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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한 기쁨주의자 Mar 27. 2016

지금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태국&캄보디아편 #7

여행 글의 중간에 왔다며 자축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중간을 넘었다고 생각하니 글을 더 느리게 쓰고 싶어 진다.

그 여행 속에 나를 담아 놓는 것멈추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 그러더라. 양자역학에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분리해 보지 않는다고.

왠지 알 것 만 같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살고 있는 나.

캄보디아의 나-서울의 나 -그리고 또 어느 곳에서 열심히 살고 있을 나.

그래서 이 글은 과거의 나에게, 현재의 내가, 미래를 위해 쓰는 글일 것이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사람, 모두 유죄


#1.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드디어! 사리사욕의 최대 목표, 프놈펜에 도착했다.

처음 타본 나이트 버스에서 그 관 같던 자리에 켭켭이 쌓여 잠을 자고, 씻지 않은 얼굴+안경+떡져 올라간 머리+왠지 더 쳐진 짐을 달고 잘 곳을 찾아 헤매었다. 숙소는 미리 예약하지 않고, 게스트하우스가 밀집된 곳에 가서 몇 군데 돌아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나름 나의 앞마당인 프놈펜이었지만 지친 기색이 역력한 팀원들을 위해 최대한 빨리 결정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렇게 몇 군데를 돌아본 후, 화장실이 조금 비좁지만 그래도 나름 깨끗한 게스트 하우스를 찾아 싼 가격에 묵게 됐다. 물론, 우리의 툴툴이는 '아 누나 이건 아닌 것 같아요'라며 퉁퉁머신의 조짐을 보였지만, 꺼꽁에서 쓸 돈을 아껴야 하므로 일단 싼 비지떡을 택했다.


 사실, 이 프놈펜에 온 최대 이유는 마을에 들어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바로 나갈 준비를 했다. 내가 아띠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했던 나의 마을, 깐달. 그리웠다. 하는 일 없이 앉아 있는 듯 보이는 여유로운 카리따스 스텝들도, 늘 빨간 치아(약초를 씹어서)를 환히 보이며 웃어주시던 이어이(할머니)도, 동네를 누비며 뛰어다니던 나의 사랑하는 아가들도, 일하고 돌아와 두 그릇씩 먹던 센터 앞 미차, 미총도(볶음면/끓인면), 매운 것이면 다 먹고 싶어 하는 줄 알고 고추장 양념에 면을 비벼주던 우리 벙들도(센터 밥 해주시는 아주머니? 언니?).. 다 말하자면 이 글 끝날 때까지 나열할 것 같으니. 이만 끊어야겠다. 아무튼 다 너무 보고 싶었다. 그 긴 시간을 그 돈을 쓰고 날아와서 몇 분이라도 보고 싶을 만큼, 정말로 보고 싶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누군가 이렇게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일까. 그만큼 사랑하고 있고 또 그만큼 사랑받았다는 것이니까.
난 어쩌자고 이렇게 복이 많은 건지.


 이 날도 열심히 '에이 벙~'이라며 이소룡 모드로 (내가 에이~ 벙~ 하며 흥정을 하는 소리가 마치 이소룡의 아~뵤오~ 같다며 새로운 놀림거리가 되었다.) 흥정을 하고 마을로 향했다.

지나치는 모든 길들이 익숙했고, 하나하나 다 기억나기 시작했다. 그 냄새도, 그 표정도, 그 소리들도. 설렘과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팀원들은 매연 때문에 입을 가렸지만, 그 매연조차도 나에겐 그 어떤 깊은 숲 속의 공기보다 상쾌했다고 말하면 조금 과할는지..


 깐달 텀블러 할아버지 앞에 도착해서(깐달 교차로에 도깨비 같이 생긴 할아버지 동상이 있는데, 우리 아띠들은 이걸 텀블러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팀원들에게 그토록 태워주고 싶었던 <러덥>에 올라탔다. 러덥이라 함은 오토바이 한 대 뒤에 나무판자로 엮은 리어카를 붙이고 최대 15명? 17명 정도까지 얼기설기 끼어 타는 깐달의 이동수단을 말한다. 이 인간적인 교통수단은, 생판 처음 보는 내가 판자 대기 끝에 매달려 갈 때, 나를 꼬옥 끌어 붙들어 안아주던 캄보디아 여인의 손길로부터 그 매력을 인증했었다. 그리고 우리가 러덥에 올라탄다 해서, 당장 출발하고 싶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 그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이 올라타야 출발할 수 있다.

