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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비 Nov 12. 2024

걷기 축제가 아니라 산악 훈련

전국 걷기 축제에서 일어난 일

 

 

시작은 단순했다. 지역의 주요 산을 중심으로 걷기 축제가 열린다는 플랜카드가 동네 여기저기에 걸린 지 제법 오래되었고 지인들 중에는 벌써 참여 신청을 했다는 소식들을 전해왔다. 벌써 2회째 열리는 걷기 축제. 1회 때 참가자들이 당시 축제의 이모저모를 기록한 블로그를 염탐하다가 결국 접수 사이트에 접속했는데 몹시 단순한 이유들로 마음이 동했다. 정해진 4개의 코스 중 원하는 하나를 선택하면 되고, 마침 집결지가 집에서 몹시 가깝고, 게다가 3대 가족이 참여하면 특별 선물까지 준다는 게 아닌가. 딱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남편이 출장을 떠나 있는 기간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친정 아빠와 나, 아들 3대 가족으로 신청서를 작성했다.

 

3코스를 골랐던 것은 오직 총 걷는 거리 때문이었다. 5.5km만 완주하면 된다니 이 정도면 아이도 아빠도 무리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오직, 거리만 봤다. 5.5km를 완주하는 데 2시간 30분이 소요된다는 설명글을 보면서도 아무런 의심을 하지 못했다. 정말로 몰랐다. 산 하나를 넘는다는 설명이 있었어도 등산로를 따라 걷는, 말 그대로 ’걷기‘만을 떠올렸다.

 

 

걷기 당일 아침 일찍 아빠와 아이의 손을 맞잡고 집결지에 도착했다. 판박이 스티커를 손등에 다 같이 붙였고, 나눠주신 간식을 오물오물 먹으며 오늘의 설레는 마음을 나눴으며, 준비 체조를 장난스럽게 또 진지하게 임하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달랬다. 꽤 먼 거리와 시간이 소요되는 1코스와 2코스는 신청자가 매우 적었다. 3코스는 860여 명이, 4코스는 300여 명이 신청했다는 설명을 들으며 역시 3코스가 할 만한 코스인가 보다 쉽게 여겼다. 홈페이지에서 보았을 때의 내 기억이 맞다면 4코스는 10km를 완주해야 했었다. (이 거리에 뜨악한 마음이 들어 더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출발 신호에 맞추어 걷기가 시작되었다. 3코스가 그래서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느냐? 궁금증을 가득 안고 걸음을 옮겼다. 길을 몰라도 문제 될 것 없을 만큼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그저 앞서 걷는 사람들을 따라 발맞추어 걸으면 되었다. 체육공원을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경사를 맞닥뜨리고도 아빠와 아이를 안심시켰다. 블로그에서 봤을 때, 초반에 조금 경사가 있긴 해도 나중에는 능선들이 이어진다던 설명을 덧붙였다. 허벅지가 단단하게 조여 오고 숨이 차올랐지만 괜찮았다. 산을 하나 오른다는데 이 정도도 하지 않을까 싶었으니까.

 

숨이 깔딱깔딱 넘어간다고 해서 깔딱 고개라 이름 붙이는 경사로가 끝나자 정말 거짓말처럼 비교적 안정적인 능선들이 이어졌다. 길이 좁아 성인 한 명 기준, 한 줄로 서서 걸어야 했지만 이윽고 곁에 우뚝 솟은 나무들이, 흩날리는 낙엽들이, 발아래 펼쳐진 도심 풍경들을 즐길 여유도 생겼다. 편백나무 향기도 일품이었다. 애석하게도 그 순간의 여유와 즐거움을 끝으로 나는 아연실색하고야 만다. 결코 만만한 코스가 아니었다.

 

 

 

이 정도면 걷기 축제가 아니라 산행 축제 혹은 산악인 축제라고 해야 할 것 같은 길들이 자꾸만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보다 한층 더 난관이었던 두 번째 깔딱 고개에서는 땀이 온몸을 적셨다. 세 번째 깔딱 고개에서는 이윽고 아이가 중도에 주저앉았다. 한 번도 쉬지 않고 걷던 아이의 입에서 ‘힘들다’는 말이 절로 흘러나왔다. 말없이 물로 입을 적시고는 지나온 길을 멍하니 바라보는 아이 곁에서 침이 말랐다. 네 번째 깔딱 고개가 나왔을 때는 세 사람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해병대 출신인 아빠는 과거 군인 시절 20kg 군장을 들쳐 매고 산을 무작정 뛰어오르는 행군을 상기하며 꼭 그 시절의 코스와 닮아있는 경사라고 혀를 내둘렀다. 일반인들, 그러니까 평소 산을 타지 않는 사람들이 완주하기에 너무 상급의 코스라는 설명. 그럼에도 두 사람은 이 코스를 선택한 나를 조금도 질타하지 않았다. 이런 코스에 대해 적절한 안내가 부족했던 주최 측에 아쉬움을 표했고, 나와 비슷한 자신감으로 신청했을 860여 명의 고생길을 안타까워했다. 나름대로 건강한 성인인 내게도 힘들고 아득했던 코스, 아빠와 아이에게는 극기훈련에 버금가는 시간들이었음에 틀림없을 텐데 두 사람은 각자의 인내와 노력들을 녹여내고 있었다.

