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실베이니아에서 본 바이든 대통령 시대
"저 안엔 민주당 참관인만 들어갔다고. 왜 우리는 못 들어가게 하는 거야. 이번 선거는 거대한 사기야!!"
커다란 트럼프 서포트 깃발을 거머쥐고 필라델피아 컨벤션 센터 앞을 지키던 마크가 이야기를 하며 점점 화가 난 모습이었다. Police라 쓰인 티를 입은 그는 주변을 둘러싼 경찰들이 모두 자신들 편일 거라고 믿고 있었다.
오래된 흑백 사진으로 만든 버튼 수십 개가 매달린 모자를 쓰고 있던 에디는 그들 하나하나를 열심히 설명하고 싶어 했다. 힐러리와 버니의 사진을 합성한 플래카드를 들고 소리치던 그는 유대인인 자신이 트럼프를 응원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얘기했다.
"트럼프는 평화주의자야. 이스라엘에 평화를 가져다줬고 중동과 전 세계에 평화를 지켰지. 한국이라고? 그럼 당연히 우리 유대인처럼 트럼프를 지지해야지!!"
더 자세히 얘기를 들어보고 싶었지만 하나같이 마스크를 하지 않고 소리를 지르는 통에 자꾸 뒷걸음질 쳐졌다.
펜실베이나에서 결정된 승자
선거 나흘째인 11월 6일, 거대한 축제장 같기도 정신없는 도떼기시장 같기도 한 이 곳은 펜실베이니아 컨벤션센터 앞이다. 선거날인 화요일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미국 TV 화면에서 비치던, 이번 선거의 코어 같은 곳. 축구장 13개 크기의 센터 안에선 미국인들의 관심이 집중된 필라델피아의 개표가 진행 중이고 센터 바깥에는 친 트럼프와 반 트럼프 시위대가 몰려 전쟁터가 다름없다. 경찰이 만들어놓은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뉜 시위대가 데시벨을 높이고 있는 중이다.
"난 간호사예요. 우리 간호사들은 트럼프를 증오합니다. 당연하죠, 코비드로 수많은 사람들을 병원에 실려오게 만든 당사자고 전선에서 생사를 다투는 우리들에게 마스크조차 제대로 공급 못한 사람이니까요."
"난 올해 92세인데 지난 트럼프 4년은 내 생애 최악의 정권이었어요. 그는 공감능력도 없고 무능하며 무책임하기까지 합니다. 대통령으로선 최악이었죠."
반 트럼프 진영에서 만난 간호사 앨리는 벌써 사흘째 근무를 마치고 동료들과 매일 컨벤션센터로 출근한다. 피곤하긴 커녕 그동안 쏟아지는 환자를 돌보며 쌓였던 스트레스가 풀리는 기분이라고. 젊은이들에게 트럼프 퇴출 스티커를 나눠주던 헬렌 할머니도 90 평생 최악의 대통령이 곧 물러날 수 있을 것 같아 기쁜 마음이라고 했다.
경찰을 사이에 두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구호를 외치는 해방구 같지만 이틀 전만 해도 매우 심각한 분위기였다.
11월 8 일, 필라델피아 경찰은 42세, 61세의 두 남자의 사진을 공개했다. 이들은 3일 밤 펜실베이니아 컨벤션센터 인근에서 흉기를 소지한 채 기소됐다. 중무장한 퇴역 군인인 두 남성은 여러 무기를 소지한 혐의였다. 당시 센터 안에선 우편투표 개표가 한참 집계 중이었는데 이들은 험머 트럭에 무기와 탄약을 싣고 진행 중인 컨벤션센터에 접근했다. 경찰은 이들이 개표소를 공격할 목적으로 필라델피아에 진입했다는 FBI의 제보를 공개한다. 그들의 트럭엔 민주당을 모함하는 음모 세력, 큐아난을 홍보하는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현재 이들은 필라델피아 법원에 의해 각각 75만 달러의 보석금이 책정된 상태이다.
이렇게 펜실베이니아 컨벤션 센터는 2020 대선의 태풍의 눈이 되고 있다. 개표소 내 부정이 진행되고 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문제 제기에 지난 5일 필라델피아 법원은 투표 감시원을 원래 20ft에서 6ft로 접근해 감시할 수 있도록 선거법을 변경해 결정했다. 누구나 사이트에 들어가 현장 상황을 지켜볼 수 있도록 개표소 내 카메라를 설치했고 민주당과 공화당 옵서버를 동수로 배치하고 있음을 수시로 확인했다.
그렇게 동부시간 11월 7일 정오, 필라델리아 주의 결과가 발표됐다. 마지막 남은 군인 부재자 투표의 나머지가 모두 트럼프에게 간다 해도 바뀌지 않는 바이든의 승! 이로서 20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한 바이든이 270석의 고지에 먼저 올라 '대통령 당선자' 신분이 된다. 경쟁자 트럼프 대통령의 패배 인정 연설이 없었지만 모든 의전과 대우가 '대통령급'으로 격상된 순간이다.
"민주당원, 공화당원, 무당파. 진보세력과 온건파와 보수파, 젊은이와 노인. 도시와 교외와 시골. 동성애자와 이성애자와 성전환자. 백인과 라틴계 아시아, 아메리카 원주민까지. 역사상 가장 다양하고 광범위한 이들의 연대가 나는 너무나도 자랑스럽습니다."