똑같은 돈을 내고 타지만, 기다려주는 것이다. 어느 느고도 내가 급한일이 있으니 기다리지 말고 출발해 버리자고 하지 않는다. 먼저 오든 나중에 헐레벌떡 뒤어오든, 같은 방향으로 갈 거라면 함께 갈 줄 아는 것이다.



 맑은(?) 공기를 잔뜩 흡입하며 먼지로 엉겨 붙은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마을에 들어섰다. 아이들이 보였다. 늘 놀던 그 자리에 이제는 마냥 '아가'가 아닌 '어린이'가 되어 놀고 있었다. 나 기억하냐고 묻는 말에 오랜만에 봐서 어색하고 쑥스러운지 기억난다며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옛날처럼 안아 들어 올릴 만큼 아가가 아니라는 것이 뭔가 묘한 느낌을 주었지만,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 것 같아서 감사했다. 하지만 가장 보고 싶었던 스라이께오, 스라이껄 자매는 학교를 가서 만나지 못했다. 그 아이들도 내가 안아 올리지 못할 만큼 컸겠지. 아이들은 늘 쑥쑥 큰다.


 드디어 떨리는 마음으로 센터에 발을 들였다. 여전히 그 자리엔 내가 사랑하는 그들이 있었다. 그들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아니 사실, 흐른 정도가 아니라 소리 내어 터져나왔다. 잠시 나를 꼭 안아주는 피룸의 품에서 꺼이꺼이 울고 말았다. 보고 싶었다고, 2년 만에 와서 미안하다는 말을 겨우 내뱉으며 꼬옥 안았다. 2년 전 그곳에 처음 발을 디딜 때만 해도 내가 그들을 이토록 사랑하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저 언어 소통자로서, 영어와 캄보디아로 회의를 하며 일을 해내야 했고, 팀원들과 스텝들 사이의 발 빠른 말이 되느라 스텝들은 그저 함께 일하는 사람 정도로 느꼈다. 그러다 12월 말 리트릿으로 바닷가를 다녀오며 일 외의 모습으로 만나면서 많이 친해졌고, 마음을 나누게 되었고, 사랑하게 되었다. 그때 쓴 글을 잠깐 옮겨 보련다.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것들이 들리고,
궁금하지 않던 것들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_2013년 라온아띠 10기 캄보디아팀 하나의 에세이 중


 그들을 사랑하게 된 이후로는, 어떻게든 그 주위에 맴돌며 같이 결혼은 했나, 아이는 몇인가, 어떻게 생겼나, 어디 사나, 밥은 언제 먹나 같이 먹고 싶은데.. 본의 아닌 스토커 짓을 했다. 깐달에 사는 아띠로서의 삶이 마무리되갈 때 쯤해서는 주말에도 일부러 마을을 기웃거리며 '궁금'해했다. 함께 있고 싶어 했다.


 문득 이 글을 쓰며 잊었던 것을 깨닫고 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난 누군가를 막 좋아 죽겠어하는 경험이 없었던 것 같다고 그런 게 뭔지 요즘 기억이 잘 안 난다는 나에게,

'너도 분명 그랬어. 그런 눈빛이었어. 평소 웃는 것과 다른 웃음이었어'라고 누군가 말해주었다.

그랬나 보다. 나도 이렇게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해서 기웃거리며 궁금해하고 함께하고 싶어 했었나 보다. 괜히 지레짐작, 자책감과 상처로 나는 원래 그러지 못하는 인간인가 보다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나도 분명 그랬으니까. 그러니 다시 또 그럴 수 있겠지.


 내 눈물은 마를 틈도 없이 부엌에 있는 벙(캄보디아에선 손 윗사람을 보통 '벙'이라고 부른다.)에게 안겨 쏟아졌다. 우릴 위해 음식을 해주는 벙들이 신경 쓰일 까 봐, 가끔 매운기가 필요하면 밥 밑에 몰래 고추장을 깔아 비벼먹었다. 언제 또 그것을 보았는지, 어느 날 우리 식탁에 정말 고추장에 버무린 밀면이 올라왔다.

정말 눈물 나게 맛없었다. 그런데 눈물 나게 행복했다.


 난 누군가에게 안기는 것을 참 좋아한다. 또 누군가를 안아주는 것도 참 좋아한다. 서로를 안아주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거리가 0이 되는 순간이다.
서로의 가슴이 맞닿는 순간 마음의 벽이 무너져 내린다. 내 심장 박동이 그 사람에게 가 닿는다.  굳이 헛말만 자꾸 해대는 입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꽉 안긴 나의 온도는 그 사람에게 전해지리라.

