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운아 Sep 19. 2024

인연

06 석호와 운아


 정신없던 하루가 끝이 나고, 석호와 운아가 마감을 하기 위해 매장 정리를 시작했다. 운아는 곳곳을 돌아보며 어질러진 책을 다시 진열하였고, 석호는 카운터에 남아 다음 날 받아볼 책들을 주문하고 있었다. 

 책을 정리하던 운아가 국내소설 매대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서점에 진열된 수많은 책의 작가들이 새삼 대단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한때는 자신도 글을 쓰겠다며 하루종일 노트북 앞에 앉아있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비록 지금은 아니지만. 서점에서 일을 하며 다시 글을 쓰게 될 날이 올까? 행여 그날이 오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을 수 있을까.

 각자의 일로 조용한 가운데 카운터 위에 놓인 운아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멀리 있는 탓인지, 책 정리에 집중한 탓인지 운아는 벨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는 듯했다.

 “전화 오는데….”

 석호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한 운아였다. 그런 운아에게 핸드폰을 집어든 석호가 다가갔다. 자신의 핸드폰을 든 채 어느새 옆으로 와있는 석호를 보고는 운아가 화들짝 놀라며 얼른 전화벨을 껐다. 

 “받아도 돼.”

 그런 운아의 반응에 더 놀란 건 석호였다.

 자신이 있는 데서 사적인 전화를 받는 게 불편하다고 생각한 듯 석호가 이내 자리를 비켜주었다. 운아의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저녁을 먹고, 핸드폰을 진동으로 바꾼다는 걸 깜빡한 운아였다. 언제까지 인옥의 전화로 인해 가슴을 졸여야 할까, 문득 마음이 불안해졌다.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쓴 채 운아가 정리를 마무리했다.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고생 많았어요.”

 롱패딩을 주워 입은 선명이 서점을 나서다 말고, 자꾸만 매대에 머물렀다.

 “안 가고 뭐 하는 거야?”

 “아니, 왜 꼭 가려고만 하면 진열이 흐트러진 게 눈에 보이는 걸까요?”

 그런 선명의 말에 석호가 웃어 보였다.     


 “퇴근하겠습니다.”

 “고생 많았어요.”

 서점을 나서다 말고 입구에 놓인 매대를 정리하는 운아를 보며 석호는 선명을 떠올렸다. 어쩌면 운아를 직원으로 뽑은 건 그래서였다. 그녀에게서 보이는 선명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보고 싶어서. 석호가 작고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퇴근은 빨리 하는 거라며 이내 운아의 등을 떠밀었다. 

 “아, 잠깐만요!”

 갑자기 멈춰 뒤돌아 서는 바람에 석호의 가슴팍에 얼굴을 부딪히는 운아였다. 놀란 건 운아만이 아니었다. 

 “사장님 혹시 생일이 언제세요?”

 운아의 물음에 석호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     


 떠밀리듯 퇴근하는 운아를 보낸 뒤, 석호가 나머지 정리를 시작했다. 이건 분명 선명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이내 카운터 불을 끄는 석호의 핸드폰이 짧게 울리며 문자가 왔다.      


 [꽃집이다]     


 영일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석호가 이윽고 계절서점의 문을 닫았다.     


*     


 “그니까 이거를 먼저 누르고 바코드를 찍고….”

 카운터에 나란히 서 동하에게 인수인계를 받는 봉석이었다. 행동이 느린 봉석을 보며 동하가 답답하다는 듯 말을 끊었다.

 “아, 할아버지! 벌써 열 번째예요. 이거를 먼저 누르는 게 아니라 바코드를 찍고 난 다음이라니까요?”

 동하가 울기 직전인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기다려보라며, 머릿속에 익히고 있는 중이라는 봉석을 향해 동하는 무조건 메모하고 적어야 된다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다른 애들이면 십 분이면 되는 걸 할아버지는 한 시간째잖아요- 저 학원 가야 되는데!”

 그도 그럴 것이 한 시간이면 끝냈을 인수인계를 봉석은 벌써 한 달째 받는 중이었다. 학원 갈 시간이 늦었다며, 다 할아버지 때문이라고 투덜거리는 동하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천천히 순서를 익히는 봉석의 앞으로 미화가 다가왔다.

