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개의 자아

by 밤비


"나는 마치 12개의 자아로 살아가는 것 같아요. 오늘 아침 나는 없었어요. 블랙아웃이었다고요. 여기까지 나를 데리고 온 건 누구였죠? 지금 나는 누구죠? 당신 눈에는 내가 누구로 보여요? 얼마나 확신하죠?"


J는 쉼 없이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을 적시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딱히 정해진 답을 내놓을 수도 없거니와 특별히 그녀에게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녀의 질문은 다름 아닌 스스로를 향해 있는 것 같았다. DID. 예상 진단명을 휘갈기듯 기록한 뒤 천천히 진료 노트를 책상에 뒤집어 내려놓았다. 그저 가만히,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다갈색 홍채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지금으로썬 해리 정체감 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 DID)가 가장 의심된다. 가장 난해하고 어려운 정신장애 중 하나. 우리 팀에 주어진 시간은 한 달. 검찰은 수사 과정에서 발견한 여러 단서를 토대로 정신 장애가 의심된다며 J의 정신감정을 의뢰해 왔다. 검찰 측에서는 조현병이나 망상장애를 떠올린 것 같지만 오늘까지 축적된 데이터와 면담 내용만으로는 해리성 장애가 가장 유력하다.


쉽게 진단 내리기 힘든 장애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장애를 만났다. 한 사람 안에 여러 명이 함께 산다. 문제는 한 번에 한 명만 활동해서, 몸은 하나인데 여러 명 중 누가 한 행동인지는 밖에서 쉽게 간파하기 힘들다. (두, 세명이 같이 활동한다는 설도 있긴 하지만 드물다.) 뇌파 검사 및 신체검사 상 (전혀 한 명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환자들도 몇 케이스 보고된 바 있으나 J는 그 경계에 속해서 더욱 결정하기 힘든 케이스다.





느릿, 목례로 인사를 건넨 J가 진료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도 아득히 멀어지는 발자국 소리를 확인한 뒤에야 덮어 두었던 진료 노트를 다시 열었다. 탁탁탁. 노트 위를 펜으로 두드린다. 이렇게 두드리다 보면 뚝딱 답이 튀어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무용한 움직임에 고민을 싣는다.





단순히 그녀가 호소하는 증상들이 꾀병인가 진짜인가를 결정하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해리 정체감 장애 그 자체에 대한 회의적 시각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녀가 보이는 모든 증상을 진정한 정신 장애의 발현으로 봐야 하는지, 아니면 그저 성격을 극단적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정상적인 능력의 연장선상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한지 확신이 서지 않는 것. 엄청난 연기력을 보이는 배우, (과학적 근거는 없지만) 빙의 현상을 보이기도 하는 무속인들을 떠올려 보라.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해리 장애의 일종인가, 아니면 단지 '다양한 여러 자기'를 변화시킬 수 있는 정상적인 인간 능력의 극단적 표출인가. 어느 쪽에 무게를 두는지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


설령 그녀를 해리성 장애로 진단한다 해도 넘어야 할 관문은 많다. 이곳이 단순히 정신질환 진단과 치료를 하면 그만인 정신병원이 아니라 범죄와 정신질환 간 관계를 밝혀야 하는 국립법무병원이기 때문. 그녀의 장애와 범죄 간 직접적 관련성이 있는지가 핵심이다. 그녀가 현재 정말로 해리성 장애를 앓고 있다 하더라도 범죄를 저지를 그 당시에 증상이 발현되지 않았다면, 다시 말해 그 순간 '맨 정신'이었다면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지금 그녀는 범죄에 대한 기억이 조각나 있다. 그녀가 살해하고 유기한 시신처럼 산발적으로 여기저기 흩어진 기억의 파편들. 범죄의 순간 튀어나온 것은 그녀가 주장하는 12개 자아 중 다른 하나였을까. 아니면 그녀 안에 잠들어 있던 폭발적 살인 욕구였을까.





눈자위를 지그시 누르며 깊은숨을 토해냈다. 너무 작고 어린아이를 무참히 난도질하고 시신을 조각내어 여러 가방에 나누어 담았다. 각 가방을 전국으로 실어 날랐다. 무려 일주일에 걸친 지난한 작업이었다. 그 모든 일을, 그녀가 아닌 또 다른 자아가 한 일이라고 보아야 할까. 할 수만 있다면, 정신감정 중인 의사 모드는 꺼 버리고 무작정 모르는 척하고 싶다. 사건 파일을 마주할 때면 이 범죄의 주체가 무엇이었는지는 더 이상 묻고 싶지 않다. 변함없는 사실은 단 하나,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숨이 붙어 있던, 당신이나 나와 전혀 다를 것 없던 한 생명의 빛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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