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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박 Oct 09. 2021

형태 - 소박함

19-1021


그의 일생을 딛고 서있는 소박한 형태



텍스트의 의미에 따라 계획된 건축의 소박한 형태,

절제되어 지하에 자리 잡은 기능으로 인해 실현할 수 있는 고요한 장소와 저밀도의 건축,

건축을 유랑하며 상상한 공간과 내가 실제로 마주한 공간이 불일치할 때의 이질감.


추사 김정희, 제주의 좁은 방 안에서 유배 중이던 그는 작은 창을 통해 쏟아지는 빛을 보며 비록 몸은 갇혀 있지만, 자신의 내면에서 광활한 자유의 광명을 누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쓴 글과 건축을 보며 생각했다. 이는 어찌 보면 '제주 추사관'을 다녀온 후 느낀 기행문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단순한 형태, 조그마한 창문이 만드는 특이점, 그곳에서 시작하는 공간에 대한 상상



SHAPE; FORM; 처음 추사관을 보았을 때, 그 형태의 단순함을 보고 감탄했다. 회색 빛깔의 나무판자가 덧대어진 외피, 짙은 회색의 강판으로 마감된 지붕, 재료에서 오는 색채가 주변에 깔린 잔디, 그리고 검은 현무암이 쌓인 돌담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추사 김정희가 그린 '세한도'에 단정한 색채가 입혀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입면에 원형으로 열려있는 조그만 창, 이는 형태의 단순함에서 하나의 특이점을 만들고 있었다. 힘이 있었지만 과하지 않았고 창과 마주하고 있는 내부 공간이 점점 궁금해졌다. 또한 무채색의 입면과 땅이 마주하는 곳에 얇은 창문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래서인가, 무거운 색을 가진 단단한 건축이 다소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고요한 주변 맥락에 따라 절제되고 소박해진 형태는 건축이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ENTRANCE; BASEMENT; 예상과는 반대로 1층이 아닌 지하에 입구가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서 지하에 들어서니 추사 김정희와 관련된 전시가 펼쳐져 있었다. 다만 지하에서는 들어오기 전에 인지한 매스의 형태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전시를 둘러보면서 지하에 묻힌 이 전시관은 외부에서 본 형태의 소박함을 만들기 위해서 절제하고 축약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외부에서 본 소박하고 단단한 그 형태가 가지는 공간을 더욱 기대하게 되었다. 중간중간, 하늘을 향해 열려있는 보이드를 통해 지하에 부족한 빛이 스며들고 있었고 전시를 보는 도중에 '소창다명 사아구좌'라는 글씨를 보게 되었다.


소창다명(小窓多明), 작은 창가에 빛이 밝으니

사아구좌(使我久坐), 나로 하여금 오래 머물게 하네.


IMAGINE; 나는 이 글씨를 보고 직감했다. 글씨에서 이야기하는 작은 창가는 분명 외부에서 본 원형 창문일 것이라고. 나는 그리고 상상했다. 지하의 전시관은 1층의 공간에 다다르기 전, 인물에 대한 배경지식을 습득하고 공간을 상상하게 하는 전이공간이라고. 전시를 모두 감상하고 천천히 1층으로 올라갔을 때에는 외부에서 봤던 소박한 형태와 원형 창문, 그 주변의 침묵적인 공간과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가구가 있는 그러한 공간을 마주치기를 상상하고 바랬다. 전시를 어느 정도 감상한 후에 나는 내가 상상한 그 형태와 공간감을 가진 곳으로 갈 수 있었다. 하지만 1층에서는 아니었다.


DISCREPANCY; 불일치; 전시의 끝에서 지하 1층부터 지상 1층까지 2개 층이 열려있는 공간에 다다랐다. 원형 창은 저 위에 마치 달처럼 떠있었다. 입면의 하단부에 길게 늘어진 띠 창은 나의 발밑, 바닥을 비추는 창이 아니라 지하와 1층 그 중간 어딘가를 비추는 창문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그 공간에 잠시 압도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충격은 금방 사라졌다. 전시의 중간에 인물의 글과 그림을 보지 않았다면 다르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글을 보고 나서 외부에서 본 그 원형 창문의 너머에는 작은 책상과 의자가 있고 그곳에 앉으면 원형 창문을 통해 빛이 내려와 책상에 닿고 내 팔과 손에 닿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절제되고 축약되어 지하에 자리 잡은 전시공간을 딛고 지상으로 올라갔을 때, 침묵적인 공간에 잠시 앉아서 창문 밖으로 자연을 보고 한참 생각에 잠길 수 있는 그런 소소한 공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공간은 내 상상과 일치하지 않았다. 지하부터 1층까지 열린 공간은 외부에서 본 형태에서 떠오르는 공간감과는 달랐고 내 시선의 아래에 있을 것 같았던 모든 창문이 손도 닿지 않는 저 높이에 있었고 1층에서는 보이드의 너머에 존재하고 있었다. 예상과는 다른 내부의 공간감, 거기서 아쉬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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