 

우리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어도 우리는 계속해서 걸었다. 챙겨간 간식을 챙겨 먹으며 서로의 수고스러움을 치하하고 용기를 북돋으며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마지막 정상을 남겨두고 올라야 했던 100m 거리는 아이가 두 손과 두 발을 모두 써서 기어올라야 할 만큼 가파르고 위험했다. 아찔한 순간이 이어졌다.

 

“와! 엄마! 진짜 보여! 끝이야!”

 

셋 중 제일 앞서 걷던 아이가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아이 머리 너머로 파아란 하늘이 넓게 펼쳐졌다. 운영진의 응원 소리와 박수 소리가 메아리쳐 울렸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우리 동네는 참 아름다웠다. 크고 작은 건물들이 오순도순 모여 있는 모양새가 정다웠고, 늘 오가던 길이 실선처럼 가느다랗게 보이는 풍경이 낯설면서도 반가웠으며, 작게 보이는 건물들 사이로 서로의 아파트와 익숙한 공간들을 찾는 재미가 쏠쏠했다. 탁 트인 정경 앞에서 말 못 할 쾌감도 퍼졌다. 등산을 좀처럼 좋아하지 않는 내가, 실로 오랜만에 산에 오른 아빠가, 태어나 처음으로 등산이라는 것을 해 본 아이가 모두 벅차오르는 감정을 꾹꾹 누르며 그 순간을 사진에 담았다.

 

내려오는 길은 그래서 달콤했느냐, 묻는다면 절대로 아니었다. 산을 오를 때의 무시무시한 경사로를 닮은 하산길이 펼쳐졌는데 마른 낙엽들로 땅이 덮여 있었다. 즉, 오를 때보다 훨씬 더 위험 천만한 하산길이었다. 아이의 손을 붙잡고 종종걸음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아이는 내게, 나는 아이에게 서로의 몸을 의지하고 모험하듯 걸었다. 높디높은 산 하나를 정복했다는 즐거움도 잠시, 하산길 내내 우리는 오랜 시간 말을 잃었다.

 

그럼에도 결국 우리는 주어진 모든 코스를 완주했다. 완주 증서를 받는데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아이가 중간에 울면서 주저앉아버리면 어쩌나, 누구 하나 잘못해서 다치면 어쩌나, 이런 줄 알았으면 쉽게 도전하지 않았을 텐데, 아이가 이 일로 산을 영영 싫어하게 되면 어쩌나 걱정과 불안, 두려움으로 점철된 지난 시간이 바람결에 씻겨 내려갔다. 집결지의 잔디밭에 주저앉아 그제야 편안히 쉼 다움 쉼을 누렸다. 아이는 힘들어했지만 단 한순간도 포기를 떠올리지 않았고, 다행히 세 사람 모두 다치지 않고 무사히 완주했고, 코스가 고단하긴 했어도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새겼음에 뿌듯해했고, 아이는 이 일을 통해 뭔가 정말로 인생에서의 큰 산을 하나 넘은 것만 같았다.  

 

 

 

그제야 집결지에 도착한 완주 인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2코스는 절반도 채 안 되는 사람들만이 완주 도장을 받았다. (중도 포기자가 많았던 것 같다) 나중에야 안 사실인데, 10km였던 4코스의 소요 시간 역시 3코스와 마찬가지인 2시간 30분이었다. 평지로 이루어진 하천길을 왕복해서 걷는 코스였다. 거의 두 배에 달하는 거리 차이에도 불구하고 3코스와 4코스 간 소요 시간이 같다는 사실만 미리 알았더라도 4코스를 신청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3대 걷기 완주 선물로 제법 튼튼하고 커다란 냄비를 받고, 추첨을 통해 가락국수 면 세트도 받아 룰루랄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다시는 걷기 축제를 하지 않겠다 선언할 줄 알았던 아이가 내년에는 10km인 평지 코스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고단한 코스를 이겨낸 아이에게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빠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아이의 지구력과 끈기를 두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고, 평생 할아버지와의 오늘을 잊지 말고 서로 오래토록 기억하자는 뜨거운 말도 남겼다.  

 

 

 

그야말로 무지해서 할 수 있었던 도전이었고, 그 덕에 일상에서는 마주할 수 없는 (그래서 어쩌면 평생 알기 힘들었을) 각자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나의 특별한 추억이 세 사람의 머릿속에, 가슴속에 별처럼 빛나게 박혔다. 각자가 앞으로 생에서 마주할 무수한 어려움과 시련 속에 오늘의 이 빛이 따뜻하게 달래줄 위로와 응원의 말들을 기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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