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여름 가을 겨울
“짜장면 배달이요-”
각자 어느 정도 짐 정리를 마무리한 상태에서 음식이 배달됐다. 가구를 정리하던 가을이, 이삿날은 역시 중식이라며 손을 툭툭 털고 일어나 음식을 받으러 나갔다. 거실 바닥에 모여 앉아 삼 남매가 젓가락을 들었다.
해가 저물면서 거실의 큰 창 안으로 노란 저녁노을이 드리우고 있었다. 각자의 앞으로 먹다 남은 맥주캔을 하나씩 챙겨둔 삼 남매가 거실 창 너머 높은 하늘을 쳐다봤다. 얼마나 꿈같은 순간이었을까. 여름은 지금 자신의 기분에 황홀하다는 단어가 딱 들어맞는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파트 들어갈 때마다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가는 집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알아?”
겨울의 말에 앞으로 다달이 대출 이자를 갚아나가야 한다며 기분을 깨버리는 가을이었다. 더욱 열심히 살라는 하늘의 뜻일 거라며, 여름이 가을의 머리를 콕 쥐어박았다. 그런 삼 남매의 평화로운 분위기를 깬 건 인옥의 전화였다.
“아직도 전화 와?”
“받지 마.”
가을과 겨울은 단호했다. 각자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테지만, 그 후로 어느 누구도 인옥의 전화에 대해서는 언급하는 일이 없었다. 인옥의 연락을 외면해야 될 때마다 가슴이 턱턱 막혀왔던 여름만 빼고.
“왜 이제 와!”
“언제 왔어? 일 끝나면 이 시간이야. 전화를 하지-”
쫓겨나다시피 직장을 관두던 날, 여름이 집에 도착했을 때 문 앞에는 인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놀란 여름이 핸드폰을 보았을 땐, 인옥으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8통이나 와있었다. 전화를 받지 않아 찾아왔다는 인옥을 데리고 여름은 하는 수없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따라 유난히 불안해 보이던 인옥이었다.
“이모, 왜 이렇게 손을 떨어?”
“… 밥을 못 먹어서.”
“그때 반찬 보내준 건?”
“벌써 다 먹었지!”
벌이가 없던 인옥에게 여름은 몇 번 음식을 사서 보내주고는 했다. 반찬이 다 떨어졌다고, 사 먹을 돈이 없다고 말하기 위해 인옥은 수도 없이 망설였을 터였다. 그마저도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아 속으로 삼켰겠지만. 그런 인옥에게 잠시 있으라고 얘기한 뒤, 여름이 얼른 커피우유를 사 와 건네고는 짜장면을 시켜주었다. 음식이 도착하자 인옥은 마치 며칠 동안 굶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여름이도 돈 없는데 이모 때문에….”
그 와중에도 여름의 주머니를 걱정하던 인옥이었다. 차비밖에 없어 용돈을 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인옥에게 여름은 자신의 앞에 놓인 면까지 인옥의 그릇에 덜어주었다. 그날 인옥은 먹다 남은 탕수육을 검은 비닐봉지에 챙겨 가져갔다. 연신 고맙다는 말을 남긴 채.
안쓰럽고 불쌍했던 그날의 기억은 지금까지도 여름의 가슴속에 응어리처럼 남아있었다. 처음으로 그녀에게 무언가를 건네던 순간, 동전이 담긴 검은 비닐봉지조차 줄 수 없었던 인옥의 마음을 알아서였을까. 자꾸만 뇌리를 스치는 작은 기억 조각들이 마음에 걸리는 여름이었다.
인옥은 이곳을 찾아오지 못할 터였다. 삼 남매가 살던 집은 이제 빈 집으로 남아있을 테니까. 무사히 이삿짐을 옮기고 난 여름이 인옥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 멀리 이사했어, 이모. 그니까 이제 찾아오지 마. 그 집에 가도 우리 없을 거야. 가끔 전화할게.”
어쩌면 그건 해방이었다. 더 이상 찾아올 사람이 없어 그저 편안하기만 한 보금자리. 전화를 받지 않으면 영영 인생에서 내칠 수 있는 유일한 기회 앞에서 삼 남매는 고개를 숙였다.
*
그새 취기가 올라 얼굴이 붉어진 겨울이었다. 시보 해제를 앞두고, 마냥 기분 좋을 시기에 어쩐지 겨울은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았다. 도통 얘기를 해주지 않는 그녀였기에 여름과 가을은 알 수 없었다. 아직 짐이 채 정리되지 않은 거실이 추웠는지 겨울이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엎드렸다. 언제부터 겨울의 표정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사를 오면서부터였을 것이다. 퇴근하고 와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넋이 나간듯한 표정으로 그저 방에만 틀어박혀있던 겨울이었다.
“큰누나, 들어가서 자. 여기 춥다.”
가을이 그런 겨울을 깨워 방으로 들여보냈다. 여름이 자리에서 일어나 슬슬 그릇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잠깐 잊고 있던 휴대폰을 봤을 땐, 더 이상 찾아올 수 없어 전화만 해대는 인옥의 부재중이 잔뜩 남아있었다. 여름이 핸드폰을 끈 채, 뒷정리를 하는 가을에게 물었다.
“태웅이랑은 만나?”
그녀의 말에 가을은 잠시 멈칫하는 듯했다.
“태웅이 바빠.”
“아직 그 일 해?”
“그렇지, 뭐.”
얼버무리는 가을을 보며 여름은 오늘도 그에게 건네고 싶었던 많은 말을 삼키기로 했다. 때가 되면 가을이 먼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주길 기다리기로 한 여름이었다.
마저 짐 정리를 하다 자겠다며 여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충 자리를 정리해 놓고 방으로 들어온 여름의 눈에 미처 다 푸르지 않은 짐더미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날 밤, 여름은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아 덮어두었던 노트북을 꺼내 펼쳤다. 습관적으로 구직사이트에서 '작가'라는 단어를 검색했지만, 그녀의 가슴은 더 이상 설레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작가라는 일을 떠올리는 것조차 싫어진 게.
“한도가 안 나오네요. 이미 타 은행권 대출도 여러 개 있으시고요.”
“방법이 없나요?”
“한 직장에 오래 재직하셨으면 모르는데, 소득이 일정하신 것도 아니어서요.”
“소액도 안될까요…?”
툭 치면 눈물을 흘릴 것만 같은 표정의 여름이 말했지만, 은행 직원은 감정의 동요 없이 대답을 이어갔다.
“300만 원은 소액이 아니에요, 고객님.”
방문하는 은행마다 대출을 거절당하고, 거리로 쫓겨나다시피 나온 여름이 핸드폰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혹시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지인이 있을까, 기대했지만 연락이 닿을만한 사람은 없었다. 새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만 끝내 제 힘으로 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여름이었다.
그때 선월동으로 이사를 오지 않았다면, 겨울과 가을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여름은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까. 계속해 눈물이 흐르는 탓에 여름은 노트북을 닫아버릴 수밖에 없었다. 꽤 많은 울음을 삼켰던 그날은 처음으로 삼 남매가 각자의 방에서 보내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