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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흔적

매일글쓰기 3일차

by 밤비



오랫동안 사람 손이 닿지 않은 공간. 새로 들어올 식구들과 함께 쓰려면 실험실을 한 번 정리하고 청소해야 한다. 서랍과 캐비넷을 열어 여러 공간을 확인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짐들이 숨어있다. 이 넓은 공간 나 홀로 쓸쓸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미안할 정도로 무수한 짐들이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다 캐비넷 한 귀퉁이에 붙어 있는 메모를 발견하고는 웃음이 터진다. 거듭 스치면서도 신경쓰지 않아 몰랐는데, 하얀 포스트잇 두 장이 시선을 붙잡는다. 두루마리 휴지, 종이컵, 믹스커피, 고무장갑, 접시, 수세미, 청소포, 키친타올 ... 깨알같은 글씨들 옆에는 제각기 다른 양의 숫자도 1부터 차례로 줄지어 서 있다. 어떤 숫자는 그대로 있고 또 어떤 숫자에는 X 표시가 죽 그여 있다. 다시 보니 여섯 칸의 캐비넷 안에 정리해 둔 비품들 목록과 수량을 표시한 게 틀림없다. X 표시는 아마도 이미 썼다는 뜻일테고. 이 사소한 메모 하나에도 이 곳을 관리하던 친구의 애정과 마음과 정성이 느껴져 그만 기쁘게 웃고 말았다. 오래 전 이 곳을 마지막으로 떠난 이의 자리가 이토록 다정하다니. 뭉근하게 퍼진 마음을 쓸어담는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던가. 이 사소한 메모 하나에 별로 접점이 없었던 그 친구를 향한 애정도가 단숨에 훅 치솟는 걸 느낀다. 이처럼 다정한 흔적을 남기는 그 친구는 자리에 있을 때 존재감이 있건 없건 결국 어디서든 사랑을 담뿍 받고 또 넘치게 나눌 사람임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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