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부터 내릴 거라던 비 소식은 저녁이 되어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엠마는 조금 열어두었던 거실창을 완전히 닫았다. 창 너머로 새어들어오는 빗소리가 점차 몸집을 부풀리고 있었다. 비명같은 파열음을 커튼으로 한 겹 더 덮었다. 걸음을 옮기는 내내 엠마는 욱씬거리는 양 손을 마주 비볐다. 최근 몇 달 간 손가락 관절이 연신 말썽이다. 고민은 길지 않다. 시큰거리는 통증을 그저 자연스러운 노화의 한 갈피로 치부해 버린다. 나이 육십을 넘기며 체득한 지름길이었다. 그게 가장 마음이 편했다. '아무래도 더 작업하는 건 무리겠어.' 침침해진 눈을 깜빡이며 노트북 화면의 오른쪽 하단을 바라본다. 마감까지는 아직 이틀이 남았다.
찬장을 열자 나란히 선 약통들이 엠마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그녀는 가장 오른쪽에 놓여 있는 두 개의 통에서 알약을 꺼냈다. 미지근한 물과 함께 하얗고 노란 알약들을 차례로 삼킨다. 화장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눅진하게 밀린다. 집안 가득 장마의 습기가 가득하다. 화장실 거울 앞에 선 엠마는 어제보다 한층 더 옴폭해진 눈가의 주름을 천천히 쓸어내린다. 이마, 눈, 코, 입술, 목 ... 세월이 녹아든 자신의 얼굴을 손 끝에 아로새긴다. 점점 또렷해지는 빗소리를 배경삼아 칫솔을 입에 물었다.
"..."
엠마는 손을 멈춘다. 아득하게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 물방울이 아닌 다른 것. 아주 가볍고 희미하지만, 분명한 파열음. 내가 아는 소리인가. 엠마는 그 소리를 잊은 적 없었다. 다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여전히 말할 수 없다.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별하지 못한 그 밤에도 소리는 존재했다.
그녀는 칫솔을 입에서 뺀 채 귀를 기울였다. 한 번. 이내 다시 또 한 번. 빗소리인지, 천둥 번개인지, 아니면 사람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잠시 움직임을 멈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고요한 밤이 흐른다. 모든 것이 멈춘 듯한 침묵마저 세찬 빗소리가 성실히 지워낸다. 헹궈낸 입을 닦아내며 엠마는 거울 속에 갇힌 자신의 눈을 마주 본다. 한층 더 깊어진 눈이 자신을 직시한다. 날카롭다.
엠마는 천천히 화장실 문을 닫고 나왔다. 부엌의 작은 미닫이 창마저 닫아버리자 집 안은 바깥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한층 더 자유로워진다. 가스벨브를 잠그고, 쓰지 않는 콘센트 전원을 끈다. 침실로 향하는 길, 엠마는 하루종일 매달고 다녔던 집게핀을 풀어냈다. 회색빛 거친 머리카락이 구불거리며 단숨에 낙하한다. 기다리는 사람처럼 침실 앞에서 다시 한 번 더 멈춘 그녀는 거실창 밖을 가만히 바라본다. 무성영화같은 풍경이 얇은 커튼 위로 번졌다. 빗방울이 제법 굵다. 오늘은 밤이 길겠다.
엠마는 침대에 똑바로 몸을 뉘었다. 가슴 위로 손을 얹고 천장을 마주본다. 저 멀리, 무릎을 타고 통증이 올라온다. 무릎을 지나 허리로, 허리를 지나 손가락으로. 온 몸을 돌고 도는 익숙한 통증이 밤 인사를 건넨다. 그녀는 몸을 돌려 벽을 마주보고 눕는다. 손 하나를 머리 밑으로 밀어넣으려다 이내 멈춘다. 손가락의 통증을 견디기 힘들다.
이내 그칠 거야.
특별할 것 없는 하루가 저물어 간다. 아무 일 없는 하루가 또 하나 더 쌓였다. 천천히 눈을 감는다. 엠마는 안다. 문은 여전히 누군가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