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려진 단어, 구멍난 기억 사이로
이번 우울은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감정은 오히려 무감각에 가까웠고 심해 속으로 침잠한 듯한 암흑과 고요였다. 반면에 완벽히 무너진 쪽은 인지 능력이었다. 나사 하나 빠진 기계처럼 굴고 있는 나를 자주 마주해야만 했다.
첫 번째는 언어 실수. 정확한 단어가 안 떠오르는 설단현상이었으면 더 나았을 테다. 말이 자꾸 헛나왔다. 가령 이런 식이다. 학교 갈 준비를 하는 아이에게 ‘어서 옷 입어’라고 말했는데 막상 입을 빠져나온 말은 ‘어서 옷 먹어’였다. ‘그 때 오리고기를 먹었을 때 ...’라는 말은 ‘그 때 물고기 먹었을 때 ...’로 바뀌었다. 그 자리에서 내가 곧장 알아차리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고, 상대의 표정을 보고 아차 하거나 혹은 상대가 ‘뭐라고?’ 다시 짚어준 것이 대다수였다. 1학기 말쯤 우울이 급격히 심해졌는데, 덩달아 강의도 버겁게 느껴졌다. 강의 중에 틀린 말을 내뱉고도 모른 채 넘어가버리는 것만큼이나 공포스러운 게 또 있을까. 보이지 않는 식은땀을 송글송글 흘려가며 하루치 에너지를 강의시간에 쏟아 부었다. 실수하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 하나로 버텼다.
두 번째는 인지 능력 저하. 기억이 자꾸만 새카맣게 날아갔다. 가장 대표적인 건 일정 관리를 자꾸 놓쳤다는 것. 평소에도 깜빡깜빡하고 덜렁거리는 사람이었더라면 별로 이상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우울을 앓기 전의 나는 제아무리 바쁜 일정이 쏟아져도 빈틈없이 일과를 해결하는 사람이었다.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어 하루를 채웠고, 그마저도 모자람 없이 거의 완벽에 가까운 완수율을 보였다. 이번 우울을 겪는 동안은 스스로가 멍청하게 느껴질 정도로 매순간 버벅거렸다. 특정 날짜의 중요한 일정을 아예 까먹는다던가, 일주일 단위로 아예 일정을 착각해버린다던가 하는 식의 실수 연발이었다. 핸드폰 어플로, 달력에 수기로 중복 확인을 해도 빠져나가는 실수들이 자꾸 생겼다. “너답지 않다”는 말도 들었다.
실로 불안하고 낯선 나날이었다. 이정도면 치매 검사를 받아야 하나 고민해야 할 정도로 심각했다. 일시적일지 아닐지 모른다는 점에서 공포와 불안이 점차 커졌다. 그럴수록 더욱 말을 아꼈고, 특별한 일정을 잡지 않으려 애쓰게 되었다. 깊고 깊은 동굴 속으로 숨어들어가는 나의 뒷모습이 애처롭고 작게만 느껴졌다.
우울은 때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 존재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내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던 시간들. 이전의 나와는 전혀 다른 존재로 살아야 했던 시간들 말이다. 우리가 상상하던 우울이 언제나 물먹은 솜 같았다면, 그건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지금의 그대들도, 그대들 주변의 누군가도 바삭 메마른 우울에 이미 잡아먹혔을지 모른다. 어떤 것도 쉽게 단정하지 말 것. 타인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 혹시 당신이나 당신의 가까운 사람이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세요.
자살예방 상담전화: 1393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
혹은 가까운 응급실이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에게 연락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