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자리

by 밤비


우리 중 누구도 그를 처음 본 날에 대해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 매번 10시 정각이 되면 불투명한 유리문이 느린 몸짓으로 움직였고, 은은하고도 옅은 풀 내음을 머금은 실루엣이 슬며시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에 점점 그것들에 익숙해졌을 뿐이다. 미리 와 자리를 맡아둔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가 앉는 자리는 언제나 비워져 있었다.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쪽, 창 밖 나뭇잎의 움직임에 따라 햇살과 그림자가 자주 얼룩무늬를 바꾸는 자리. 조용한 걸음을 옮겨 그가 비로소 자리에 착석하면 멈추었던 것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역 복지관의 문화 강좌 중 하나인 <감성 플라워 클래스>는 수강신청이 열리자마자 거의 곧장 마감이 될 정도로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매주 목요일 10시. 평일 오전 시간대는 아무래도 여성들의 전유물에 가까웠다. 간간이 남성 수강생이 보이기도 했지만 <경제 흐름 읽기> 같은 강의에서나 있는 일이었다. <감성 플라워 클래스>가 개설된 지난 3년을 통틀어 그는 유일한 남성 수강생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말수가 적었다. 꼭 필요한 말만 하는 쪽에 가까웠다. 잎을 정돈하는 동안에도, 줄기를 무작위로 배치는 순간에도, 그 날의 화병이나 포장지를 고르는 일에도 매 번 한 번에 하나씩 신중을 기하는 몸짓, 그것 하나뿐이었다. 여성, 그것도 자신보다 훨씬 연배가 있는 여성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어도 불편한 기색 하나 없는 모습에 오히려 그를 제외한 모두가 어색함을 느꼈다. 여성 꽃꽂이 강사뿐 아니라 수강생 누구와도 눈맞춤이 다정하고 자연스러웠지만, 그는 오래토록 한 사람을 응시하는 법이 없었다. 한 번도 수업에 결석한 적 없을 만큼 성실한 수강생이었음에도 강의가 끝난 정오, 친목 도모를 위한 식사 자리나 다과 시간엔 한 번도 참여한 적이 없었고, 단체 채팅방에서도 읽음 표시 외에는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색 배합은 그의 특기였고 우리는 그것을 매번 눈여겨보았다. 좀처럼 쉽게 떠올리기 힘든 꽃들을 다발로 묶거나, 전혀 새로운 질감의 포장지를 선택하는 건 항상 그였다. 그에게는 그만의 섬세하고 감각적인 면모들이 있었는데, 그건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을 넘어 어느새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그의 유난히 가늘고 긴 손가락도, 두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검은색 실반지도, 정갈한 핏의 셔츠도, 더없이 잘 어울리는 긴 머리카락도 모두 다 한 번씩 주요 화두로 오르내렸던 것들이다. 그가 수강생 중 한 명의 색조화장이 바뀐 걸 바로 알아챘다는 이야기는 마치 설화처럼 여기저기 퍼졌고, 하루는 꽃대를 고를 때 살포시 솟아 있던 새끼손가락을 누군가 캐치했다. 그 다음엔 그의 눈썹이 지나치게 깨끗하게 그리고 예쁘게 정리되어 있더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거 왜, 조용해도 자기만의 독특한 취향 있는 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였던 말은 몇 주 뒤, ‘매번 쉬는 시간에 전화를 하던데 그게 여자는 아닐 것 같기도 하고.’라는 말로 몸집을 부풀렸고, 이윽고 ‘나 아는 게이 친구도 딱 저런 분위긴데.’라는 데까지 이어졌다.


마지막 수업. 그 날 만큼은 강의가 끝난 뒤에도 모두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다음 달부터는 더 이상 꽃꽂이 강좌가 개설되지 않는다는 말을 먼저 전해들은 이가 미리 채팅방에 소식을 올린 덕분이었다. 아쉬움을 가득 담아 누군가는 떡을 해왔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근처 카페에서 조각 케이크를 사왔다. 평소보다 무거운 분위기를 잊고 싶은 듯 모두가 말이 더 많아졌다. 한 해 동안 함께한 작품들을 되짚는 이야기, 강좌 밖에서도 종종 만나면 좋겠다는 약속, 서로의 건강에 대한 응원과 덕담, 그리고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에 대한 짧고 은근한 시선들 ... 많은 것이 동시에 오갔다.


잠시 가방을 뒤적이던 그는 하얀 봉투 하나를 꺼내 우리에게 건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감사했습니다.” 우리 모두의 시선이 그의 손으로 향했다. “어머 세상에, 우리한테 편지를 다 쓴 거야?” 나이가 가장 많은 수강생이 호들갑을 떨며 손사래를 치자, 그가 조용히 답했다. “같이 한 시간이 너무 좋아서요. 부담 갖지 마시고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오셔서 식사하고 가세요.” 완성한 꽃다발을 건네는 듯한 수줍은 손길. 그것은 우리가 처음으로 그의 음성으로 직접 전해들은, 그의 감정이 담긴 말이었다.


모두가 거의 동시에 봉투를 열었다. 조용해진 실내에 종이 긁히는 소리만이 울렸다. 그를 닮은 은은한 풀내음이 물든 청첩장이 고개를 내밀었다. 고급지에 눌러 찍힌 초대 문구, 정갈한 손글씨체, 그리고 신부의 이름이 연달아 쏟아졌다. 그 흔한 “축하해요.” 라던가 “꼭 갈게요.” 같은 말이 곧바로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 조용히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고마워요.”라고 가까스로 답했고, 누군가는 괜히 애꿎은 케이크를 짓이겼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아무 말 없이 핸드폰을 가방에서 꺼내어 액정을 닦아댔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그에 대해 몰랐다. 아니, 몰랐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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