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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아 Sep 14. 2024

빛 바랜 편지

05 여름 가을 겨울


 집안 곳곳을 정리한 게 언제였던가. 여름은 옷장에서 뽀얗게 먼지 쌓인 상자들을 내리고 있었다. 불투명한 상자는 뚜껑을 열어보지 않고는 안에 무엇이 담겨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랬기에 여름은 늘 상자 겉면에 작은 글씨로 메모를 붙여놓고는 했다. 후- 하고 불어 두텁게 쌓인 먼지를 날리자 가려져 있던 글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편지들'

 이렇게 큰 상자 안에 담을 만큼 편지가 많았던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여름이었다. 조심스레 상자 안을 열어보니, 수북이 쌓여있는 편지가 보였다. 유치원 때 가을이가 삐뚤빼뚤한 글씨로 써준 크리스마스 카드, 지금은 연락이 다 끊겼지만 학창 시절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 그리고 짝사랑했던 선배에게 전하지 못한 마음까지. 전부 추억이 돼버린 기억들을 떠올리는 여름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여름이에게'

 그런 여름의 눈에 또 다른 글씨가 보였다. 이모 인옥의 편지였다. 언제 마지막으로 열어본 건지 이제는 기억이 나지 않는 여름이었다.     


 “나는 나중에 크면 5층짜리 집에 살 거야! 1층은 이모랑 삼촌, 2층은 엄마, 3층은 나, 4층은 언니, 5층은 가을이!”

 유치원 때였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름은 어른이 되면 꼭 온 가족이 다 같이 모여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자신의 말에 고맙다며 행복하게 웃던 인옥의 모습은 더 이상 기억으로만 남아있었다. 유일하게 기억나는 건 인옥이 늘 품에 안고 다니던 검은 비닐봉지였다. 인옥은 한 푼, 두 푼 모은 동전을 늘 여름에게 건네곤 했다.

 “이걸로 간식 사 먹어. 우리 여름이, 이모가 돈 많이 못 줘서 미안해.”

 인옥은 어쩌면 부족하게나마 엄마의 빈자리를 대신해주려 했으리라. 언제부턴지 봉지 속 동전의 개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그조차도 차비를 해야 된다며 다시 가져가던 인옥이었다.     


 자신이 조금만 더 컸었다면, 그때 인옥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을까. 편지봉투를 열자 삐뚤빼뚤한 글씨로 쓰인 편지지가 담겨있었다.

 ‘여름아 이모야. 잘 지내고 있니? 상옥이가 연락이 안 되네. 전화 좀 줘. 부탁해. -이모가’     


*     


 “이모 번호 차단해 놔.”

 겨울은 늘 여름과 가을에게 인옥의 전화를 받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여름은 차마 그러지 못했다. 자신이 조카에게 차단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인옥이 받을 상처가 걱정돼서였다. 그 대신 여름은 집 밖을 나서면서부터 늘 핸드폰을 무음으로 돌려놓고는 했다.

 어쩌면 여름은 알 것도 같았다. 인옥의 전화를 차단하게 되면 일상은 너무도 평온해질 것이라는 것을.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전화를 받지 않는 것에 대한 해명을 하지 않아도 됐고, 자꾸만 전화를 거는 인옥으로 인해 불안하지 않아도 됐다. 어쩌다 한 번 인옥의 전화를 받을 때면 횡설수설하다 끊어버리는 비정상적인 인옥의 존재도 애써 모른 척해야 했으니까. 집안에 제대로 된 어른 한 명 없이 구질구질하게 자라온 환경을 들키는 것도 싫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름에게 모르는 번호로 한 통의 문자가 왔다.   

  

 [이모께서 전화 좀 달라고 하세요]     


 인옥은 도통 전화연결이 되지 않는 조카들로 인해 길거리를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종종 전화를 부탁하곤 했다. 그럴 때면 여름은 마지못해 그녀에게 한 번씩 전화를 걸었다. 그때는 인옥이 그저 심심해서, 상옥과 연락을 하고 싶어서, 혹은 조카들을 보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한들 자신의 행동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겠지만. 

