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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박 Aug 20. 2022

공전하는 삶

저만치 혼자서 - 김훈


저만치 혼자서,


이 책은 책의 끝, 260페이지에 나오는 '손'을 읽고 구매를 결정했다. 책을 읽어본 사람들도 있고 안 읽어본 사람들도 있겠지만 간절한, 강력한, 따스한 그 손을 상상하며 괜스레 마음 한켠이 시큰해졌고 결국 책을 집어 들게 하였다.


[명태와 고래]에서는 남과 북에서 차례로 체포되고 감금되며 그로 인해 삶이라는 선이 점차 희미해지고 옅어지는 남자가 등장한다. 그를 바라보면서 이유 모를 답답함을 느꼈는데 이것은 마치 뿌연 수증기 속을 걸어 다니다가 지쳐버린 느낌이었다.


[손]에서는 물속에 자신을 내던진 한 여자의 죽음의 순간과 구조 대원의 몸을 강하게 움켜쥔 필연적인 생명력 사이에서 모순을 느꼈다.


[저녁 내기 장기]에서는 가족이라는 품에서 멀어진 한 남자가 나온다. 의사가 가볍게 뱉은 '아버님'이라는 말 한마디에 그는 자신의 과거가 마치 환영처럼 다가오는 것 같다고 느끼는데, 나에게는 혼자 남은 이의 무덤덤한 외로움이 잔잔한 파도처럼 다가왔다.


[대장내시경검사]에서도 저녁 내기 장기에서 느낀 인간의 외로움이 느껴졌는데 앞의 것은 의도치 않은 헤어짐과 그것이 굳어짐에 따라 자연스레 뒤쫓아오는 적막과도 같은 외로움, 그러고 나서 바라본 과거가 빛을 아주 잃지는 않은 환영과 같았다면 뒤의 것은 보호할 이가 없이 빈자리를 맴도는 고독과 같은 외로움이었다. 내시경검사를 하고 나온 남자의 몽롱함이 마치 그의 외로움을 연기처럼 만들어서 그것이 눈에 선한 듯했다.


[영자]에서는 노량진이라는 특정한 장소에서 무던하게 지나가는 삶의 모습이 보인다. 동거하는 남녀의 식사, 대화, 관계가 빠르게도 지나가는데 글 속에 나오는 시험 합격률을 본 순간, 그들의 현재와 미래가 아주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있는 것만 같아 답답했다.


[48GOP]에서는 글 속의 남자가 파헤쳐진 뼛조각들을 바라보는 모습이 계속 상상된다. 헐거운 뼈들, 전쟁이라는 태풍이 지나가고 50년 만에 맞는 햇빛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 뼛조각 중에 그의 할아버지가 있을까,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그 먹먹한 죽음은 마치 물속에서 들려오는 웅얼거림 같았다.


[저만치 혼자서]에서는 흘러가는 시간의 끝에 다다른 자들이 보인다. 글을 읽어가면서 그들의 죽음이 너무나도 가까이 온 것 같아서 그것을 너무 직접적으로 마주하진 않을까 하고 불안했지만 삶과 죽음이라는 게 물과 기름 같아서 결국 그들이 섞일 수는 없을 것 같다고 느꼈고 그 불안에서 잠시 멀어졌다.


책을 읽는 내내 뭔가 알 수 없는 찝찝한 감정이 책의 곁을 서성이게 했다. 사람들의 삶이 궤도에서 얼마만큼 멀어져 있어서일까, 그런 사람들의 삶을 직시하기 힘들어서일까, 하나의 이야기를 그 순간에 다 읽겠다는 결심과는 달리 중간중간 계속해서 책을 내려놓았다.


세월이 지나니 견딜 수 있게 된 일들과
갈수록 드러내기 어려워지는 연약한 감정과
흐르는 시간 앞에 겸허해지는 인간 존재에 대하여


책 속의 모든 글을 읽고 난 후에 저 짧은 문장을 책 뒤편에서 발견했다. 그렇다. 내가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 느낀 그 어떤 답답함이나 찝찝한 감정들은 내가 이야기 속 인물들의 삶을 내 삶의 궤적과 비교해가며 읽어서인가 보다. 나의 삶 주변에는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의 궤적이 지나간다. 이것을 이해하니 이야기의 결말보다는 그들의 삶 자체에 신경이 곤두선다.

 

이제는 '저만치 혼자서'라는 제목에서 왠지 모르는 외로움도 느껴지고 죽음의 곁에 서있는 것과 같은 두려움도 느껴지며 삶의 궤도에서 멀찍이 물러난 것만 같은 초연함도 느껴진다. 사람은 공전한다. 삶의 주변을 공전한다. 삶은 점차 중력을 잃어가고 사람은 삶에서 멀어진다. 공전하는 방향과 멀어지는 속도는 다르지만 결국은 중심에서 벗어난다. 이 책은 결국 공전하는 삶을 바라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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