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석호와 운아
“어머, 여기 서점이 있었네?”
“동네에 서점 생기니까 너무 좋네. 오픈하면 올게요-”
오픈일자가 코앞으로 다가온 3월, 마무리 정리 중인 서점 안으로 손님들이 여러 차례 고개를 내밀었다. 언제 오픈하냐며 묻는 그들의 표정엔 기대감이 잔뜩 묻어나있었다. 손님들 가운데 몇 명은 이미 석호의 아버지가 오래전부터 해오던 가게를 알고 있기도 했다. 책을 정리 중인 운아에게 한 중년 여성이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혹시 여기가 후월동 계절서점이랑 같은 데예요? 저기 보니까 70년부터 오픈했다고 쓰여있던데….”
“네, 맞아요. 여기는 아드님이 새로 하시는 데예요.”
“후월동 서점은… 그대로 있나요?”
여성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갔다.
“네… 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거기는 정리된 걸로 알아요.”
“아! 돌아가셨군요.”
이윽고 운아의 대답을 들은 손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자신이 중학생이던 시절부터 계절서점의 단골손님이었다고 했다. 학창 시절, 책을 보러 갈 때마다 늘 다정하게 반겨주던 석호의 아버지 덕분에 그녀의 기억 속 계절서점은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었다. 좋은 책으로 열심히 공부해 성인이 됐고, 결혼도 해 어엿한 자녀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후월동 사장님이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듣고는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운아의 눈가도 촉촉해졌다.
“돌아가셨구나… 그랬구나….”
그녀는 한동안 운아의 앞에서 같은 말을 되뇌며 눈물을 훔쳤다.
“미안해요. 너무 좋은 기억이라….”
자리를 한참이나 떠나지 못하던 여성이 이내 운아에게 미소로 얘기했다. 누군가에게 좋은 기억, 추억이 되어주는 가게는 어떤 곳인 걸까. 새삼 자신이 계절서점의 직원이 되었다는 사실이 뿌듯해진 운아였다. 그리고 열심히 창고에서 박스를 정리하고 있는 석호에게 고마워졌다. 서점이 정식 오픈을 하기 전부터 운아는 손님들을 만나며 실무를 배워나가고 있었다. 아직 낯선 업무 투성이지만 다시 일을 한다는 것에, 무엇보다 그곳이 서점이라는 것에 행복함을 느끼는 운아였다.
*
“어서 오세요-”
“대박, 너무 좋다! 생각보다 되게 큰데?”
“에세이 어딨어? 구경하자-”
3월의 어느 봄날, 신도시 선월동의 한적한 동네에 계절서점이 정식으로 오픈했다. 유난히 밝은 햇빛이 감싸고 있는 곳이었다. 손님들은 선월동의 자랑거리라며 서점 곳곳을 사진 찍어 SNS에 업로드하기도 했고, 운아 역시 즐거워하는 손님들을 보는 일에 행복감을 느꼈다.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매일 출근하며, 약 2만 권이 넘는 책을 정리하던 노고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오픈일자와 비슷하게 근처의 대단지 아파트에서도 입주를 시작하면서 이사 온 손님들까지도 하나 둘 방문하고 있었다. 석호와 운아가 같은 유니폼을 입은 채 카운터에서 고객을 응대하고, 북적이는 매장 분위기를 살폈다.
“혹시 도서 검색대도 있나요?”
손님의 물음에 얼른 대답하는 운아였다.
“찾으시는 책 있으시면 저희한테 말씀해 주시면 돼요!”
“결제 도와드릴까요?”
한쪽에서는 석호가 결제를 도맡았다.
“여기 책 할인도 되나요?”
“저희는 도서 정가이고, 5% 적립으로 들어갑니다. 회원가입하시겠어요?”
운아가 앞에 놓인 회원등록증을 건넸다.
“성함 하고 연락처만 적어주시면 가입 도와드릴게요!”
후월동 서점과 마찬가지로 이곳 역시 손님이 자신의 개인 정보를 적고 나면, 포인트가 적립되어 천 원 단위로 사용할 수 있었다. 손님의 물음에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열심히 하려는 운아를 석호는 기특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온라인으로 책을 보고, 주문을 하고, 배송까지 받을 수 있는 시대였지만 그랬기에 오히려 손님들은 책 냄새가 나는 계절서점을 좋아하는 듯했다. 인테리어가 너무 세련되었다며 들어올 때부터 놀란 반응들이 일색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점차 수요가 적어지는 오프라인 서점을 걱정하기도 했다.
“서점 일이 생각만큼 편하거나 쉽지는 않을 거야."
석호가 운아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권의 책이 서점에 들어와 서가에 꽂히기까지의 과정은 꽤나 복잡했으니까. 오픈 첫날, 정식으로 손님들을 맞이하면서 운아는 어렴풋이 석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
한 차례 북적이던 공간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텅 비자, 이내 서점 내부가 고요해졌다. 그리고 이어 영일이 카트를 끌며 매장으로 들어왔다.
