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위에 울긋불긋한 단풍이 들던 나날들 (feat. 크녹산)
얼마 전 코로나 백신을 맞았을 때 이자상씨가 물었다.
"아파?"
이발랄씨는 말했다. "아니. 그냥 그렇던데."
그러면서 생각했다. 아프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아프지 않다고 말한다. 왜지?
그러자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크녹산보다는 안 아프던데.”
그렇겠군,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이었다.
*
두 번째 시험관을 진행하고, 정말로 다행히, 임신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임신이 되었다고 끝은 아니었다. 9개월간 뱃속에 아가를 잘 지켜내야 했다. 그걸 위한 주사가 크녹산이었다.
(그전에 진행했던 습관성 유산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한 검사에서 내가 혈전이 잘 생기는 체질이라는 얘기를 난생처음 듣게 되었고, 그게 유산의 요인일 수 있다고 했다. 임신을 유지하기 위해 담당의가 내린 처방이- 크녹산이라는 주사를 맞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발랄씨는 당연히, 네! 맞겠습니다,라고 했다.
신체적인 통각이 제법 둔하고,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위험요인에 대해선 크게 걱정하지 않는 이발랄씨는 그래 봤자 주사가 주사지 라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크녹산은 그게 아니었다. 정말 정말 정말 아팠다. 그 아픈 주사를 몇 달 동안 배에 맞았다. 그것도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일어나자마자.
아침에 일어나서, 모닝커피와 노릇노릇하게 구운 토스트에 땅콩버터를 발라 먹는다 해도, 아침에 일어나는 건 싫다. 그런데 일어나자마자, 배에 주사를 맞는 기분은 정말 구리다. 게다가 크녹산이라는 녀석은 아프다. 기억을 되짚어 보면, 맞을 때 바늘에 공기가 잘못 들어가면 멍이 들었다. 천천히 놓지 않고 빨리 놓으면 멍이 들었다. (그런데 천천히 놓아도 멍은 들었다.) 일어나서 바지를 입으면 멍이 들었다. 처음 맞을 때는 멍이 안 들었다가도, 회사에 가서 앉아서 일을 하다 보면 멍이 들어있었다. 한마디로, 어떻게 해도 멍이 드는 그런 주사였다. 매일 주사를 맞다 보니, 푸르렀던 멍이 노랗게 옅어지고, 그 자리에 또 푸른 멍이 들었다. 그리고 그 멍이 노랗게 흐려지고를 반복하다 보니 이발랄씨의 배는 늘 눈물 없이 볼 수 없던 단풍놀이가 한창이었다.
자꾸 아픈 척 해서 미안하긴 한데- 그렇다고 멍만 드는 건 아니다. 주사를 맞으면 온 몸에 약이 퍼지는 게 느껴진다. 어지럽다. 바로 움직이면 속이 울렁거린다. 때문에 이발랄씨는 아침부터 몽롱하게 누워,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생각해보곤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남편 이자상씨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이자상씨는 매일 아침마다 눈물을 글썽이며 이발랄씨의 배에 주사를 놓았다. (요즘 잠깐 이엄한씨가 될 뻔하긴 했어도) 이자상씨의 이름이 괜히 이자상씨가 된 것이 아니다. 이자상씨는 이발랄씨가 손이 살짝 베이기만 해도, 약국으로 달려가는 여린 마음의 소유자이다. 그런 이자상씨가 매일마다 이발랄씨의 배에 주사를 놓아야 했으니, 그 마음은 어땠을까. 이자상씨는 이발랄씨의 배에 주사를 놓고 나면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출근하기 전에 샤워를 다시 했다. 그렇게 몇 달이 흐른 뒤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이자상씨는 간호사 못지않은 주사 실력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힘들었지만, 어디다 얘기하기도 참 뭐한 얘기였다. 하나님께 기도로 얘기하는 것 외에, 달리 얘기를 할 곳은 없었다. 지구상에서 이발랄씨에겐 이자상씨가, 이자상씨에겐 이발랄씨가 있을 뿐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기를 생각하면, 어두운 터널을 걸어가고 있던 소년과 소녀의 이미지가 이발랄씨의 마음 속에 있다. 그 소년과 소녀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어둠 속에 들리는 낯선 소리에 무서워하기도 하지만, 항상 손을 꼭 잡고 있다.
새벽 한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감상적으로 쓰고 싶진 않지만, 지금도 둘의 꼭 잡은 손을 생각하면 왠지 마음이 짠해지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