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밤박 Nov 27. 2022

장소의 소명

하이데거적 장소성과 도무스의 신화

[하이데거적 장소성과 도무스의 신화]


정말 어려운 책이었다. 네 가지 건축이론을 모아놓은 이 책은 책을 읽는 내내 그들의 생각과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게 하였다. 각각의 이론에 대한 나의 생각을 풀어놓는 것은 조금 뒤로 미루기로 하고(읽기 힘들었던 이 책은 한 번 더 읽어야 함을 깨닫고는) 우선 책을 읽으면서 '아, 장소에 대한 이들의 생각을 딱 한 단어로 정의하면 이것이겠구나' 싶었던 것을 짧게나마 적어놓고자 한다.


건축은 수잔 랭거의 정의를 빌려 오자면 "총체적 환경이 눈에 보이게 될 때" 존재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장소의 혼을 구체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것이 장소의 속성들을 모으고 그것들을 인간에게 가까이 데리고 오는 건축물에 의해서 행해진다는 것을 보았다. 따라서 건축의 기본적 기술은 장소의 '소명'을 이해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적 장소성과 도무스의 신화, P.126


장소의 소명을 이해하는 것. 장소가 마땅히 수행해야만 하는 그것의 책임감, 그리고 의무를 이해하는 것. 그것이 내가 장소를 마주할 때 행해야 하는 태도였다. 그동안 도시는 무분별하게 확장되고 무장소성이 땅의 색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하이데거와 노르베르크 슐츠는 이러한 도시의 장소, 그리고 건축의 무장소성과 인간소외를 비판하며 거주의 의미, 장소의 속성과 그것의 소명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반대로 닐 리치는 하이데거의 도무스의 신화를 비판하며 단단한 결속력으로 닫힌 도무스의 이기적인 속성과는 달리 도시라는 장소의 배타성과 익명성(이것은 차이를 수용하게 한다), 그리고 장소 개념이 아닌 순간의 현상에 의존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인간의 역량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차이가 점차적으로 극심해져가는 현재의 삶 속에서 닐 리치의 도시에 대한 의견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렵고 편재한 무장소성의 틈에서 노르베르크 슐츠의 장소에 대한 생각 또한 부정하기 어렵다. 대립되는 두 영역의 사이에서 딱 한 가지, 도시와 시골, 장소의 지속과 순간의 현상,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것은 장소가 그 어떠한 소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장소가 시골에 있는지, 혹은 도시에 있는지, 누군가는 오랜 시간 동안 그 장소에 뿌리내리고 또 어떤 이는 금방 다른 장소로 이동하게 되는지는 중요치 않다. 내가 생각했을 때, 장소는 그것이 마땅히 수행해야만 하는 그 어떤 소명이 있다. 그것은 건축이 놓이지 않은 채로는 무의미하다. 장소 위에 건축이 알맞게 놓이면 건축은 장소의 여러 속성들을 한데 모으고 그것들을 인간에게 가까이 가지고 온다. 


이전에 장소성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때의 장소성은 기억의 집적과 그로 인해 형성되는 장소에 대한 애착이 그 장소를 인간에게 익숙한 환경으로 정착시킨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누군가에게는 별 의미 없는 어떤 장소가 누군가에게는 편안하고 위로해 주는 장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것은 장소를 찾아가는 빈도와 그 장소에서의 경험의 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이야기하는 장소성은 그 땅과 주변의 맥락이 가지고 있는 속성들을 건축이 어떻게 흡수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사람에게 전달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여러 속성을 가지고 있는 장소 위에 그것들을 전부 무시하는 건축이 들어서면 장소는 그것이 발현해야 하는 장소의 빛을 발산하지 못한다. 그렇게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장소는 그 그림자가 너무 짙어, 사람들의 움직임을 불편하게 하고 그 어떤 순간에 장소를 생각나게 하는 기억을 생성해 내지 못하며 장소의 바깥으로 시선이 맺히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장소의 소명은 어디에선 중요하고 어디에선 중요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모든 장소는 그것 나름의 소명을 가진다.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은 그것을 읽어내고 이해하는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건축잡담 -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