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한 트럼프 그림자에 분열하는 공화당
"켄터키 더비 우승 말도 마약쟁이였다니. 이건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상징한다. 국경을 넘는 난민 무리들, 가짜 대통령 선거 같은 걸 보면서 전 세계가 우리를 비웃고 있다!"
지난 일요일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자신의 블로그에 '성명'을 올렸다. 150년 역사의 켄터키 더비 스캔들을 빗대 바이든 정부를 성토하는 내용이었다. 토크쇼 진행자들에겐 신나는 먹잇감이 된다.
"뭐라는 거야? 그 우승 말이 안티파에게 양성반응을 보였다고 생각하나 봐?"
"이게 전 대통령의 공식 성명 거리야?"
"그가 전직 대통령이라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근데 레전드라는 거잖아."
덕분에 소문만 들었던 트럼프 블로그를 찾아봤다. 지난 1월 6일, 의사당 폭동 이후 일시 또는 영구 정지된 트럼프의 트위터, 페이스북, 유튜브를 대신한 <도널드 J. 트럼프의 책상에서>라는 이름의 사이트다. 정치에 대한 훈수는 여전하고 트럼프가 지지하는 공화당 후보들의 이름이 다수 올라와 있다. 바이든 정부 출범 100일이 지났지만 공화당 내 트럼프의 영향력은 건재를 넘어 당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수준이 되고 있는 현장이었다.
공화당서 쫓겨나는 반 트럼프
"급진적 정책으로 미국을 망가뜨리고 있는 민주당을 막기 위해 우리 공화당은 일치단결해 의장 소환 투표를 해야 합니다."
공화당 하원 서열 1위, 공화당 원내대표 캐빈 매카시는 Fox와의 인터뷰에서 서열 3위 리즈 체니 의원 축출을 다짐했다. 미국 시간 5월 12일 열릴 소환 투표를 앞두고 원내대표는 공화당 의원 한 명 한 명에게 서한까지 보내 투표를 종용 중이다.
"좌파들과 달리 우리 공화당은 자유로운 생각과 토론을 포용합니다. 다양한 배경의 유권자들을 대표해 우리가 선출되었지만 지도부는 우리의 일과 목표에 부합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공화당 원내대표가 당 서열 3위 축출의 이유는, 2020 대선에서 광범위한 부정이 벌어졌다는 도널드 트럼프의 주장을 비판했다는 것이다. 1월 6일, 미 국회의사당에서 벌어진 폭력 사태를 선동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서 탄핵을 가결한 공화당 하원 10인 중 한 명이라는 이유였다.
"미국 대통령이 폭도들을 불러 모아 공격을 명령했습니다. 대통령은 폭도들의 의회 공격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폭도들을 즉각 비난했어야 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 당시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트럼프의 정책에 찬성표를 던졌던 와이오밍주 하원의원 리즈 체니. 그녀는 의사당 폭동이 있었던 1월 6일 이후 입장을 바꿨다. 공화당이 트럼프와 절연해야 제대로 된 보수 정당으로 외연을 넓혀갈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초기엔 대부분의 공화당 지도부도 그녀와 같은 입장이었다. 미치 멕코넬 공화당 상원 대표나 트럼프와 친분이 두터운 린지 그레이엄 의원은 물론이고 지금 리즈 체니 축출에 앞장서고 있는 캐빈 매카시도 트럼프 비난 대열에 함께 한 이들이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지금 모두 돌변했거나 침묵 중이다. 바이든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대선 결과를 승복하지 않는 트럼프의 영향력이 공화당 유권자들 사이에 견고하자 비난의 목소리가 잦아든 것. 그들 대부분은 앞 다퉈 트럼프 별장으로 달려가 눈도장을 찍고 충성의 증거로 리즈 체니 축출에 함께하고 있다.
아버지 딕 체니 전 부통령의 응원을 받으며 끝까지 트럼프의 축출을 주장하던 리즈 체니는 지금 공화당 지도부 축출은 물론 다음 선거마저도 위험한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제3당 창당?!!
모든 공화당 인사들이 지도부의 뜻과 같은 건 아니다. 지난 일요일 NBC <Meet the Press>에 출연한 공화당 인사인 래리 호건 메릴랜드 주지사도 지금의 공화당 상황을 우려한다.
"우린 공화당 역사상 최악의 4년을 보냈고 백악관과 상. 하원을 모두 잃었습니다. 성공적인 정치는 뺄셈, 나눗셈이 아니라 덧셈과 곱셈이어야 합니다."
공화당 내 큐어넌 지지자를 비롯한 극우 성향 의원들이 트럼프 대통령을 중심으로 뭉치며 앵글로색슨의 이상을 실현하는 극우 모임 추진 같은 극우 정당화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트럼프의 영향력을 두려워하는 공화당이 백인 극단주의자들의 정당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부시 전 대통령도 공화당의 극우화 비난에 동참했다. 지난 5월 1일, 코로나로 숨진 텍사스 하원의원의 보궐선거를 앞두고 자신이 주지사로 있었던 텍사스 유권자들에게 경고했다.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의 우세는 공화당 스스로 멸종되기를 원한다는 말과 다름없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공화당은 길게 잡아도 5년 안에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공화당 내 조직적인 반발도 시작됐다. 리즈 체니 축출 투표 하루 전인 5월 11일, 전직 선출직 관료를 포함한 100여 명의 공화당원들이 목소리를 낸 것. 민주공화국에서 음모와 분열 그리고 전제주의 세력이 발현할 때, 자유와 정의를 수호하기 위한 집단행동은 애국 시민들의 의무라고 한 이들은 당이 트럼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선택을 계속한다면 자신들은 제3의 정당 구성을 준비하겠다는 내용이다.
트럼프 대통령 시절, 국토안보부 관계자로 트럼프 행정부를 비난하는 책을 쓰고 뉴욕타임스에 익명으로 기고하기도 마일즈 테일러가 이들을 대표해 경고했다.
"나는 공화당이 진실과 이성을 버린 이후 간신히 버티고 있는 당원 중 하나입니다. 우리 공화당이 자유의지, 자유시장, 자유로운 사람들이 지지하는 합리적 정당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나 포함 많은 이들이 당을 떠날 것입니다."
로이터 통신에 의하면 테일러 씨가 주도하는 이 성명에는 공화당 출신의 전 교통부 장관, 주지사, 다수의 하원의원들이 함께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유권자와 단절된 정당
트럼프 시대로 돌아가는 공화당의 기류는 합리적인 공화당 내부 인사는 물론이고 바이든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민주당 인사들도 걱정하는 분위기다. 팬데믹 상황에서 토론과 의사결정이 가능한 합리적인 야당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의 코로나 확진자와 사망자 발생이 1년 넘게 지속되는 와중이라 지켜보는 유권자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정당에 표를 주는 유권자보다 전 대통령의 심기가 더 중요해 보이는 공화당 지도부를 향해 CBS <The Late Show> 진행자 스티븐 콜베어가 트윗했다.
"내전 중인 공화당이 어떻게 패배자의 동상을 세울게 될지... 난 너무 궁금하다."
대선에서 패배한 공화당이 트럼프와의 결별 대신 그 영향력에 매달리고 있다는 조롱과 우려의 비아냥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5월 10일 자 신문에 칼럼니스트 유진 로빈슨의 우려를 게재했다.
<미국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공화당이 현실과 단절하는 것이다>
유권자와 단절된 제1 야당을 둔 미국이 걱정스러운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