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ness wood(trees)
: 수 십 년 또는 주목할만한 사건이 일어난 후 몇 세기 동안 남아있는 역사적 광경을 담은 나무
: 사건 발생 시에는 어린 나무였지만 현재는 역사의 장엄함을 나타낸다.
요즘 발레할 맛이 난다.
오랜만에 만나는 선생님, 처음 만난 선생님, 늘 보는 회원님들이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칭찬선물을 불꽃놀이 폭죽처럼 터트려주신다.
'다음 달 콩쿠르 나가시죠? 우리 학원에서 누가 나간다던데 회원님 맞죠?'
'ㅇㅇ씨가 안 나가면 누가 나가요, 지금 너무 잘하시는데 왜 안 나가세요?'
'골반이 많이 펴졌어요.'
'허벅지에 발레리나 근육 잡힌 거 보세요, 앙레르 할 때 너무 잘 보이던데요?'
공중에서 앙트르샤를 두 번 해내는 발레리나처럼 훨훨 날았다, 내 기분만. (실제로는 앙트르샤 한 번도 제대로 못함.)
보수적인 우리 회사에 어떤 신입이 누구나 볼 수 있는 부위에 타투를 하고 나타났다고 한다. 이 나이에, 유행을 따르고 싶었는지, 아니면 태연의 목 뒤에 'purpose' 타투가 멋있어 보여 따라 하고 싶었는지, 몸에 메시지를 조각하고 싶은 마음을 세게 누르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손등에 타투를 한 신입 사원이 등장했다니, 내 안의 타투 욕심이 다시 들끓었다.
후회할 수도 있으니 튜브톱을 입어야만 드러나는 어깨에 새길까
늙은이와 젊은이를 구분할 수 있다는 한국인의 '불주사' 자국이 있는 곳에 새길까
발레와 연관된 메시지를 새기고 싶은데 뭘로 하지
나의 센터 로망인 알레그로(Allegro)를 새길까
이왕이면 그랑 알레그로(Grand Allegro)로 해야겠다.
이렇게 상상의 나래만 펼치고 타투숍도 검색할 용기를 못 낼 것이 분명한 나는, 여기에서 멈췄다.
손등에 타투를 하고 출근하는 신입을 언젠가 대면한다면 '와! 멋져요!'를 감출 수 없겠지만.
발레의 기본자세와 테크닉을 타투처럼 내 몸에 새길 수 있다면 좋겠지만 발레에서는 그런 새치기도, 지름길도, 편법도 안 통한다. 얼마 배우지 않은 취미발레인이지만, 그것만은 확실히 안다. 쑤스 동작을 하라고 하면 누구나 뒤꿈치를 들고 발가락만으로 중심을 잡을 수 있다. 단지 오래 서있지 못하거나 종아리와 허벅지에 도드라지지 않아야 할 근육이 발달되거나 복숭아 뼈 아래쪽 근육이 다칠 뿐이다. 보이는 예술인 발레에서, 다리가 짧고 굵어 보이기도 할 것이다. 제대로 하려면 골반과 허벅지부터 바깥으로 돌리는 턴아웃을 한 후에 발가락 다섯 개에 골고루 힘을 분산하고 코어로 중심을 잡고 있어야 다리가 길고 예뻐 보이는 발레에서의 쑤스가 완성되고 오랜 시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오른쪽 발목, 복숭아 뼈 아래가 며칠 째 계속 아린다. 나 역시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지만 위에 열거한 것들을 몸으로 소화하지 못해 부상을 얻었다. 요즘은 약국을 지날 때마다 자가접착식 테이프와 붙이는 파스를 사 모은다. 회사에서는 파스를 붙여 통증을 조금 줄이고, 발레 수업에는 테이핑을 해서 발목에 오는 충격을 조금이나마 낮추려는 노력이다. 회사 후배가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선배, 이렇게 까지 하면서 다닐 발레예요?'
뭐라고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보편적인 핑계로 답했다.
'난 이미 늙어서 언제 죽을지 몰라, 그러니까 살아 있을 때 많이 배워 놔야 해.'
취미발레 3년을 채우는 사이, 가을밤 불꽃놀이처럼 팡팡 터지는 기분 좋은 날도 있었고 뜻대로 되지 않아 작아지는 날도 있었다. 발가락 골절, 햄스트링 부상, 족저근막염, 발톱, 발목 등등 부상도 많이 얻었다. 부상을 당하면 일단 그 부위는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하다, 내 나이를 고려하면. 그리고 발레에 미쳐 단 며칠도 쉴 수 없는 내 생활패턴을 고치지 않는다면.
발가락에서 떨어져 나간 조그만 뼛조각은 평생 붙지 않을 테고 그 뼛조각이 발가락 안을 돌아다니며 인대나 다른 근육을 손상시킬 수도 있으니 심한 운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 말씀을 듣고 그 길로 발레학원을 바로 간 나니까.
사이드 그랑바뜨망을 할 때 무조건 많이 찬다고 해서 잘하는 게 아니다, 골반이 올라간 상태에서 또는 상체를 왼쪽으로 숙인 상태에서 다리를 아무리 많이 올려봤자 그건 발레가 아니다. 바닥에서 발이 떨어지기 전부터 발끝은 포인이 되어야 하고 발바닥과 바닥의 마찰을 이용해 뻥 차되 골반은 들리지 않게 높이 차야 한다. 그때 다리가 높이 올라가도록, 상체가 흔들리지 않도록 잡아주는 것이 등근육과 알라스콘 폴드브라를 한 팔이다. 날개에서부터 길게 뻗은 팔은 손가락 끝까지 찌릿찌릿 전기 오는 그 느낌이 나야 한다.
챙길 것이 너무 많은 발레.
아마도 지켜야 할 무형의 것들을 유형의 것으로 바꿔 가방을 싼다면, 3단짜리 이민가방을 모두 해제해서 차곡차곡 쌓아 넣어도 넘쳐날 것이다.
이것들을 잘 지켜내면 내 몸은 바로 증인나무가 되는 거다.
그날까지 잘 지켜보고 하나하나 내 몸에 쌓아보련다.
나는 이제부터 내 일생의 발레를 내 몸에 기억되게 한다.
나의 모든 발레 하는 시간은 나만의 증인나무 한 그루를 기르는 시간으로 기억될 테니.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시작되었다.
이 가을, 내 몸에 또 얼마나 많은 발레의 흔적이 남을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