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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소란

by 밤비 Mar 24. 2025


오늘도 어김없이 시작됐다. 미연은 미간을 종잇장처럼 잔뜩 구긴 채 캔버스에서 손을 뗐다. 밤 10시. 그래, 역시나, 그럼 그렇지. 탁,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붓을 내려놓은 그녀는 뻐근해진 목을 좌우로 늘리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굳어버린 듯한 손을 천천히 움직이며 주먹을 쥐었다 편편다. 영영 피가 통하지 않을 것 같았던 손가락 끝까지 핏기가 돌며 저릿한 감각이 퍼진다. 한 시간 정도는 숨도 쉬지 않고 채색만 했던가. 이만하면 잠시 쉴 때도 됐다, 위안 삼으려 해 보지만 자의가 아닌 타의로 끊어진 작업 리듬을 받아들이자니 영 마음이 편치 않다. 

 

매일 같은 시각, 같은 패턴의 소란스러움이 윗집에서부터 천장과 벽을 타고 흘러내린다. 아니, 정정한다. 소란스러움 같은 작고 귀여운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 날카롭고 억척스러운 소음이다. 이 정도면 아이가 사는 집이 아니라 돌고래 한 마리를 키우는 집이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리겠다. 아이를 키워본 적 없는 것은 고사하고 가까이에서 육아를 지켜볼 키회조차 없었던 미연의 입장에서는 그저 어른과 아이가 매일같이 치르는 세기말 전쟁처럼 느껴졌다. 승자는 없고 오직 패자뿐인 진흙탕 전투. 

 

세 살은 되었을까. 딱 한 번, 엘리베이터에서 그들을 만난 적 있다. 여자가 미연보다 한 층 위 버튼을 눌렀고, 유모차에 앉아 칭얼거리는 아이의 음성에는 매일 밤 들려오던 돌고래 소리가 묻어있었으므로 그녀는 그들이 누구인지 단 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미연은 반사적으로 여자의 행색을 위아래로 빠르게 훑었으나 모자를 푹 눌러쓴 여자에게서 찾아낼 만한 특징은 없었다. 끝까지 창이 내려온 유모차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밖으로 톡 튀어나온 채 짤랑거리는 작은 신발의 움직임이 전부였다.  


곧바로 다시 작업을 하기는 힘들겠다고 생각하며 미연은 욕실로 가 뜨거운 물을 틀었다. 물이 반쯤 채워진 걸 확인한 그녀는 남아있던 화이트와인을 유리잔 가득 따른 뒤 커다란 욕조에 몸을 담갔다. 컵을 흔들 때마다 찰랑이며 얼음조각이 청명한 소리를 냈으나 이내 윗집의 밤 소란에 묻혔다. 오늘은 언제쯤 잦아들려나, 미연은 수증기로 가득 찬 욕실의 허공에 대고 내기하는 심정으로 아이의 비명소리를 하나 둘 세었다.


20분은 지났을까. 샤워를 마친 미연이 욕실을 나와 머리카락을 말리다 말고 불현듯 드라이기를 껐다. 갑자기 뚝 끊긴 전쟁 소리가 집 안 가득 고요를 불러왔다. 분명 수건으로 몸을 닦고 있을 때만 해도 여자의 비명 소리가 높고 길게 울렸고, 아이의 울음소리가 사이렌처럼 찢어지고 있었는데 대체 언제? 미연은 시선을 들어 올려 천장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보통 11시 30분 언저리까지는 이어져야 하는 전쟁이 처음으로 이른 휴전을 맺었다. 미연은 이토록 조용한 밤 풍경이 평범하지 않게 느껴질 만큼 그간의 소음에 자신이 적응한 건가 탄식하며 다시 드라이기를 작동시켰다. 윙, 모터가 돌아가고 세차게 쏟아지는 바람 소리가 유난히 크고 웅장하게 울렸다.


 


 


다음 날, 

 

한참 붓을 놀리던 미연은 덧칠하던 붉은색이 삐쳐나간 것을 보고는 급히 캔버스에서 손을 떼어냈다. 유화 작업을 하다 보면 늘상 있는 일이었지만 이 부분만큼은 한 번에 깔끔하게 경계를 나누고 싶었다. 습관처럼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던 미연은 손끝으로 톡톡톡 무릎을 두드렸다. '생각처럼 잘 안 풀린단 말이지' 혼잣말을 하며 시선이 벽시계에 머물렀을 때 그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 11시. 벽시계가 고장 난 걸까 얼른 핸드폰을 들어 보지만 틀림없는 11시였다. 조용한 밤.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윗집. 6개월 만에 처음 느끼는 고요한 집. 드디어 평화로운 밤을 되찾았다는 기쁨 대신 오히려 정적 뒤에 감추어졌을 참혹함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마지막 퍼즐 조각을 맞추듯 엘리베이터에서의 장면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층수를 누르던 여자의 떨리는 손, 하얗게 피어오른 손등의 각질, 어딘지 모를 낯설고 불쾌한 냄새, 유모차 뒷켠에 실려있던 초록색 소주병 ….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친 것만 같았다.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미연은 당장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조용한 밤의 패잔병을 찾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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