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한 떨기, 사라진 꽃

by 밤비


내 나이 열아홉은 되었던가.


우리 동네에 돌산 정밀이라고 엄청 큰 공장이 있었거든. 당시에 그 주변에 사는 여자애들은 대부분 다 거기 다녔다고 보면 될 정도였어. 어마어마했지. 내 첫 직장이자 마지막 직장이 거기야. 좀 고되긴 했어도 나는 하루 종일 손에 물 묻히는 일보다 단조로운 공장 일이 몇 만 배는 더 좋았어. 꽃다운 나이에 식모살이 하는 게 여간 속상하고 부끄러웠어야지. 고운 하늘색 유니폼 입고 하얀색 머리 두건 두르고 컨베이어 앞에 서 있는 내가 참 단정하고 좋았어.



하루는 경찰청장이 온다고 하더라고. 아주 떠들썩했어. 한 달 전부터 동네 전체가 경찰청장을 맞이할 준비로 정신없었지. 파출소장만 되도 큰 소리 떵떵 치던 세상이었는데 경찰청장은 오죽했겠어. 지금 모르는 사람이 보면 어디 무슨 대통령이라도 오나 했을 거야. 당연히 우리들도 다 동원됐지. 일차선 도로 정도 됐을까.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양 쪽으로 쭉 줄지어 서서 환영 준비를 시작했어.


신호를 주면 두 손 머리 위로 들고 크게 흔들면서 환호하라대. 아이고 까짓 거, 그거 뭐 대수라고. 우리 전부 경찰청장 얼굴은 하나도 안 궁금했는데, 고개 쭉 빼고 언제 오나 한참을 기다렸어. 밖에 나와 있는 그 한 삼십 분 동안은 일을 안 해도 되잖아. 엄청 좋았지. 4월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지, 꽃 냄새 풀 냄새 그득하지, 참새마냥 나란히 서서 얼마나 설렜게. 다들 새색시들처럼 볼이 발그스레해져서 수다를 떨고 또 떨었어.




그래,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실은 애들 아빠 바로 밑에 여동생이 하나 있었어. 선희라고 얼굴 참 하얗고 키도 자그마한 게 정말 예쁜 여자애였어. 그 때 우리가 막 연애를 시작했을 때 인데, 아무한테 말은 안했어도 걔가 은근히 아는 눈치였거든. 한 살 어렸어도 언니, 언니 하면서 나를 참 잘 따랐었어. 떨어진 꽃가지를 손에 들고는 팔랑팔랑 흔들더니 대뜸, 걔가 입 모양으로 ‘언니, 나 그 옆에 갈란다.’ 그러기에 ‘그래, 어여 와라.’ 그러고 반겼지. 건너편에는 나이 많은 이모님들이 많아서 끼어있기 불편했던 게지. 하얗게 웃으면서는 총총걸음으로 와서 내 옆에, 옆에 한 친구를 사이에 두고 같이 섰어. 그러고도 한참을 소란스럽게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누가 그러대, 이제 온다고.


저어기 멀리 검은색 승용차랑 버스 한 대가 오는 게 보였어. 흙먼지 풀풀 날리면서 차가 달려오는 걸 보자마자 우리는 일제히 길 양쪽에서 약속대로 손을 흔들었어. 검은색 차가 먼저 길 따라 휑하니 지나가고 그 다음에 연이어 버스가 오는데 아, 그 버스가 글쎄 갑자기 옆으로 쭈욱 밀리더니 사람들을 덮치는 거야. 끼이익 급정거 소리는 제대로 났던가 몰라. 사람들 비명 소리가 더 크게 터졌어. 우리가 서 있는 쪽 뒤편은 낭떠러지였거든. 제법 경사가 져서 산이나 다름없었지. 버스가 우리를 덮치고 그 쪽으로 떨어진 거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걸음아 나 살려라 버스만 피해서 무작정 내달리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 글쎄, 같이 서 있던 여자애들 여럿이 안 보이는 거야.


버스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어. 그래, 다들 버스 밑에 깔렸어. 그 때 애들 아빠 식구들은 전부 다 언덕빼기 집 마당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그 행차를 구경하고 있었거든. 생각지도 않은 사고에 다들 허겁지겁 뛰어왔지. 동네 사람들 전부 다 달려들어서 버스를 들어볼 거라고 밀고 들고 당기고 ... 그 밑에서 하나, 둘 여자애들을 수없이 끄집어냈는데 그런데도 선희가 안 보여. 분명히 내 옆에, 옆에 있었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꽃가지 팔랑거리며 나랑 웃고 있었는데.




아주 뒤늦게야 선희를 찾았어. 가장 깊은 곳, 가장 안 보이는 곳에 깔려 있었더라고. 그게 마지막이야. 그 질로 바로 목숨을 잃었지. 살리고 말고 할 겨를도 없이 그냥 그렇게 갔어. 허망하게. 지금 같으면 전국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난리 났을 거야. 그 때는 그런 건 상상도 할 수가 없었어. 경찰청장 행차 중에 일어난 일이잖아. 다들 쉬쉬했지. 억울한 사람이 큰 소리 내는 게 아니라 힘 있는 사람이 큰 소리 내던 시절이었으니까. 보상이랍시고 돈 봉투 조금 쥐어줬나 몰라. 그것도 감지덕지였어. 우리도 참 멍청했지. 그 고운 애가 죽었는데. 애가 죽었는데. 아무 잘못 없이 어린 애 하나가 그냥 떠났는데.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내 안에 경고등이 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