#2. 내가 어떻게 당신을 잊을까요

센터에서 인사를 다 나눈 뒤, 아띠들이 일하고 있는, 그리고 내가 일했던 마을에 들어갔다. 감격스럽게도, 여전히 짱구 눈썹을 찡긋하는 여유 가득 어덤이 불러준 뚝뚝 아저씨는, 우리의 미소 아저씨였다.(웃는 모습이 참 멋있어서 애칭으로 부르던 이름이었다.) 2년 동안 여전히 그 미소로 아띠들을 실어 날라주셨나 보다. 뚝뚝이를 타고 달리는 마을 길은 여전히 설레었다. 내가 캄보디아를 사랑하는 중요한 이유중 하나는 이 탁 트인 경관이다. 산도 참 사랑하는 나지만, 이렇게 멀리 보아도 탁 트인 들판이 그리울 때가 있다. 아띠들이 일하는 집에 들어서서 원래 알았던 듯 인사를 하고는 가장 보고 싶었던 스라이 멈 (버섯 아줌마) 집으로 향했다. 여전히 지나가는 우리들을 보면 반가워 인사하며 따라오는 아이들을 지나 벙~하고 부르며 집에 들어섰다. 그녀가 나왔다. 여전히 아름답고, 여전히 따뜻했다. 2년 만에 깜짝 등장한 나를 꼭 안아주고는 평상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녀의 말은 나를 또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너희가 간 후에 저 버섯들을 만들 때면 남편과 너희 이야기를 했어.  
  보고 싶었어. 근데 얘네들은 우리를 기억은 할까 생각했었어.
  
나는 또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할 만큼 울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어떻게 당신을 잊을까요. 보고 싶었어요.


더 멋진 말들이 필요하지 않았다. 보고 싶었다.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때론, 정말 한마디로 충분한 것 같다.

사랑한다고. 많이 보고 싶다고.


그립던 그 해먹에 누워 더 그립던 그 흔들거림을 느낀 뒤, 집을 나섰다.

흙먼지 날리는 그 돌길과 풀, 내리쬐는 햇빛이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여기가 캄보디아라고, 잘 왔다고, 나도 네가 그리웠다고.



그렇게 산책을 하다 늘 그랬듯, 바로 어제 그랬던 것처럼,

점심 먹던 할머니 집에 가서 아이들을 만나고, 안아주고, 평상에서 낮잠을 잤다.

늘 그랬듯, 할머니가 내가 좋아하는 똥 색깔 과일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내 옆에는 사랑하는 우리 아가들과, 사랑하는 수나이퍼,소냥반,구교와 나란히 누워있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

이 순간을 아주 잠깐이라도 흘려보내지 않고 오롯이 갖고 싶었다.


라며.............. 잠을 잔 건가?? 어디서나 잘 자는 건 사실... 비밀인데... 유전이다!!!!!! 움 하하하하하


마을에서의 모든 것은 낭만적이었으나, 돌아오는 길은... 그다지 낭만스럽진 않았다. 8명이 한 뚝뚝이에 낑겨타고 털털거리는 길을 건너왔다. 돌아와서는, 이여이 집에 살고 있는 아띠들에게 가서 어떤 고민들을 하고 있는지 들을 수 있었다.


참 신기하다. 아띠라는 집단, 아니, 이 한국을 떠나 그렇게 마을과 소통하며 살고 있는 청년들이 하는 고민들이 내가 그때 이 곳에서 했던 고민들 그리고 하고 있는 고민들과 결국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공간에서 어떤 공기를 맡고 어떤 사람들과 부딪치며 사느냐가 우리가 하는 고민의 방향을 결정하는 걸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공간은, 공기는, 사람들은

나에게 어떤 고민을 하게 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나는 사람들이 무엇을 고민하고 생각하게 하는 마을을 만들 것인가.


마지막으로, 오는 잠을 꾹 참으며 대충 글을 쓰고 대충 사진을 갖다 붙였으나,

마음만은 대충스럽지 않았단 것을 증명하며 뜬금포로 사진 하나 투척하고 글을 정리하련다.

(언젠가 이 정제되지 않은 글들도 좀 더 깔끔하게 정리되는 날이 오겠지....?)


내가 사랑하는 캄보디아의 돼지와 소를 소개한다!

내가 여러모로 애정하는 돼지가 이렇게 거대한 생명체인지 몰랐으며,

소의 턱살(물론, 우리나라와 다른 종이리라.)이 이렇게 부드러운지 몰랐다.

이 사랑스런 생명체 근처에 얼쩡거리다 뒷발로 맞아 아직 하고 싶은 것도, 해야할 것도 많은 생을 빨리 마감할 뻔 했드랬지. 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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