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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박 Oct 09. 2022

나의 여름에도 그것이 남아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 마쓰이에 마사시



0 나의 여름에도 그것이 남아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제목에 끌렸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는 결국 그의 여름이 나에게도 남겨졌다. 그의 긴장과 고집, 치열함과 상실감, 그리고 사랑과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는 것들이 모여서 그 해 여름을 만들었고 그것은 당연하게도 책 밖으로 은은히 흘러나와 나의 여름에도 닿았다.

1 이야기를 듣는 시간

퇴근 후, 지친 몸을 씻어내고 가방에 든 책을 꺼내 든다. 이 소설책은 다른 책과는 달리 그 어떤 어색함이나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사실 처음에는 책의 두께를 보고 흠칫했다). 건축과 관련된 내용이어서 그럴까, 혹은 그 이야기가 겉으로는 잔잔하게 흘러가지만 그 이면에서는 온갖 감각들을 깨우고 있기 때문일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에 어김없이 책을 꺼내 들고 편안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듣기 시작한다.

2 치열함으로 조각된 건축 ​


2-1 최근에는 신입사원을 받지 않던 무라이 설계사무소는 주인공을 신입사원으로 받아들인다. 그의 고집에 이끌렸던 것일 수도, 국립현대도서관의 설계공모를 위한 추가 인원이 필요했을 수도, 혹은 마리코의 결혼 상대가 필요했던 것일 수도 있지만 그의 채용은 꽤나 이례적이었다. ​


2-2 무라이 설계사무소는 매년 여름에 사무실을 아오쿠리마을에 있는 별장으로 옮긴다. 그 장소에서 그해의 여름과 이야기와 치열함이 흘러간다. 특히나 그 해의 여름은 국립현대도서관의 설계 경합 때문에 더욱 뜨거웠다.

2-3 연필 깎는 소리가 들린다. 매일 아침, 직원들은 연필을 깎으면서 하루를 준비한다. 그 사각거리는 소리가 왠지 모르게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면서도 그것의 틈에서 나는 은은한 냄새가 마음을 진정시킨다. 아무래도 긴장감은 시각적인 날카로움에서, 편안함은 나무 냄새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2-4 가와라자키씨와 고바야시씨가 각각 도서관에 대한 평면을 선보였다. 그들의 치열함을 엿보았기 때문일까, 그들이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된다(도서관은 책을 저장-보관하기도 하고 노출-전시하기도 한다. 필요한 책을 찾고 꺼내고 빌리는 형식일 수도 있지만 끌리는 책을 찾고 꺼내고 읽는 형식이 될 수도 있다.


"독서라는 것은, 아니 도서관이라는 것은 교회와 비슷한 곳이 아닐까? 혼자 가서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장소라고 생각한다면 말이야." (P.181). 


혼자 있을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곳이 도서관이다. 홀로 있는 것이 고독이고 그것이 자유를 동반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고독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도서관은 교회가 될 수도, 나만의 아지트가 될 수도 있다).

2-5 언제나 평정을 잃지 않던 무라이 슌스케가 평소와는 달리 다소 파격적인 설계안을 내보였고 심지어는 흔들리는 그의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변화가 그의 죽음을 살짝 내비쳤기 때문일까, 주인공은 불안해하고 덩달아 나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2-6 연필 깎는 소리와 냄새, 그 연필이 지나가면서 만들어낸 선과 그것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평면도, 평면을 입체적으로 만들어낸 모형과 그 속에 담긴 책장들에 대한 사소한 고민까지, 이 모든 치열함이 모여서 건축이 된다. 건축이 완성되어지는 과정이 곧 흘러간 시간이라면 흐른 시간의 지점은 여름이었고 그 해의 여름은 어느새 주인공의 몸속 깊은 곳에 박혀있었다.

3 13​


"나눗셈의 나머지 같은 것이 없으면 건축이 재미가 없지. 사람을 매료시키거나 기억에 남는 것은 본래적이지 않은 부분일 경우가 많거든. 그 나눗셈의 나머지는 계산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야. 완성되고 나서 한참 지나야 알 수 있지." P.180.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다.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책을 덮은 후에 생각에 잠겼다. 나눗셈의 나머지와 같은 부분, 이것은 건축에서 놀라움을 만들어내는 것과는 조금은 다른 것 같았다. 건축에서의 놀라움이라는 것이 공간의 급격한 반전이나 압도되는 풍경, 역사적인 장소에서 온다면 건축에서의 나머지는 그 어떤 섬세함이나 배려, 의외성에서 온다. 통상적인 것, 반복되는 것, 수동적인 것에서 조금은 멀어질 줄 알아야 한다. 12를 4로 나누면 나머지가 없지만 13을 4로 나누면 1이 남는다. 반대로 생각하면 4로 깔끔하게 나누어지는 12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를 남기는 13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단순하게 떠올렸었는데 생각해 보니 12와는 달리 13은 뭔가 불편하다. 13은 당연하게도 나머지를 남기지만 가능성은 그곳에서 온다).

4 망망대해 속의 조그마한 보트​


여름의 중간, 무라이 슌스케의 설계안이 모습을 드러낸 후 본격적으로 설계 경합에 대한 업무가 시작되었다. 무라이 설계사무소에 들어가던 시점부터 주인공의 자그마한 긴장이 조금씩 전해졌었는데 이 시점에서는 그 긴장감이 책임감과 불안감으로 변해있었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였기에 그 감정에 조금 더 집중했던 것 같다. 주인공의 독백(P.215) 밑에 나의 독백을 적어두었다.

당장 그 세계에 내던져진 느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야만 하는 상황 속에서 나에게 더 겹쳐질 공간이 남았던가 싶지만 계속해서 쌓아가야만 한다. 껴입고 껴입어서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차가운 바람에 대비해야 한다.  

5 어둠 속에서 끌어당긴 손

위에서 사랑과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는 것들이라고 적어놨었는데 사실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이 직접적으로 쏟아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마음을 덜컥 움켜쥔 순간이 있었다.

노미야씨의 집에 다녀온 후, 어둠이 내려앉을 마을을 주인공과 유키코가 함께 걷는다. 회중전등 하나에 의존하여 걷다가 반딧불이가 그들의 주변으로 모여든다. 전등을 끄고 반딧불이를 바라보다가 문득 그녀가 어둠 속을 걷자고 한다. 주인공은 어둠 속을 더듬어가며 그녀의 손을 찾고 마침내 그 손을 잡고 끌어당긴다(P.247).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발을 맞추며 걷는 그 모습이 마치 영화를 보듯이 선명하다.

6 오감​


책을 덮으면서 책 속의 이야기가 정말 풍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는 잔잔하게 흘러가지만 그 이면에는 수많은 감각의 향연이 펼쳐진다. 무라이 슌스케의 건축과 여름 별장에 대한 묘사는 마치 그 속에 있는 듯한 시각적인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후지사와씨의 정원과 그 위에 피어난 꽃들의 색채가 눈에 선하고 주인공이 설명하는 새소리와 마리코의 피아노 연주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하다. 식사시간 때마다 여름 별장을 채우는 음식 냄새가 느껴지는 것 같고 주인공을 둘러싼 미묘한 사랑의 감정은 손에서 시작하여 그 따뜻한 온도가 전해지는 듯하다. 이 책이 특별하다고 생각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에서 온다. 온갖 감각이 느껴지는 것, 일상은 주로 시각으로 채워지기 때문에 다른 감각들을 만나는 것이 특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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