 열 번의 전화 중 한 번을 받을까 말까 했던 여름이었기에 인옥은 점차 편지를 남기기 시작했다. 집으로 찾아와도 조카들을 만나지 못할 때면 편지를 문 앞에 걸어두기도 했고, 직접 오지 못할 땐 우편으로 부치기도 했다. 어쩌다 한 번씩 인옥에게 오는 편지를 여름은 차마 버리지 못한 채 모아두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답장을 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인옥의 편지를 보는 여름의 마음이 아려왔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는 여름의 뒤로 겨울이 다가왔다. 그러자 허겁지겁 상자 뚜껑을 닫고 일어나는 여름이었다. 

 “다 챙겼다, 나는- 얼마나 남았냐?”

 “나도 다했어, 이것만 옮기면 돼. 가을이는?”

 “서가을- 우리 다 됐어!”

 겨울이 막내 가을을 부르며 뒤돌아섰다. 잠시 동안 굳어있던 여름이 가을과 겨울의 앞에서 애써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


 “하나, 둘, 셋-”

 대단지 앞으로 트럭을 채우고 있던 짐들이 내려졌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저희가 정리할게요.”

 수고비를 내밀며 감사인사를 전하는 가을에게 이삿짐센터 사장은 손사래를 치며, 마저 짐을 정리해 주겠다고 했다. 봉투를 건넨 가을의 손이 멋쩍어졌다.

 “위에까지 올려드려야죠- 한 번만 갔다 오면 되겠구먼, 뭘. 보통은 사다리 쓰고도 네다섯번은 더 왔다 갔다 해요.” 

 사장은 성인 세 명치고 짐이 아예 없는 편이라며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그가 엘리베이터로 짐을 실으며 뒤따라오는 가을에게 물었다.

 “근데 세 분 짐이 너무 적은 거 아니에요? 여기 30평은 넘어 보이는데.”

 “전에 살던 데가 워낙 좁았어서요. 이제 조금씩 채워나가야죠.”

 “그럼 이것까지만 올려놓고 갈게요- 오늘 손님분들 잘 만나서 일도 쉬엄쉬엄하고 계 탔어요, 우리.”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가을이 문을 열고 있는 사이, 사장은 짐을 집어 들며 허리를 숙였다. 그가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릴 적부터 삼 남매와 상옥이 함께 살았던 공간은 작은 방과 거실 겸 큰방, 그리고 부엌이 이어진 작은 아파트였다. 상옥이 아이들만 남겨둔 채 집을 나가버린 그 뒤로는 삼 남매만의 공간이 되어버렸지만. 우연하게도 청약에 당첨돼 선월동으로 이사 온 삼 남매의 새 보금자리는 부엌과 거실이 분리된 세 개의 방으로 나뉘어있었다. 그중 큰 방은 여름이 쓰기로 했다. 여전히 글에 미련이 남아있는 자신의 모습이 우스웠지만, 언제라도 다시 글을 쓰게 된다면 작업실로 사용할 공간이 필요할 터였다.

 드레스룸을 포함한 큰 방의 크기는 이사오기 전 아파트의 전체 규모와 비슷했다. 큰 공간에 짐이 다 채워지지 않아 목소리가 울리는 공간에 서있으니, 삼 남매는 마치 꿈을 꾸는 듯 황홀함을 느꼈다.

 가장 짐이 적었던 건 첫째 겨울이었다. 아직 초년생인 겨울은 옷장을 채울 수 있는 옷도 몇 벌이 채 되지 않았다. 이제 막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던 터라 책장을 가득 채웠던 책들도 전부 버린 상태였다. 끝방은 막내 가을에게 돌아갔지만 사실 가을의 관심이 향한 곳은 방이 아닌 거실이었다. 갓 전역한 가을이 열심히 돈을 모아 가장 먼저 구매한 건 커피머신이었다. 열심히 유리잔을 정리하는 가을의 표정이 매우 들떠있었다.    

 

 삼 남매에게도 새 보금자리가 생겼다. 어렵게 마련한 아파트에서 삼 남매는 앞으로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품은 채 각자의 미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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