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한 내가 빚어낸 지금에 관하여
심리학과에 진학할 그 당시만 해도 그저 ‘사람’에 매몰되어 있었다. 가장 궁금하고 어렵고 애처롭고 무서운 생명체, 인간에 대한 순수하고 단순한 호기심과 연민이었다. 거창한 포부나 원대한 꿈같은 건 전혀 없었다.
학부 1학년, 어쩌면 오랜 시간 심리학 곁에서 살게 될 것 같다고 아주 어렴풋이 그러나 생생하게 느꼈다. 내 발목을 붙잡은 것은 인간의 기억에 관한 챕터였다. 그야말로 첫눈에 사랑을 느꼈다. 불완전하지만 때문에 아름답기 그지없는 기억을 계속해서 탐구하고 싶어졌다. 그날을 계기로 인지 심리학에 깊고 단단하게 닻을 내렸으나 왠지 모를 뜨거운 갈증이 늘 마음 한 켠을 괴롭혔다. 범인은 바로 범죄 심리학이었다.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범죄 심리학이 대중에게 익숙하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심리학 내부 실정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미개척지에 가까웠던 범죄 심리학은 아무 데서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학문 분야가 아니면서 또 학부생이라면 누구나 호기심 어린 눈길로 선망하는 학문 분야라는, 상당히 모순에 가까운 영역이었다. 모두가 소리 높여 호소해도 누구 하나 그 분야에 대해 들려줄 이가 없었다. 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학부 4학년. ‘범죄 심리사’라는 직업을 처음으로 접했다. 심리학 출신 4학년 생이면 으레 듣게 되는 필수 및 선택 과목들 덕택에 자연스럽게 신청 요건은 갖춘 상태였다. 1년에 두 번(당시에는 여름과 겨울, 두 번이었다) 열리는 강의를 수강하고 시험을 통과하면 수련생 자격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난 직후부터 내내 그 해 겨울을 손꼽아 기다렸다. 범죄 심리사가 뭔지도 정확히 몰랐지만, 그저 유니콘 같았던 범죄 심리에 대해 머리카락 한 올만큼이라도 스쳐보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유난히 추웠던 그 해 겨울, 처음으로 범죄 심리학을 짧고 강렬히 맛볼 수 있었다.
이후 인지 심리학 대학원생의 삶을 살면서 동시에 범죄 심리사 수련생 자격으로 실제 경찰서에서 활동을 했고, 연차와 사례가 쌓여 범죄 심리사 1급 자격을 온전히 취득하기에 이르렀다. 그 사이 인지 심리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박사 수료까지 한 상태로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범죄 심리학은 다시 또 홀연히 내 삶에서 자취를 감추는 듯했다. (범죄 심리사로서만 실존하는 느낌이었다.)
2023년. 타 대학에서 1년간 강의를 맡았다. 그간 성실히 쌓아왔던 본교에서의 강의 경력이 빛을 발했다. 심리학 학부생과 대학원생 대상 전공 강의를 맡았는데 그 안에 ‘범죄 심리학’이 포함되어 있었다. 범죄 심리사로서 쌓은 실무 경력과 꾸준한 보수교육을 통해 습득한 최신 범죄 심리 지식을 총동원할 차례였다. 강의는 꽤 높은 호응과 칭찬 속에 마무리됐다. 그 언젠가의 나처럼 두 눈을 반짝이며 강의에 몰입한 학생들의 모습에서 전율도 느꼈다. 여전히 학생들은 범죄 심리학에 목말라 있었다. (여전히 전국에서 특정 몇 개 대학을 제외하고는 범죄 심리학 강의가 없는 실정이므로) 범죄 심리학의 이모저모를 들려줄 누군가를 자신들의 교정에서 만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이들은 몹시 기뻐했고 매 순간 나를 환대해 주었다. 그것은 과거 학부생이던 시절의 내게 건네는 위로의 인사이기도 했다.
2024년, 우연처럼 본교에서도 범죄 심리학 강의가 개설되었다. 오래전부터 학생들 사이에 수요는 많았으나 공급이 불가한 실정에 매년 개설을 미루고 있었던 과목이었다. 타 대학에서 범죄 심리학 강의를 하는 교수님들을 모셔오고 싶어도 개인적으로 상황이 여의치 않거나 혹은 마음과 별개로 거리가 너무 멀어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그야말로 아픈 손가락 같은 과목이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인재가 있다는 사실을 진작 알았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말씀과 함께 내게 잘 부탁한다는 담당 교수님의 인사 앞에 할 수 있는 선 이상의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학과가 개설되고 처음 개설되는 범죄 심리학 강의. 4학년 수강 과목임에도 불구하고 2학년들까지 수강신청을 하는 기염을 토했고 안타깝게 수강신청에 실패한 학생들로부터 꼭 증원을 해 주십사 부탁하는 메일이 엄청나게 쏟아졌다. 마음이 뜨거웠다. 내가 받지 못했던 어떤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된 후배들에게서 마음 한 편으로는 부러움을 느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정말 좋은 강의를 하고 싶다는 열정이 불타올랐다.
벌써 강의 중반부가 지났다. 학생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강의인지는 알 수 없다. 오랜 시간 그들의 염원을 온전히 해소해 주는 강의인지도 아직은 알 수 없다. (학기 말 강의평가가 말해 줄 일이다) 그러나 매시간 강의를 하는 내가 누구보다 행복하고, 그 공간을 가득 채운 학생들의 열정이 그 언제보다 뜨겁다는 사실은 직접 보고 느껴서 잘 안다. 감사한 일이다.
심리학과에 진학할 때까지만 해도 몰랐었다. 내가 심리학을 평생 공부하게 될 줄. 심지어 심리학을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될 줄. 게다가 이렇게 오랜 시간 강의를 하게 될 줄. 그뿐이랴. 강의를 그토록 오래 하면서도, 범죄 심리를 애정하는 마음을 품으면서도, 또 범죄 심리사로 활동하면서도 몰랐었다. 범죄 심리학을 강의라는 사람이 될 줄. 본교에서 처음으로 개설되는 범죄 심리학 강단에 내가 서게 될 줄.
아무리 애를 써도 확실한 출발 지점을 찾을 수는 없다.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분명 지난 과거의 무수한 나라는 것을 알지만,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였고 상상조차 하기 힘든 지금을 살게 될 줄 몰랐던 그때의 어린 나에게 문득 감사 인사와 응원을 전하고 싶어진다. 선물 같고 기적 같은 지금을 사는 나는 과거의 나에게 너무나 큰 빚을 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미래의 나 역시 현재의 나를 돌아보며 같은 마음일 것을 알기에 물음표 대신 느낌표를 매달고 한 걸음 한 걸음 마음을, 진심을 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