“아우, 죽겠다! 여기 대박 나는 거 아녀? 손님들 바글바글하네-”
입고대에 책을 올려주며, 영일이 연신 하품을 했다. 어젯밤까지 미화네 바에서 밤새 술을 마신 영일이었다. 아름다울 미, 꽃 화. '꽃집'은 미화네 가게 이름이었다. 영일은 직원 한 명이 관두는 바람에 속도 안 좋은데 멀리까지 가야 된다며 급히 서점을 나섰다. 그런 영일의 뒤에 대고 인사를 건네는 운아와 석호였다.
다시 입고 작업이 시작됐다. 석호가 밴딩을 풀어 책을 올려주면 운아가 바코드를 찍었다.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손발이 잘 맞는 둘이었다.
“사장님, 책 한 권이 안온 것 같아요- 전표에는 있는데, 실물 책이 없어요.”
“이런. 김 부장 전화번호 알지? 전화해서 보내달라고 하자.”
석호는 자신이 모르는 부분에 대해 계속해 질문을 하는 운아에게 적극적으로 알려주었다. 간혹 표기된 책의 정가와 전표 내 금액이 맞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제 운아는 그런 일쯤이야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직원원이었다. 계절서점의 거래 총판은 대략 십여 개. 처음엔 책의 제목만 보고 서가를 찾는 게 어려웠지만 한 달 동안 매일 하면서 운아는 어느 정도 카테고리를 구분하고 있었다. 입고 작업을 마친 뒤, 카트에 책을 잔뜩 실은 채 서가를 돌기 시작하는 운아였다.
식사를 마치고 온 운아의 앞으로 책을 살피고 있는 석호와 노신사가 보였다. 어쩐지 심각해 보이는 분위기에 조용히 카운터로 들어오는 운아였다.
“난데, 책 인쇄가 잘못 돼있네. 손님이 구매했다가 다시 가져오셨어. 내일 반품 가져가, 그래.”
손님이 구매해 간 책은 파본도서인 듯했다. 석호가 영일과 통화하는 사이, 그의 옆에 선 운아와 노신사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운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듯했다. 이내 전화를 끊은 석호가 말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이거 내일 책 입고되는 대로 제가 편의점에 가져다 드릴게요.”
“아유, 괜찮아. 천천히 갖다 줘!”
미안해하는 석호에게 노신사는 되려 자신이 사가서 다행이라며 허허 웃어 보였다. 석호가 얼른 잘못 인쇄돼 있는 페이지를 눈에 띄게 표시해 두고는 반품을 잡았다. 그런 석호를 어깨너머로 보고 있는 운아를 향해 노신사가 물었다.
“근데 아가씨 나 기억 안 나는가?”
그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운아를 쳐다보았다. 석호가 운아와 손님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운아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여러 차례 눈을 깜빡이며 난감해하자, 이내 노신사가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 서점 단골이었자녀- 후월동서! 딱 보자마자 알아봤는디, 나를 기억 못혀?”
그의 말에 석호가 당황해 있는 운아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아, 선생님. 그 친구 아니에요. 새로 온 친구예요.”
석호의 말에 노신사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얘기를 이어갔다.
“아녀? 똑같이 생겼는디? 나 참, 이렇게 똑같이 생길 수가 있나? 내가 나이 먹었어도 한 번 보면 잊지를 몬하는디- 일부러 닮은 아가씨 뽑은 거 아녀? 그 아가씨는 어디 간겨?”
“다른 일 한다고 갔어요.”
그의 말에 웃어 보이는 석호가 어쩐지 씁쓸해 보이는 건 운아의 착각이었을까. 석호가 얼른 대화 주제를 돌렸다.
“아, 여기는 후월동에서부터 오랜 단골 선생님. 아버지랑도 막역한 사이셨어. 지금은 옆에 편의점에서 일하고 계시고.”
석호가 운아에게 봉석을 소개했다. 그제야 제대로 인사를 올리는 운아였다. 봉석은 그런 운아를 보며 계속해 ‘옛날의 그 아가씨’와 똑같이 생겼다며, 신기해했다. 운아는 자신이 '옛날의 그 아가씨'와 얼마나 닮은 걸까, 문득 궁금해졌다. 한참을 카운터에서 대화하는 사이 서점 문 사이로 앳된 남학생이 얼굴을 내밀었다.
“아, 할아버지! 여기 계시면 어떡해요!”
중학생 동하가 화가 난 듯 성큼성큼 걸어와 봉석의 옆에 섰다.
“제가 매장 이렇게 오래 비우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저 사장아저씨한테 할아버지 못 믿겠다고 말해요?”
동하가 씩씩대며 봉석을 나무랐다.
“아이, 손님도 없는데 뭐 어때서! 하여간 깐깐하네 그려.”
되려 큰 소리를 치던 봉석이 이내 서점을 나섰다. 알바를 마치고 다시 오겠다며 석호와 운아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는 봉석이었다.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봉석의 뒤를 동하가 쫓았다. 창 너머로 투닥이며 걸어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는 석호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아, 나도 편의점 좀 다녀올게. 우리 테이프 떨어졌더라.”
석호가 테이프를 사 오겠다며 서점을 나섰다. 봉석과 동하에게 같이 가자며 달려가는 그의 뒷모습에 운아의 시선이 꽤나 오래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