 “에쎄 체인지 1미리 하나 주세요-”

 봉석과 동하의 시선이 동시에 미화에게로 향했다.

 “왜 이렇게 성이 났어, 아가?”

 미화가 카드를 꽂으며 잔뜩 콧김을 내뿜고 있는 동하를 향해 웃어 보였다. 동하가 할아버지 때문에 학원도 못 가고 있다며 미화에게 이르듯 말하고는 상품의 바코드를 찍었다. 자연스레 담배를 건네는 동하를 막아선 건 봉석이었다.

 “신분증!”

 봉석이 미화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런 봉석을 보며 옆에 선 동하가 입술을 꽉 깨물어 보였다. 미화가 자신이 그렇게 어려 보이냐며, 기분 좋게 신분증을 건네자 봉석이 사진과 미화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체크했다. 그에게서 오케이 사인이 떨어진 뒤에야 미화는 비로소 편의점을 나설 수 있었다.

 “할아버지, 저 이모는 근처 가게 사장님이잖아요!”

 미화가 돌아간 뒤 동하가 답답하다는 듯 봉석에게 소리쳤다. 

 “담배 팔 때는 꼭 신분증 검사 하라매!”

 봉석도 지지 않고 큰 목소리를 냈다.

 “딱 봐도 미성년자가 아니면, 신분증 검사 하지 마시라니까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어!”

 동하가 이내 조끼를 벗고, 가방을 메며 말했다.

 “자주 오는 손님들은 얼굴 기억하셔야 돼요! 저 학원 갈 거니까, 이제 진짜 할아버지가 알아서 해요!”

 “예끼, 이놈! 가버려! 이랬다 저랬다 지랄이여, 지랄이! 니놈도 나이 들어봐! 나보다 빠른가, 쯧.”

 쿵쾅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편의점을 나서는 동하를 향해 봉석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시계를 보니 이미 퇴근시간이 훨씬 늦어버린 동하였다.

 “늦긴 늦었네….”

 봉석이 뛰어가는 동하의 뒷모습을 살폈다.     


*


 “어, 사장님-”

 이미 잔뜩 취한 영일이 멀리서 걸어오는 석호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앞에서 턱을 괸 채 석호를 같이 바라보는 미화의 표정을 보니, 꽤나 오랜 시간이 흐른 듯했다.

 “예린이가 뭐라 안 해? 틈만 나면 꽃집이야.”

 석호가 영일을 나무라며 자리에 앉자, 미화가 잔을 채워주었다.

 “매장 어땠어?”

 미화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술을 들이켜는 석호였다. 그가 생각이 많아지는 이유는 분명 선명 때문이었다. 이제는 충분히 잊었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직도 자신의 머릿속에 머물러있는 선명이었다. 그녀를 잊기 위해 동네를 옮겨 다시 서점을 차리고, 일을 시작했지만 선명은 자꾸만 더 짙어져 갔다. 차라리 남자직원을 뽑지 그랬냐며 잔뜩 혀가 꼬인 채로 영일이 타박했다. 

 “그냥 일만 해, 일!”

 선명 없이 혼자 하는 일이 처음이기 때문이라 거라며, 미화가 다시 석호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석호가 쓴웃음을 지으며 잘하고 있다고 맞받아쳤다. 그런 석호의 말에 질세라 입을 여는 영일이었다.

 “거봐, 내가 그 직원 일 잘할 거라 그랬지?”

 새로 안주를 내오며 영일의 옆에 놓인 점퍼를 치운 채 자리에 앉는 미화가 말을 거들었다.

 “운아씨? 참 착하고 순해 보이던데?”

 미화가 오징어다리를 집어 영일의 앞에 놓인 고추마요소스에 찍어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그러자 미화의 앞으로 다시 소스통을 놓아주는 영일이었다.

 “아직 어려서 그렇지, 뭐. 그래도 믿음이 가.”

 “사람은 겪어봐야 아는 거지.”

 미화의 말에 장난 섞인 눈빛으로 쳐다보는 영일이었다.

 “나는 니 처음부터 좋았는데-”

 그러자 콧소리를 내며 가잿눈을 뜬 채 미화가 영일을 쳐다봤다.

