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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비 Nov 18. 2024

방황하는 마음

흔한 박사과정생의 사소한 투정

 

아이를 낳은 지 3개월 차, 돌연 박사학위 논문을 중단한 것은 결코 즉흥적이거나 충동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나의 도움 없이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내 눈앞의 작고 여린 생명체 앞에서 그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를 양육한다는 것은 심지어 나라는 존재조차도 홀연히 지워낼 만큼의 강렬한 영향력을 가졌다.) 당시 내가 연구하던 분야는 장면 지각이었는데, 그에 대해 어떠한 생각까지 들었느냐 하면 가령 이런 식이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연구를 하고 있지?', '아이 하나도 제대로 키우지 못하면서, 장면에서 어디에 주의를 기울이는 지를 논해서 뭣 해.', '이 연구를 해서 노벨상을 받을 것도 아니고, 사람 하나 제대로 건사하는 게 먼저 아닐까?'  

 

아이는 쑥쑥 자라 어느덧 내 손길이 많이 필요치 않은 나이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나를 돌아보게 됐다. 하고 싶었던 것들을 앞뒤 재지 않고 하나씩 해 나갔다. 어느 날, 새로운 경험의 숲 틈새로 과거의 내가 손짓하는 게 보였다. 아무런 미련 없이 털어냈던 박사 학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괜찮지 않았던 걸까. 마무리하지 못한 일에 대한 미련인지, 끝맺지 못한 학업에 대한 책임감인지, 혹은 연구밖에 몰랐던 그 시절에 대한 향수인지 모를 일이었다. 막연히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는 아니, 하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용기를 내어 다시 교수님을 마주했다. '저, 마흔 전에는 박사 학위를 딸 수 있을까요?' 수줍은 질문을 던졌던 것도 같다.  

 

석사과정에서 장면지각을 선택했던 것은 사실 '기억'을 연구하기 위함이었다. 그보다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심리학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데에는 인간의 '오기억' 또는 '재구성된 기억'이 있었고, 심리학에 흠뻑 빠져들게 만든 '목격자 기억'이라는 연구 주제가 있었다. 결국은 돌고 돌아 처음인 걸까. 박사학위 논문 주제로 목격자 기억을 택했다. 교수님과의 오랜 논의 끝에 나온 주제였다.  

 

매주 교수님과 세미나를 한다. 그 말은 곧 한 주 단위로 진척시켜야 할 사항들이 줄을 선다는 뜻이기도 하다. 최근의 내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논문 작업이라는 것이 상당히 지지부진하고 고단한 일이어서 종종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열심히 하고는 있는 것 같은데 직접적으로 눈에 드러나는 결과물이 실시간으로 나타나지 않고, 곤란하고 어려운 결정들을 내려야 하는 상황 앞에서 무수한 고민이 줄을 잇는다. 특히나 목격자 기억에 관해 한국 심리학의 연구 실태를 바라보고 있자니 한숨이 끊이질 않았다. 거듭 마주하는 막막한 벽 앞에서 자주 무너져 내렸다.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아 보여도 실시간으로 쌓아 올리고 다시 또 무너지기를 반복하는 모래성을 읽은 걸까. 교수님이 어느 날 조심스레 말을 건네셨다.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박사과정을 준비할 때쯤 되면 자기 연구에 대해서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것을 찾아내겠다, 거대한 일을 하나 해내고야 말겠다는 어떤 강박관념이 피어오르기도 한다. 그러다가 또 어느 날에는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내가 잘못된 구덩이를 파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허무도 밀려온다. 그럴 때마다 자주 휘청이게 되는데 돌이켜보면 생각보다 긴 방황의 아쉽고 안타깝다. 앞으로 진짜 제대로 연구를 하고 진정한 심리학자가 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하나의 관문쯤으로 박사 학위를 대하는 게 훨씬 용이한 마음가짐이다. 박사 학위라는 것은 사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만의 힘으로 연구가 충분히 가능함을 확인받는 일종의 자격증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많은 것이 간단명료해진다.'  

 

같은 시기를 건너왔을 선배의 마음으로 지도 교수님이 건넨 그 말씀을 거듭 곱씹는다. 그 말씀을 이정표 삼기로 한다. 방황하는 마음은 살포시 접어두고 어떤 식으로든 발걸음을 하나라도 더 내딛는 쪽을 택한다. 누가 그랬던가, 내가 걸은 모든 공간은 다 내 것(경험)이라고. 조금은 힘을 빼고 느슨하게 다시 또 논문 작업에 몰입한다. 무용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지금의 시간들이 미래의 내게 무엇으로 남을지 조금은 기대도 해 보면서 지루하고 어렵고 난해하지만 한편으로는 즐겁고 신기하고 황홀하기까지 한 연구자의 세계로 뛰어들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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