미국 시간 11월 8일 저녁, 자신의 지역구 델라웨어에서 조 바이든의 대선 승리 공식 선언 연설이 있었다. 미국 대선 사상 가장 많은 7400만 표를 얻었지만 겸손하게 분열된 미국을 단합되고 강력한 국가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렇듯 개표 완료와 동시에 승리 선언과 코로나 관련 인수위원회 임명식 등 대통령직 인수 절차가 언론과 여론의 호위 속에 빠르게 진행 중이다. 트럼프 측의 대응은 언론의 조롱과 내부 소통 문제 등이 겹쳐 체계적이지 못한 모습이 노출되고 있다. 대통령이 트윗에서 대대적으로 홍보한 법률팀의 기자회견 해프닝이 그것이다.
실제 필라델피아에서 만난 트럼피들의 모습도 다르지 않았다. 수적으로 반 트럼프 시위대의 1/10도 되지 않았고 그들의 내세운 문구도 아침에 올라온 트럼프 대통령의 트윗 내용 그대로였다. 경찰의 강력한 조치에 무기를 소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트럼프 깃발과 성조기만으로 컨벤션 센터에 모여 있는 모습은 여러 가지로 초라한 모양새였다. 경찰과 사법부가 탈법행위에 강력 조치하는 상황에서 선거 결과가 바이든 쪽으로 기울자 많이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필라델리아 개표소에서 직접 극렬 서포터들을 만나 얘기를 나눈 느낌은 기존의 걱정과 우려와는 좀 다른 감정이었다. 새 대통령 당선이 확정되고 경찰과 사법 제도가 제 역할을 하게 된다면 지난 4년의 기억같이 그리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대통령이라는 든든한 백이 없어진다면, 확신이 들었다.
반 트럼프 아래 온건 공화에서 극좌까지
경찰이 나누어 논 바리케이드 왼쪽의 반 트럼프 시위대는 매우 시끄러웠다. 커다란 앰프와 DJ, 그리고 지역 악대 등이 시차를 두고 함께하며 바이든의 승리를 축하했다. 그들 중엔 공화당이지만 트럼프가 싫어 바이든을 찍은 이부터 온건한 민주당, 버니 샌더스를 따라 민주당에 가입한 이들 그리고 정당 바깥에서 사회주의를 표방한 단체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반 트럼프'의 기치 아래 한 목소리로 대선 기간 동안 치열하게 건너편 트럼프 서포터들과 싸운 넓은 스팩트럼의 연합 집단이었다. 오늘의 민주주의를 만든 사람은 누구든 가져갈 수 있는 물과 음식과 손소독제와 하얀 장미가 여기저기 놓여 있어 작은 해방구처럼 보이기도 했다. 기꺼이 자기 것을 나누고 벤모와 페이팔 번호를 받아 즉석에서 후원하면서 그들은 한 목소리로 '조 바이든', '노 트럼프'를 외치고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이념의 사람들을 한데 묶을 수 있었던 조 바이든의 힘이 경이로울 정도였다. 상식적인 미국인들에게 트럼프의 존재가 얼마나 엄청난 스트레스였는지, 그래서 미국인들에게 이번 선거가 얼마나 절박했는지 실감이 날 수 있었던 현장이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더 이상 억지를 부리지 못하는 상황과 비례해 이들의 연합전선은 서서히 자신의 포지션을 찾아가게 될 것이다. 월요일부터 시작하는 인수위원회의 구성을 앞두고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 하원의원이 강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버락 오바마가 왜 민주당밖에 따로 선거 조직을 만들었는지 아나? 오바마가 그 조직을 계속 관리하지 않으면 우린 하원 의석을 잃게 될 거다. 왜냐하면 지금 민주당은 핵심 역량이 없는 당이기 때문이다. 그건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도 고칠 수 없다."
선거 직후인 11월 9일, NYT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민주당의 무능과 문제를 비판했다. 이번 선거에서 흑인 인권운동과 그린 뉴딜 같은 진보적 메시지가 의회 의석을 잃게 만들었다는 일부 민주당 의원들의 주장을 반박이기도 했다. 더불어 바이든 정권이 버니 샌더스 계열의 진보 인사를 중요 위치에 두지 않으면 2022년 중간선거에서 대패를 할 것이라는 경고였다.
"바이든 승리의 결정타였던 미시간, 필라델피아, 조지아의 높은 투표율은 풀뿌리 운동가들 덕이다. 민주당이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그들과 함께하지 못하면 앞으로 어떤 승리도 기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현재 바이든 인수위원회 책임자로 지명된 존 카시치 전 오하이오 주지사는 온건파 공화당원들에게 바이든 지지를 호소했고 이는 보수적인 중북부 지역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중북부 지역의 선거인단은 모두 트럼프에게 갔고 오하이오도 트럼프가 바이든을 850만 표 차이로 이긴 주이다.
민주당 내 진보세력을 대표하는 AOC는 CNN에 출연해서 민주당에 활력을 잃은 민주당을 일으킬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진보그룹과 대화하기를 요청했다.
상식적인 나라를 만들기 위해 '반 트럼프'로 뭉쳤던 이들이 이제 서서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조 바이든은 어젯밤 대선 승리 공식 선언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 밤 전 세계는 미국을 보고 있습니다. 저는 미국이 세계의 등불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힘의 본보기가 아닌 모범적인 본보기로 이끌 것입니다."
전 세계인의 지지와 열망 속에 치러진 미국 대선, 그 뒤에 펼쳐질 새로운 미국의 민주주의를 전 세계인이 지금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