 “와이프도 있는 남자가 왜 이래? 도장부터 찍고 오든가- 그땐 내가 받아줄지 모르지만.”

 미화 역시 농담스러운 대답으로 영일의 장난을 맞받아쳤다.

 “아무튼 이제 니 가게야, 인마. 아버지 사업이 아니라! 앞으로 잘 될 일만 있을 거야, 우리 아버지 때랑은 세대가 또 다르잖아.” 

 사뭇 진지한 영일의 말을 거드는 미화였다.

 “그래, 우리 손님들도 벌써부터 서점 얘기 하더라니까?” 

 미화가 자연스레 오징어다리를 집어 영일의 입에 넣어주었다.

 “아, 이렇게 자꾸 훅 들어오지 마- 나 와이프 있는 남자야!”

 “뭐야, 이 오빠 왜 이래? 먹지 마, 먹지 마!”

 그런 영일의 말에 삐진 듯한 미화가 다시 오징어다리를 빼앗는 시늉을 보였다. 그런 둘의 장난을 보는 석호의 표정이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투닥임을 멈춘 건, 영일의 재킷에서 자꾸만 울리는 진동 때문이었다. 미화가 영일의 재킷을 들추자 이내 휴대폰 화면이 밝아지며 '와이프'라는 발신화면이 선명해졌다. 미화가 정신을 못 차리는 영일의 무릎을 두어 번 치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와이프 전화-”

 “뭐?”

 “와이프 전화!”

 또렷이 들리는 미화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는 영일이었다. 잠깐만 나갔다 오겠다며 영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린의 전화를 받기 위해 휘청이며 걸어가는 영일의 뒷모습을 보던 미화가 다시 자신의 잔에 양주를 가득 채워 들이켰다. 어쩐지 미화의 표정엔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듯했다.

 “벌써 가게?”

 외투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는 석호를 향해 미화가 물었다.

 “가야지. 형 오면 대리 잘 불러줘.”

 예린과 한참을 통화하던 영일이 걸어 나가는 석호를 발견하고는 소리쳤지만 그런 영일을 향해 그는 가만히 손만 흔들어 보일 뿐이었다. 집으로 향하는 석호의 발걸음은 어쩐지 무게가 실려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선명을 많이 떠올린 건, 운아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처음 일을 배우던 선명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었으니까. 자신이 운아를 보자마자 직원으로 뽑은 것도 선명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석호였다. 

 몸이 피곤했던 탓인지 석호는 씻지도 않은 채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그리고는 아주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버리는 석호였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상하게도 여름의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차가운 것 같지만 능숙하게 사람을 상대하는 석호의 모습이 자꾸만 생각나는 여름이었다. 가끔씩 옅게 웃어 보이는 표정은 유난히 부드럽게 느껴졌다. 걸어가는 내내 석호를 떠올리는 여름의 핸드폰이 또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여름이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아, 왜! 나 바쁜데, 왜 이렇게 전화해?”

 “그래, 미안해, 전화 안 할게.”

 인옥이 전화를 툭 끊어버렸다. 핸드폰은 잠시 조용해지겠지만, 어눌한 인옥의 말투를 듣는 여름의 마음은 안 좋아졌다. 앞으로 매일 서점으로 출근해야 하는 상황에 인옥의 전화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여름이 이내 인옥의 전화를 수신차단 목록에 넣었다. 당분간만 차단해 놓자고 생각하는 여름이었다.     


 “서여름- 서여름!”

 멀리서 겨울의 목소리가 들렸다. 막 택시에서 내린 겨울이 여름의 옆으로 달려왔다.

 “이제 퇴근해?”

 “응, 말도 마. 요즘은 주민센터에서 살고 집으로 출퇴근하는 것 같으니까. 오늘 어땠어? 사장은 어때? 일은 안 힘들어?”

 여름이 하나씩 물어보라며 겨울을 진정시켰다. 겨울은 석호에 대해 궁금해했다. 평소 자신의 개인적인 얘기를 전혀 하지 않는 여름이 서점 일을 시작한 뒤부터는 겨울에게 석호에 대한 얘기를 자주 하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조금씩 여름의 표정이 밝아지고 있는 걸 보니 겨울의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     

이전 17화 그랜드 오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