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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비 Nov 14. 2024

진정한 여유란 무엇일까요

조심스럽게 던지는 조언 한 스푼


아이를 낳고 기르며 잠정 중단했던 박사 논문을 올해 초부터 다시 준비하고 있다. 만사 다 제쳐두고 총력을 다 해도 쉽지 않은 일, 실로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지난하고 외로운 일에 뛰어들었다. 그저 '마흔 살에는 학위를 따면 좋겠다'는 막연한 기대감과 소망으로 시작했다. 매주 교수님을 만나 뵙고 한 주간의 진행 상황을 공유하며 1mm씩 천천히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번주 세미나를 시작하는데 교수님의 얼굴이 어둡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분인데도 그늘진 낯빛이 무언가 심상치 않다. 과도한 일정과 책무가 하루 이틀만의 일은 아니지만 최근 몇 주 상간에 그늘이 더욱 짙어졌다. 논문 이야기를 하다 말고 교수님께서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뱉으셨다.

 

"이거 근데 진짜 맞는 걸까?"

 

오전 11시 세미나. 교수님은 이미 오전 9시 출근과 동시에 10분, 20분 단위로 촘촘하게 채워진 일정을 모두 해치우고서야 겨우 내 앞에 앉으셨다. 그마저도 우리에게 허용된 시간은 넉넉잡아 40분. 좀처럼 본인 이야기, 특히 힘들다는 류의 투정은 결코 하지 않는 분의 입에서 제대로 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말씀이 튀어나온다. 아무리 열심히 달리고 또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 하나를 해 내면 둘이 기다리고 있는 이상한 상황들. 논문을 쓰고 연구를 진행하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는 것 같은데 그마저도 나와 잠시 만나는 이 때가 전부인 것만 같다는 씁쓸한 탄식이 이어진다.


 

 

분 단위로 쪼개어 살고 있다. 나 뿐만이 아니다. 내 앞의 교수님은 시간을 그보다 더 조각조각 쪼개어 살고 계신다. 조금만 주위를 둘러봐도 쫓기듯 일상을 살아가는 분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자신의 삶을 열정적으로 채워가고 있는 사람들이고, 상당한 능력을 보유한 탓에 다양한 업무가 과중하게 부여지만 막상 지켜보면 결국 해 내고야 마는 사람들이다. 정 반대편으로, 그러니까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겠다. 자신이 소진되는 지도 모르고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들이고,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들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빠르게 결단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긍정적인 쪽으로 모두의 시선을 돌리고 싶다. 그들이 가진 반짝이는 자원들이, 뜨거운 열정이 제대로 빛을 발하려면 쉼 한 스푼이 필요하다. 모두에게 정답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내게는 정답이었던 쉼, 여유  한 스푼을 소개한다. 물리적인 시간은 모두 똑같다. 나 혼자 하루 48시간을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어디까지나 바람일 뿐이다. 주어진 시간 내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자기 계발서에서 말하는 시간관리라던가 성공적인 업무 노하우 같은 것을 기대했다면 아쉽게도 그런 것을 해결해 줄 능력은 없다. 다만, 촘촘하게 짜인 일정 속에서도 나를 지키는 최소한의 시간을 확보하는 것, 그것이 지금의 나를 숨 쉬게 하는 쉼이자 여유이다.

 

 

 

하루 10분, 무조건 필사를 한다. 짧은 두 개의 꼭지를 읽고 마음에 닿는 구절을 남긴 뒤 단상을 쓰기까지 실질적으로 소요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놓치기 쉬운 마음들을, 생각들을, 사람들을 글에 녹여 붙잡는다. 하루 30분, 무조건 운동을 한다. 헬스장이나 하천에서 인터벌 러닝 30분을 채운다. 여유가 있는 날에는 헬스장에서 근력 운동까지 채워 한 시간 가득 몸을 챙긴다. 계속해서 일을 하려면 단단한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예쁜 몸, 날씬한 몸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매일을 잘 살아내기 위한 기초 체력을 위한 발버둥이다. 왕복 30분, 그러니까 하루 1시간, 무조건 나만의 고독을 씹는다. 홀로 운전을 하는 출퇴근 시간 30분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나만의 시간이다. 익숙한 길을 운전하며 그 날의 감정을 다독이고 묵은 고민들을 털어내는가 하면 하루하루 달라지는 계절을 두 눈 가득 담는다. 그야말로 풍성하고 다채로운 고독이 아닐 수 없다. 자동차 안, 나만의 고독을 씹으며 허술한 마음을 챙긴다.

 

앞서 언급한 시간을 모두 합쳐도 1시간 40여 분. 출퇴근 시간은 일부러 쪼개어 확보한 것이 아니므로, 일상 틈바구니에서 내가 애써 확보해야 할 시간은 40여 분에서 한 시간 정도면 충분한다. 하루 한 시간, 사소한 틈을 이어 붙인 그 한 시간이 하루의 나를 살리는 보석 같고 보약 같은 시간이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은 일상을 살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 예상한다. 괜찮다. 굳이 시간을 쪼개어 확보하지 않아도 누릴 수 있는 여유들이 있다. ‘태도’의 문제다. 연인이 연락 문제로 싸울 때 종종 나오는 대화 패턴을 떠올리면 좀 더 이해하기 쉽다. “넌 화장실도 안 가니? 그 틈에 잠깐 문자 한 통도 못 보내?” “하려고 마음만 먹었어봐, 식사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라도 안부 연락쯤은 할 수 있어”

 

그렇다.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지금 당신이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하건 매 순간 마음을 녹여보기를 권한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더라도 그 고소하고 아찔한 향기를 코로, 입으로, 눈으로 만끽할 수 있는 여유를 갖느냐 마느냐는 당신의 선택이다. 바쁜 와중 1, 2분의 여유가 생겼을 때 무의식적으로 sns나 쇼츠를 여는 대신 시선을 옮겨 오늘의 하늘을 볼 수도 있다. 단 한순간도 같은 모습인 적 없었던, 실내에서든 실외에서든 고개만 살짝 돌리면 기꺼이 마주할 수 있는 하늘을 마주하고 숨 한 번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는 여유를 즐긴다. (운전하는 시간을 고독의 시간으로 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나 역시 잘 몰랐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기 바빴고, 내 몸이 녹아내리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열정을 불태웠으며, 아무리 발버둥 쳐도 줄어들지 않는 일들 앞에서 한숨만 늘어놓았던 시기가 내게도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숨 가쁜 일과를 살아내면서도 최상의 컨디션과 여유를 확보할 수 있는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와 조금도 닮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에도 온전히 나를 건사하는 생을 꾸려가는 내가 아름답다. 그런 내가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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