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약속
“어? 엄마, 이게 뭐야?”
학원에서 돌아온 아이의 눈동자에 물음표가 잔뜩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앞에는 4절지 두꺼운 스케치북 하나가 놓여있다. 표지도 범상치 않다. 무려 [오빠의 다짐]이다.
“이거? 엄마도 막 펼치려던 참인데 같이 볼래?”
궁금증 폭발 직전. 아이는 서둘러 가방을 내려놓고는 후다닥 손을 씻고 나온다. 쩌억 소리를 내며 스케치북이 열린다. 아기자기한 글씨가 자태를 뽐낸다.
2015년 10월, 가을이었다. 애정하는 전문 스냅 작가님을 섭외하여 야외에서 웨딩 촬영을 했다. 장소 섭외, 여러 벌의 의상, 헤어와 메이크업 그리고 작은 소품들까지도 모두 우리의 손길을 거쳤다. 하루 만에 법기 수원지, 아트 인 오리(예술가 마을), 다대포 세 곳에서 촬영을 했다. 정신없는 와중에 미리 준비한 콘셉트에 맞추어 옷을 갈아입고, 소품을 챙기고, 앵글 앞에서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포즈와 표정을 짓기까지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사랑 말고는 설명할 길 없다. 제 아무리 결혼 준비라지만, 제 아무리 단 한 번뿐인 웨딩 촬영이라지만 엄청난 에너지와 열정 없이는 소화하기 힘든 일정이었다.
그 날 마지막 촬영지는 석양이 황홀하기로 유명한 다대포 해수욕장이었다. 처음에는 맨발로 해변가를 거니는 정도였는데 석양이 절정이던 순간에는 작가님도, 우리도 이미 무릎까지 바닷물에 잠긴 채 한 번 뿐일 순간을 남기고 있었다. 10월의 가을 바다. 드레스가 젖어들고 차가운 바람에 몸이 달달 떨렸어도 마냥 웃었다. 억지로 웃은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왔다. (다시 한번, 사랑이다.)
무거워진 드레스를 이끌고 해변가에 서서 젖은 몸을 말리고 있는데, 남편이 어디선가 쓰다 버린 낚싯대를 가지고 와서 눈앞에서 흔든다. “넌 이제 나한테 낚였어!” 같은 실없는 농담에 다시 또 웃고 말았다. 남편과 작가님이 여긴 이제 어둡다는 말을 주고받으며 해변 뒤편 공원으로 걸음을 옮기는 순간에도 몰랐다. 우리가 섭외한 작가님은 늘, 촬영 마지막에 신랑 신부와 함께 한 장의 사진을 남기시곤 했으므로 그 사진을 찍기에 어둡다는 말 정도로만 이해했다. 촬영 내내 동행한 친구와 함께 무거워진 드레스 끝자락을 움켜쥐고 공원 한 켠, 가로등이 시야를 환히 밝히는 곳으로 걸었다.
[오빠의 다짐]
그 때였다. 곁에서 함께 걷던 친구가 갑자기 작가님 쪽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작은 카메라 하나를 넘겨받아 앵글을 내 쪽으로 맞추는 게 아닌가. 어깨를 으쓱이는데 남편이 주섬주섬 뭔가를 꺼낸다. 그랬다. 바로 아이와 내가 함께 펼친 그 스케치북이었다. 러브 액츄얼리의 실사판이 따로 없었다. 남편이 커다란 눈망울 가득 진심을 담아 한 장씩 천천히 스케치북을 넘겼다.
「나는 너를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
「은 못해줘! 세수는 해야 하니까!」
「그렇지만 그 물이 차갑게 느끼지 않게 해 줄게」
「평생 안 울리겠다는 약속」
「은 못해줘! 행복해도 사람은 우니까!」
「대신 금방 그 눈물 닦아줄게」
「평생 공주처럼 살게 해 줄게」
「라는 말은 못 해줘! 대신 평생 너를 공주처럼 모시고 살게」
「사랑한다」
"에이, 이거 아빠 못 지킨 거 같은데? 진짜 아빠 다짐이야?"
"응, 맞는데? 엄마 생각엔 아빠 이렇게 살고 있어~"
아기자기한 글씨체가 낯설어서인지, 아빠 말고 남자로서의 고백이 어색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다정함 농도 100퍼센트의 다짐이 비현실적이어서인지 아이가 믿지 못하겠다는 눈초리로 스케치북을 쏘아본다. 프러포즈의 마지막은 속지만 갈아 끼우면 평생 사용 가능한 고급 다이어리였다는 사실은 아이에게 밝히지 않았다. 당시 일기장에 꼬박꼬박 일상을 기록하는 내게 앞으로 그 모든 일상에 자신이 함께 하겠다던 느끼한 고백까지 들으면 아무래도 아이가 우리 둘을 어색해할 것만 같아서.
누구보다 남편다운 프러포즈였다. 쉽게 약속하지 않지만 한 번 제 입으로 한 말은 꼭 지키는 사람.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 하나를 다짐하기까지 무수한 고민과 다짐과 포기를 다졌을 사람. 지난 결혼 8년은 남편의 약속대로였다. 집안일로 늘 손이 젖었지만 차가운 적 없었고, 기쁘거나 슬퍼서 자주 울었지만 누구보다 내 눈물을 두려워하며 전전긍긍하는 남편이 곁에 있었고, 이 세상 최고의 공주까지는 아니었지만 이 가정의 공주 아니 왕비 대접은 받으며 살았다. 그로 말미암아 그 어떤 모습의 나여도 괜찮다는, 더없이 비루하고 찌질한 순간에도 언제나 포근히 품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거대한 안식처를 제공해 주었다. 나와의 평생을 걸고 했던 이 굳고 단단한 약속, 이 남자는 과연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너무도 많은 것이 변한 것 같은 지난 8년 사이, 정작 변함 없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한 남자를 마음 가득 품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