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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한 기쁨주의자 Sep 04. 2020

두려움이 변하여 분노가 되고

택배 벨소리에도 숨이 가쁜 당신에게

코로나 19로 사라진 저녁 약속 시간을 좋아하는 영화 한 편으로 채우기로 했다. 영화를 막 키기 시작한 무렵, 건물 아래에서 우리 집을 호출하는 벨 소리가 들렸다. 평상시에도 벨소리, 사람 움직이는 소리, 물소리 등은 방음이 잘 되지 않아 흠칫 놀라는 경험이 많았기에 첫 번째 호출 벨은 우리 집이 아닌 줄 알고 지나 보냈다. 그리고 두 번째 벨 소리가 울렸다.


'저녁 8시 반, 이 시간에 누구지?' 궁금증보단 의아함과 불안감으로 인터폰으로 향하는데 벨이 뚝 끊겼다. 그리고 곧바로 우리 집 문 벨 소리가 울렸다. 인터폰 화면은 켜졌는데, 문 앞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불안감은 재빠르게 공포로 변했고 인터폰에서 두 걸음 옮겨 현관문 앞에서 아주 크-게 "누구세요"하고 두어 번을 외쳤다.


.....


심장이 빨리 뛰었고 호흡이 가빠졌다. 약간의 폐쇄 공포증을 갖고 있는 터라 극도의 불안감이나 갑갑함을 느끼면 과호흡이 오곤 한다.(다행히 정말 가끔 있는 일이다.) 마지막은 독산동에 살 때 퇴근길 사람들 사이에 늑골이 찔릴 정도로 끼여 가던 전철이 멈추어 섰을 때 왔던 호흡 곤란 증세. 그리고 2년 후의 어제, 달갑지 않은 그 친구가 또 찾아온 것이다.


현관의 이중 잠금을 걸곧 진정이 안돼서 곧바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상시라면 바삐 일하는 친구의 상황을 알면서 전화를 하지는 않았을 텐데 긴장으로 바싹 마른 손이 뇌의 합리적 지시보다 빨랐다.
"네~"
  "있잖아~..........................."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이 정확히 나지 않지만 상황을 설명하는 중에도 호흡이 고르지 않았고, 친구 회사에 일을 알리는 벨소리가 들리자 정신이 좀 들었다.

"... 응 일하고 있었지? 아무튼 놀래 가지고. 끊을게!"


통화를 끊고도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려고 스킨이나 수분크림 같은 것을 거울 앞에 앉아 펴 발랐다.

톡톡톡.

뚝뚝뚝.

갑자기 눈물이 났다. 그리고 조금 울다 보니 화가 났다.


분명 택배일 것이다. 이미 동묘 앞 원룸에서, 독산동 다가구주택에서 수차례 겪은 일이다. 벨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지만 누구냐고 물어도 대답 없는 누군가. 아마도, 제발, 택배 기사님.

'이어폰을 끼시겠지, 또 다른 택배를 바삐 가야 해서 정신이 없으실 거야.'
'요즘엔 택배기사님들을 무서워하는 경우가 많으니 일부러 소리를 안 내시나?'
(*이날 택배가 온다는 문자는 있었는데, 정확한 시간 없이 수령일만 적혀 있었다.)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확률이 높은 스토리를 끊임없이 되뇌면서도 나는 기어이 문 밖을 나가 그 망할 놈의 택배 덩어리를 주워 오지 못했다.


내가 택배를 가지고 온 것은 룸매가 집으로 들어온 11시 이후였다.

<사람,장소,환대>라는 책이었다.

아!


그렇게 저녁으로 먹은 라면이 장에서 한번 더 들끓더니 체기가 올라와 겨우겨우 잠이 들었다.




내가 ‘화’,’분노’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것. 실은 불안과 두려움, 공포감이다.


공포감은 언어의 상실을 가져오고 언어의 상실은 더 큰 공포감을 가져온다. 그리고 그 후에, 나 같은 경우엔 가능한 한 그 상황과 상대방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 사연이 있겠지... 그러나 그럼에도 그것이 반복적일 때, 사건도 무서움을 느끼는 나도 나아지지 않을 때, 그런 사람들이 여전할 때 이는 곧 분노로 바뀐다.


힘의 크기, 고의적 악의성의 정도에 따라 누군가 상대적 공포감을 간직하며 살아야하는 사회에 분노감이 들었다. 개인의 경험, 가까운 지인들의 경험을 지켜본 것, 사회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들은 것 그 모든 것이 응축된 불안의 끝자락이 무언가에 건드러져 터질 때 왜 그것이 분노가 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나는 왜 그랬을까. 떨렸다. 여전히 떨린다. 무섭다는 표현이 가장 날것이며 정확하다.


공포의 축적에 대해선 더 깊은 통찰과 사회적 용어 정의들이 더 필요하다. 고통과 공포 중에 소실될 언어를 대비할 수 있도록.




나는 공중 화장실에 갈 때 매번 무의식 중에 몰래카메라가 있나 확인한다. 늦은 시간 집에 들어가는 골목길엔 가끔 cctv 위치도 확인해본다. 노트북 웹캠은 스티커로 가려 놓았다. 옆 집 노크 소리나 큰 발소리가 빌라 계단에서 들리면 하던 행동을 멈추게 된다. 세상에 둘도 없는 쫄보 92년생 김아무개이다.


어제의 일로 아직도 심장이 뛰는 스스로를 '글쓰기'로 잠시 다스려 본다.


정제되지 않은 현재의 표현이자,

정제해야만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무언가에 대하여


/


"있잖아. 나 이제 좀 살 것 같아.  정제의 글쓰기를 하고 또 그대에게 이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으니 말이야.
누군가 자기 목소리(글이든 말이든)에 귀귀울여주면 좀 누그러져. 진정이 되고. 아 물론, 그대가 내 이야기를 섣부른 판단이나 편견 없이 들어줄 거라는 신뢰가 있었으니.

이럴 땐 분노가 커지거나 근육 처럼 굳어지지는 않는 것 같아. 그러니 그대가 혹여 지금은 내가 하는 말이 온전히 공감되거나 겪어본 일은 아니라도 부디 지금처럼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어주길 바라.

환대가 가득한 세상을 만드는 실천은 거기서부터 시작할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그대는 분해능이 좋은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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