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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한 기쁨주의자 Mar 12. 2019

제주도 함덕일기

제주도여행_함덕

Prologue.
세 번째 제주.

이번 여행은 혼자서의 세 날과 셋이서의 두 날이 합쳐진 고요하고도 소란스러운 날들이었다.


2월 27일

#공항

퇴근 후 쏜살 같이 꽃가방을 메고 김포공항으로 달려갔다. 혼자서는 고작 두 번째 가봤으면서 늘 가던 카페에 가는것 마냥 의젓한 허세를 떨며 비행기를 탔다. 이번엔 또 어떤 존재들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하면서.


#숙소

제주 함덕촌따이 게스트하우스

숙소를 고를 때 중요한 기준은 조용히 책 몇 장 넘길 공간이 있냐는 것이다. 어딜 가든 복을 누리는 나는 이번에도 4인실을 이틀간이나 독채로 쓰는 호사를 누렸다. 책이 가득한 거실에 놓인 안마의자는 덤 중의 덤이었다. (나는 이틀 동안 여정 후에 돌아와 20분 정도 저 안마의자에 노곤함을 풀며 시집 한 권을 다 읽었다.)


2월 28일 오전

머리에 쓴 모자와 몸뚱아리의 비율이 충실한 오미자차통에서 청을 듬뿍 꺼내어 잔에 담았다. 제주 햇살이 한가득 쏟아지는 유리창 곁에 앉아 아침 묵상을 하며 손과 발에 힘을 주었다.


#바다 냄새 따라 멈추어 선 곳

혼자 하는 여행에서 누리는 가장 좋은 점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곳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오늘은 함덕해변과 서우봉 길을 걷고 싶었기에 그냥 바닷바람을 쫒아 길을 걸었다. 아아 바다 냄새보다 강했던 빵 냄새 앞에 발길이 우뚝 멈추긴 했다만.

날 현혹시키던 함덕해변 앞 오드랑 베이커리


#제주바다 앞에서 시 한 편 적었습니다.

제주사람들이 더 많이 찾는다는 동네, 함덕

바다가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그냥 제주는 바다고 바다고 제주이기에 바다 동네 어딘가에 있고 싶었다. 그래서 외지인이 많이 오는 유명 관광지보단 현지인들에게 사랑받는 함덕에 3일 주저앉기로 했다. 언제나 동네사람이고픈 나그네이기에.


구름이 지날 땐 흐리고, 구름 사이로 햇빛이 들땐 찬란한 날이었다. 길 따라 걷다 어딘가에 오르니 어느새 서우봉이었다.

십여 분간 올라가다 언덕배기 경사가 달라지는 곳에 다정하게도 나무 의자 하나가 있었다. 나 같은 뚜벅이 인생들은 어김없이 그 자리에 앉았을 테고 무엇인가 바라보았을 테다. 오늘 내게 바라봄 당해준 것은 제주의 유채꽃이었다. 유채꽃이 들려주는 이야기대로 시 한 편 적었다.


#제주바다의 서퍼

아직 따뜻해지기 전의 바다. 수심도 꽤 깊어 보이는 푸르름에 뛰어든 청년이 있었다. 언젠가 알쓸신잡 프로그램에서 서퍼는 자기에게 맞는 파도를 기다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는데 정말이었다. 서퍼는 자기에게 맞는 파도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내 파도가 오면 대략 3초간의 바다 교감을 했다. 얄궂은 파도는 이내 제 갈길을 가버렸다. 사실 파도 입장에서는 서퍼가 아니라 뭍에 닿고 싶을 뿐일 테니까.

서퍼의 사랑은 참으로 숭고했다. 파도가 뭍에 닿으러 가는 줄 알면서도 잠시나마 키스하는 애절함과 붙잡지 않는 무욕의 삶이었다. 늦겨울 바다의 서퍼는 순간의 사랑을 탐닉하며 자꾸만 더 먼 바다로 나아가고 있었다. 봄을 맞으러 나가나.


#바다는 푸르고 말은 똥을 싸지

길을 올라가는 중간중간 울타리 옆으로 크고 묵직한 덩어리들이 있었다. 사람 것이 아니니 사람 다음으로 이 서우봉에서 흔한 말의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렸을 때는 동화책 같은 것을 통해 '똥'에 대해 친근하게 생각할 기회(?)가 많았는데, 어느새 더 이상 '똥똥'거리는 것에 웃지 않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그러고 나서는 자연스레 '똥'에서도 생명이 난다는 꽤 중요한 신비를 잊고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그게 어른인 줄 알고.


#광-함성

지난해 8월 혼자 제주여행을 오며 생긴 새로운 버릇은 적당한 때에 적당한 노래로 여행의 기억을 더 깊이 새기는 작업이다. 서우봉 언덕배기에서 나의 선택은 짙은의 <Sunshine>이었다.

먼 바다에서 시작한 시선을 발 앞까지 가져오니 작은 무당벌레 한 마리가 하얀 운동화에 앉았다. 제주 햇살을 가득 머금은 무당벌레는 디자인 작업을 하며 스포이드로 찍어낸 Red가 아니라 막 뽑은 제주 흙당근 색 정도였다.


내가 자꾸만 남쪽으로 내려오고 싶어 하는 이유는 일조량과 상관이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서울은 언제나 일조량이 충분하지 않다고 느낀다. 햇빛을 잔뜩 받고 새소리를 듣고 있는 오늘의 인간이 자꾸 눈물이 나는 것을 보니 광-함성을 지르고 있나보다. 날아든 무당벌레 한 마리가 주는 감격이었다. 흙과 똥이 적절히 섞인 밭 위로 핀 노란 유채가 눈에 살랑거려 눈을 잠시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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