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여름 가을 겨울
매서운 추위가 한층 사그라들고 꽃내음이 풍기는 날들이었다. 사람들은 일찌감치 벚꽃 개화 시기를 알아보며 가슴 설레어하고 있었던 시기에 여름은 몇 번이나 구인사이트를 들락날락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저희 마감하겠습니다.”
얼마나 오래 앉아있었던 걸까. 하염없이 노트북 화면만 보고 있던 여름에게 카페 점원이 다가왔다. 흠칫 놀라 주변을 둘러보니 매장에는 자신밖에 없는 것 같았다. 다소 민망한 듯한 표정으로 여름은 부랴부랴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신기하게도 선월동은 환한 대낮보다 어두운 밤에 더 많은 사람이 모이는 도시였다. 처음 이사 오던 날, 이정표조차 쓰여있지 않던 동네, 주변으로 사람은커녕 차도 한 대 다니지 않는 신도시였다. 오늘도 아무런 성과 없이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고 있는 여름의 시선에 한 남자의 등이 보였다. 널찍한 등을 내보이며 열심히 무언가를 써붙이고 있던 남자가 자리를 떠났을 때, 그곳에는 '직원구함'이라는 네 글자가 붙어있었다.
‘계절서점?’
여름과 석호의 첫 만남이었다.
집에서 20분 거리에 위치한 동네 서점, 한 번쯤 서점에서 일을 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던 여름에게도 기회가 닿았다. 자신의 과거와는 전혀 상관없던 일. 무슨 용기에서였을까. 전혀 계획에는 없던 일이었지만, 여름은 이미 석호의 뒤를 따라 서점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면접을 앞두고 단정하거나 깔끔한 옷을 골라 입어보는 여름이었다. 일을 하지 않는 동안 살이 많이 쪘는지, 예쁘게 맞는 옷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그나마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 입은 여름이 이력서를 챙겨 집을 나섰다.
아직은 동네가 낯설었기에 여름은 핸드폰을 꺼내 지도를 검색해 길을 따라 걸어갔다. 멀리서 조금씩 계절서점의 간판이 가깝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인테리어 공사가 한창인 내부 모습도 얼핏 보이는 듯했다. 서점 문에 다다를수록 여름의 가슴은 뛰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 오늘 면접보기로 되어있는데요.”
여름이 들어갔을 땐, 카운터에 두 남자가 서있었다. 그때 봤던 그 남자, 석호였다.
*
규모는 크지 않지만 세련되게 장식된 인테리어를 보자 여름의 눈이 다소 동그래졌다. 밤에 봤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공간이었다. 천장에 샹들리에처럼 걸려있는 전구색 전등들이 정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베스트셀러를 비추며 모습을 드러냈고, 곳곳에 위치한 서가들은 카테고리별로 깔끔하게 정리된 모습이었다. 석호 옆에서 컴퓨터를 만지던 영일이 여름에게 다가와 악수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서점 대표는 쟤고요, 저는 총판 직원입니다.”
서글서글하게 웃으면서도 다소 장난기 어린 표정의 영일은 어쩐지 자신이 지금까지 봐왔던 다른 사람들처럼 익숙하게 느껴지는 여름이었다. 그러면서도 능글거리는 그가 유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여름 역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저한테 안녕하실 건 없고요, 쟤한테 잘 보이시면 돼요. 김영일입니다.”
영일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엔 석호가 있었다. 영일은 을이라며 석호 역시 그의 농담을 받아쳤다. 석호가 이 쪽으로 앉으라며 여름에게 자리를 안내했다. 자리에 앉으며 서점이 참 이쁘다고 생각하는 여름이었다.
“사장이 각 국마다 돌아다니면서 서점들 벤치마킹한 거예요. 돈 엄청 투자했어요, 여기에. 유명한 서점들이 다 이런 모양이잖아요.”
먼저 소파에 앉으며, 앓는 소리를 내는 영일이 여름의 말을 거들었다.
“이름이 여름이에요? 우리 서점하고 딱이네. 이거 인연 아니야?”
여름을 향해 웃어 보이는 영일이었다.
*
석호와 영일에게는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후월동에서 석호의 아버지가 계절서점을 운영하던 시절, 영일의 아버지가 총판의 대표였기에 그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함께한 추억이 많은 듯한 영일과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석호가 커피 한잔을 내려 여름에게 건넸다. 반쯤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받는 여름이었다.
“딱 보니까 일 잘하게 생기셨어, 그지?”
영일이 후루룩 소리를 내며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아무래도 그는 앞으로 추임새를 담당하려나보다, 생각한 여름이 커피로 목을 축였다. 시럽 없이는 쓰디쓴 커피를 입에도 대지 못하는 여름이지만 희한하게도 오늘은 석호가 건넨 커피가 참 달게 느껴졌다.
“형제 관계가 어떻게 돼요?”
석호의 첫 질문이었다. 언니와 남동생이 있다는 여름의 말에 영일은 그들의 이름도 봄, 가을, 겨울 중 하나가 아니냐며 농담 삼아 얘기하며 웃어 보였다.
“언니가 겨울이고, 동생이 가을이에요.”
여름의 말에 멈칫하는 영일이었다. 그런 여름을 보는 석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서점 일은 해보셨어요?”
여름의 이력서를 보며 석호가 물었다. 표정을 유심히 살피는 석호의 눈빛이 다소 날카로워졌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이전보단 낫겠지 싶은 여름의 입가에 잠시 씁쓸한 미소가 비쳤다.
“해본 적은 없는데,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늘 있었어요.”
“서점에서 무슨 일 하는지 알고?”
“우리한테 책은 읽는 게 아니라 파는 거지, 그럼.”
자칫 얼어버릴 뻔한 분위기를 풀어준 건 영일이었다. 그가 입에서 빨대를 쪽 소리 나게 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들은 여름의 과거에 대해 굳이 되묻지 않고 있었다. 오랫동안 글을 써온 작가가 왜 갑자기 다른 일을 하려 하는지, 어떻게 그만두게 되었는지. 만일 그들이 물었을 때 여름은 어떻게 대답할 수 있었을까?
“지금까지 했던 일들이 어땠는진 모르겠지만, 우리는 동네 서점이라 일하는 게 어렵진 않을 거예요. 마냥 쉽지는 않을 수 있지만.”
인테리어 공사가 늦어지고 있어 마무리되는 대로 출근하기로 한 여름이었다. 석호의 짧은 인사말로 면접은 끝이 났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여름에게 석호가 뒤이어 말을 붙였다.
“아, 저희는 매장에서 별칭으로 부를까 해요. 하나 생각해 보세요.”
“… 운아로 할게요, 운아.”
선뜻 튀어나온 대답이었다.
“운아? 뭔 뜻이야?”
영일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냥 지금 생각이 나서요.”
여름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자신도 김 군이라 불러달라는 영일의 우스갯소리를 뒤로한 채 여름이 서점 문을 나섰다. 운이 좋은 아이, 운아. 여름이 앞으로 이곳 계절서점에서 불리게 될 이름이었다. 문득 생각난 이름처럼 운이 좋은 자리였길 바라며 여름이 기분 좋게 집으로 향했다.
*
“왜 뽑았냐?”
여름이 가고 난 뒤, 자리를 정리하던 석호에게 영일이 물었다. 석호가 뽑은 게 여름이었다는 사실에 의외로 놀랐던 건 영일이었다.
“선명이랑 너무 닮아서 싫어할 줄 알았더니.”
영일이 싱크대로 향하며 대답하지 않는 석호에게 되물었다. 그는 여름의 이력서에서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석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영일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등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