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이유서
내년이면 서른한 살, 7년 차 직장인인 나는 회사의 (나이로)막내라인이 될지도 모른다. 이곳은 '스타트업'인데도.
최근 몇 개월간 회사 동료들이 줄퇴사를 했다. 열몇 명쯤 되려나. 함께 발 붙여온 일터를 쉽사리 떠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각자의 이유는 타당했다. (‘타당함’이란 특정한 누군가에게 탓을 돌리고 싶지 않아 고른 표현이다.) 아름다운 이별은 없으니 이유를 묻지 않는 것이 예의겠지만, 일개 직원인 필자는 상실감을 이겨내기 위해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곱게 써 본 퇴사의 이유
에어컨 없이 하루를 보낼 수 없던 여름, 그보다 뜨거운 이슈는 '퇴사'였다. 유능한 동료이자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몇 주 간격으로 회사를 떠났다. 여기저기서 들은 이유를 몇 가지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내가 지원하고 고용된 직무, 직책에 적합한 일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
- 커뮤니케이션에서 오는 인격적 상처, 불편함, 불쾌감
- 우리가 내건 미션과 우리가 일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 우리는 과연 정의로운가에 대한 질문
- 내야 하는 성과, 책임져야 하는 일의 범위가 나의 연봉/연차/직무/팀 상황에 맞는 일인가.
* 내가 속한 조직 혹은 조직의 결정권자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있고 개선할 의지가 있는가. 우리에겐 정말로 변화의 가능성이 있는가!
지극히 주관적인 요약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퇴사자들의 많은 비율이 20대 중반~30대 초반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 많던 나의 '젊은 친구'들은 어디로 갔을까.
불편의 목소리를 내는 '불편한 사람'
사람들이 하나 둘 나갈 때면 자신을 찾아, 더 나은 삶을 찾아 떠나는 모습을 진심으로 응원하면서도 마음이 아리고 허탈했다. 그러다 상실이 무기력이 되어 폭주해 버린 때가 있었는데, 입사 후 처음으로 밥을 먹게 된 다른 팀 동료가 바로 그다음 날 퇴사를 하게 되었을 때였다. 좀처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일을 잘 해내야 하는가에 대한 회의마저 들었다. 회사도 상황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 파악을 위한 여러 가지 시도를 했고 구성원들에게 '해체'에 대한 이유를 물었다. 다만 해체되어 나간 조각이 아닌, 남은 조각들에게 되물었을 뿐.
당시 나는 동료들이 회사를 떠나는 이유들을 직접적으로 겪고 있진 않았다. 사내 파견직처럼 분리되어 일 하는 팀의 특성상, 본사에 불어 닥친 한여름의 칼바람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떠난 자는 말할 기회가 없거나, 말할 힘 또는 애정이 남아있지 않았으므로 남은 자는 선택을 해야 했다. 우리의 일을 나의 일로 여기고 목소리를 내볼 것인지 적당히 포기할 것인지.
나는 내가 속한 공동체로의 회사의 변화 가능성을 믿어보기로 했고, 퇴사 이유에 대해 수집한 말들을 정리해 발언 기회가 주어진 때라면 적극적으로 손을 들었다. '할 말 다 하는 애'가 된 효과가 있었을까? 불편의 목소리를 내는 '불편한 사람'이 되기만 한 걸까? 나도 사회생활, 조직에 대한 눈치가 없어서 이러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그저 다툼을 싫어하는 평화주의자가 아니라 정의에 따른 화평을 추구하고 싶을 뿐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고, '꼰대'가 싫으면 '실무진'이 떠나나.
“장점: 실무진들끼리 분위기 좋음. 조직문화를 위한 노력이 있음. 좋은 회사가 되기 위해 노력은 함.
단점: 결정권자들은 책임지지 않고 실무진들이 죽어라 일하고 싸워서 일해나감. 점점 꼰대들이 꼰대를 뽑는 분위기.”
끊이지 않고 신규 퇴사 소식이 들려오던 어느 날, 입사지원 플랫폼의 리뷰로 올라온 내용 하나를 다른 동료가 공유해 주었다. 뼈아픈 단어의 나열에 집 나간 둔감 녀석이 돌아왔다. '실무진', '결정권자', '꼰대'.....
*꼰대: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해서 자신보다 지위가 낮거나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꼰대질을 하는 사람(출. 네이버 시사상식사전.)
'꼰대'라는 분리의 단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선을 긋고 시작하는 언어에 대해 경계하려 한다. 우리는 누구나 어느 면에서 실무진이고 결정권자이며, 또 자신의 경험을 섣불리 일반화하여 말하는 '꼰대'화법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퇴사를 마주하며 가장 무기력해지는 때는 '결국엔 바뀌지 않을 것이다.'라는 냉소가 밀려올 때가 아니다. 유일무이한 한 사람의 아픔과 치열한 고민이 누군가에게 '요즘 청년들', '젊은 사람들', '실무진', 'mz'라는 단어로 뭉쳐져 버리는 어처구니의 때를 발견했을 때, '어차피'라는 시선을 마주했을 때 찾아오는 안타까움이다. 그리고 과연 나는 어디에 있는 가에 대한 자조(自照)이다.
건강한 공동체에 대한 고민
같은 연령, 성별, 취향의 사람들만 모인 조직이 더욱 안전할 것이라는 기대가 아니다. 회사의 존재 목적이자 기본 조건인 이윤추구를 달성하며, 구성원들을 먹여 살릴 능력을 갖추는 것. 그리고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일터에서 보내는 개인들의 자아가 존중되고 발전되는 안전한 울타리로써 회사가 존재하기 위해 지금을 돌아보려는 것이다. 무엇을 인정하고 무엇을 극복해야 하는 가에 대한 고민 그리고 실천을 해나가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정말 서로의 울타리가 될 수 없을까.
글의 목적
글을 써야겠다, 아니 글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겠다고 생각해 브런치를 켠 이상 목적은 분명했다. 퇴사의 이유를 밝히고, 개선 방안을 이야기하는 건설적인 글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이 글을 회사의 누군가가 보지 못할 것이고, 그게 나라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을 거라는 어리석은 확신도 아니다. 그저 20대가 실종될지도 모르는 스타트업이라는 기이한 현상에 대한 기록을 남겨두고 싶었을 뿐. 아끼는 동료들과 조금 더 오래 일을 하고 싶을 뿐이다.
주목할만한 점은 한 직장에서 일하는 기간이 갈수록 짧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또 계약직이나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한국에서 직장을 몇 번 옮기는지 묻는 일은 이제 무의미해질지도 모른다.
개인은 더 짧은 시간에 일터를 바꾸게 된다. 일하는 동안 많은 에너지를 투여하고, 또 소진되어 다시 퇴사를 하고, 또 기운 차리면 일터로 나가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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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취업과 실업을 반복하는 동안에 일이란 무엇인지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어떤 직장이 비합리적인 곳인지, 폭력적인 곳인지, 역악한 곳인지, 자신에게 맞는 일터의 기준을 만들고 찾아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개인은 주체적인 사람으로 일을 하게 된다.
<회사가 괜찮으면 누가 퇴사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