨다.


그래서 일단 길 상태가 어떤지 보기 위해 잠시 동네 산책에 나섰다.



바다도 보고,



뤼다오 등대도 보았다.

컨딩에서 보았던 어롼비 등대와 비슷한 모습이었지만, 이곳은 사람들이 아무도 없어서 그런지, 어롼비 등대와는 또 다른 한적한 멋이 있어서 좋았다.


남의 스쿠터를 내 것인 것 마냥 사진을 찍었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쌩-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스쿠터 한 대가 내 옆을 지나갔다.


아, 나도 스쿠터를 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스쿠터를 탈 수 있다면 더 많은 곳을 볼 수 있을 텐데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이내 나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고치기로 했다.


나에게는 튼튼한 두 다리가 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여행을 하면 되니까 괜찮다!


느리게 다녀야만 볼 수 있는 것을 보는 여행도 멋지니까, 괜찮아! 나는 나의 여행을 하면 돼.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내가 할 수 없는 일에 집착하지 않고,

스스로의 능력 범위에서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갖지 못하는 것, 내 능력 밖인 것에 미련을 두니 스스로를 굉장히 낮은 사람, 못난 사람으로 평가하고 결국 자기 비하로 이어졌던 지난날을 떠올려본다.


비록 나는 스쿠터는 타지 못하지만, 자전거는 탈 수 있고, 건강하고 튼튼한 두 다리도 있으니 얼마든지 걸을 수 있다.

영어는 잘 못 하지만, 중국어는 그럭저럭 할 수 있으니까 괜찮다.

내가 가진 조건, 능력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괜찮다!


아, 이 ‘괜찮다.’라는 말 하나를 깨닫는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스스로의 능력과 한계를 파악하고,

자신에게 조금은 너그러워지는 것.

나는 그것을 조금씩 깨달아본다.




여행을 하면서 나는 조금 더 성장했을까?






숙소로 돌아와, 배낭 가방에 대충 수영복과 수건, 세면도구만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사장님은 스쿠터 없이는 힘들다고 하셨지만, 동네를 산책해 본 결과 자전거만 탈 수 있다면, ‘롱판공원 가는 길 보다 쉽다.’는 결론을 내렸다.


컨딩과 츠상에서 단련된 내 자전거 실력을 뤼다오에서도 발휘하게 될 줄이야.


배 선착장 근처에서 아까 나를 숙소로 데려다줬던 오토바이 아저씨를 다시 만났다. 아저씨께 자전거 렌털샵을 여쭤봤더니, 아저씨께서 또 나를 자전거 렌털샵까지 데려다주셨다.

아저씨 덕분에 항구 근처 호텔에서 자전거를 빌릴 수 있었다.(아저씨, 감사해요!)

정말 이 분이 아니었다면 뤼다오 여행은 힘들었을 듯싶다.



가격은 24시간에 300 대만달러였고 여권 또는 신분증을 맡겨야 했다.

나는 한국 신분증을 가게에 맡긴 후, 깨끗하고 멋진 자전거 한 대를 받을 수 있었다.

이것으로 드디어 뤼다오에서의 교통수단이 생겼다!


시험 삼아 뤼다오 인권박물관 쪽으로 달려보았다.




잘못된 선택이었다.

(자오르 온천은 정반대 쪽에 있었다. 항구를 기준으로 반시계 방향으로 뤼다오를 돌아야 한다. )



바닷가 풍경이 끝내준다.

대만에서 참 많은 바다를 봤다고 생각했는데 뤼다오는 또 뤼다오만의 매력이 있었다.



대만은 중국국민당 체제 하에서 수많은 정치 탄압이 있었다. 1947년에 발생한 2.28 사건, 1949년부터 시작된 계엄령(1987년도에 해제되었다.), 그리고 그 외 여러 정치 탄압 사건들까지... 대만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해 수많은 역사적 아픔과 고통을 지나야 했다. 뤼다오는 그런 대만 현대사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곳이다. 왜냐하면 이곳에 악명 높은 정치범 수용소가 있기 때문이다.


정치범이라고 하면 정치적으로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라는 느낌이 강하지만, 이곳에 수용되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중국국민당의 입맛에 맞지 않았던 사람들로, 큰 잘못이 없어도 당시 정치 체제에 맞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정치범'으로 몰려서 이곳에 갇히는 거였다.


나는 뤼다오의 역사가 보고 싶었다.

마냥 아름답고 밝은 뤼다오가 아니라, 어둡고 암울한 면도 목도하는 것이 진정한 여행이 아닐까?

그래서 더 열심히 페달을 밟아 백색테러 기념공원을 지나 신생훈도처(= 인권박물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월요일은 휴무랜다. 아, 완전 생각도 못한 반전이었다!

사실 대만은 월요일에 휴무인 곳이 많다. 월요일은 대부분의 박물관이 휴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구글맵에서는 '영업 중'이라는 것을 보고 찾아왔던 건데 계획이 틀어지니 정말 속상했다.


구글맵에게 우롱당한 기분이지만, 일단은 뤼다오에서 충분히 자전거를 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거면 됐다!


멋진 코끼리 바위


코끼리 바위를 보며 다시 힘을 내본다!

다시 자오르 온천까지 달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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