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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아 Sep 20. 2024

어색한 공기

07 영일과 미화


 [총판 들렀다 갈게, 오픈 좀 부탁해]     


 서점에도 여름의 풀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평소에는 여름이 출근하면 석호가 오픈 준비를 끝내놓았지만, 오늘은 석호 대신 여름이 매장을 오픈했다. 아직 한여름이 되기에는 이른 시기였지만 서점까지 걸어오는 데만도 벌써부터 숨이 차고 있었다. 사계절의 경계선이 점점 무너진다더니, 이제는 정말 봄과 가을이 사라지는 듯해 아쉬운 여름이었다.

 매장 문을 열자마자 환기를 시키고, 에어컨을 가동했다. 찬 기운이 돌 때까지는 지난밤 쌓였을 먼지를 털어내야 했다. 학생들이 학교에 가는 시간은 서점이 다소 한가한 편이었기에 여름은 여유롭게 매장을 돌며 청소를 할 수 있었다. 이내 청소함을 비우는 여름의 시선이 구겨진 사진 한 장에 가닿았다. 석호가 버린 선명의 사진이었다. 자신과 그토록 닮았다던 선명이었지만, 어쩐지 여름의 눈에 그녀의 얼굴은 밝고 예뻐 보였다.

 ‘이 사람이 전에 일하던 직원이었구나….’

 막상 선명의 사진을 보자 여름은 궁금한 게 많아졌다. 서점에서 얼마나 오래 일을 한 걸까, 석호와는 그저 직원 사이였을까.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여름이 마저 청소함을 비우고는 일어섰다.     


 “너무 거창하게 안 해도 돼. 큐레이션은 그냥, 매번 오시는 분들이 지루하지 않게 조금씩 다른 매대를 보여드리면 되는 거야.”

 큐레이션을 해보고 싶다던 운아에게 석호가 말한 적이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에 잠긴 운아가 되물었다.

 “블라인드북은요?”

 “블라인드북?”

 “저희가 추천하고 싶은 책들을 예쁘게 포장해 놓고, 해시태그로 몇 가지 힌트를 달아두는 거예요. 손님들은 그 힌트만 보고 내용을 유추하거나 읽어보고 싶은 책을 고르는 거죠!”

 “왜 그걸 하고 싶은데?”

 “음…. 아직까진 저희 서점 주 고객층은 학생 아니면 젊은 여성분들이더라고요. 성향을 고려하면 계절 큐레이션도 좋기는 하지만 블라인드북이 제격이지 않을까요?”

 운아의 말을 들은 석호 역시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때로는 색다른 것보다 무난하고 익숙한 것이 더 좋을 때가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앞에서 어떤 책을 고를지 벌써부터 신나 보이는 운아가 보였다.

 “그래, 그렇게 해보자. “     


 여름이 매장을 둘러보았다. 서가별로 자신이 인상 깊게 읽었거나 손님들이 자주 찾는 도서, 혹은 추천하고 싶은 책을 고르다 보니 족히 10권이 넘어갔다. 석호를 기다리며, 여름은 자신의 손글씨로 직접 책에 관한 힌트를 남겨보기로 했다. 어쩌면 사람도 책과 똑같지 않을까? 겉으로 보이는 몇 개의 힌트만으로는 그 책의 내용을 온전히 알 수 없는 것처럼 누군가의 인생을 전부 다 받아들이기 위해선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었다. 깨끗한 메모장 위로 여름의 손글씨가 담겼다.     


우리는 지금까지 자신이 가졌던 행복을 스스로 모르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지난 과거보다 지금 살고 있는 현재를 살아가세요.

그러다 보면 그 자리에 또 다른 미래가 찾아오더라고요.     


*     


 ”… 오늘은 일찍 들어와.”

 오늘도 예린은 출근하는 영일에게 잔소리를 했다. 아니, 영일이 받아들이기에 그랬다. 언제부턴가 영일은 그녀가 자신을 옭아매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대화가 즐겁지 않았고, 하나부터 열까지 부딪히면서 같은 공간에서 지내는 일조차 불편한 사이가 됐다. 함께 있을 때면 둘 사이의 공기가 어색하게 흘렀다. 분명 사랑해서 한 결혼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알아서 올게.”

 영일이 짧게 대답한 뒤, 한숨을 내쉬고는 집 밖을 나섰다.

 그런 영일의 뒷모습을 보며 예린은 붙잡을 의지조차 없는 듯 표정 없이 자리에 서있었다. 그저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 지쳐만 가던 영일과 예린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결혼 7년 차인 둘 사이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마음의 무게만큼 오늘따라 배송해야 할 책들이 유난히 많게 느껴지는 영일이었다. 답답한지 담배 한 개비를 문 영일에게 술 생각이 간절해졌다.

 손목을 다치든 말든, 대충 책 더미를 내리고는 한 손으로 카트를 끌며 배송지로 향했다. 시내에 있는 대형 서점 직원들은 일이 바빠서인지 영일을 본체만체하며 책을 나르기 바빴다. 이럴 때면 영일은 후월동 서점에서의 오랜 직원인 선명이 그립기도 했다. 웃는 모습이 참 예뻤던 아이, 늘 밝고 환하게 인사해 주던 선명이었다. 선월동 서점에 그녀를 닮은 새로운 친구가 들어왔다. 선명처럼 붙임성이 좋고, 착해 보이는 운아였다. 석호의 말처럼 사람은 오래 두고 볼 일이었지만. 덕분에 이곳을 방문할 때면 영일은 전처럼 마음이 편했다. 

 “안녕하세요!”

 “어어- 사장은?”

 “책 가지러 가셨어요.”

 서점을 방문했을 때, 석호는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한 총판에서 배송이 너무 많은 탓에 직접 픽업을 요청한 터였다. 영일은 석호가 올 때까지 서점에서 쉬며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땀이 비 오듯 흐르는 걸 보니 이제 여름이 왔나 보다, 생각하는 영일에게 운아가 시원한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어- 잘 마실게, 안 그래도 목말라서 혼났네.”

 운아가 건넨 커피를 마시고 나니 조금은 살 것도 같은 영일이었다.

 운아는 손님 없는 매장에서도 혼자 카운터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벌써부터 직원에게 매장을 맡기고 자리를 비우다니, 운아가 꽤나 일을 잘하는 모양이었다.

 “일은 어때, 좀 할 만해요?”

 “네. 재밌고 좋아요!”

 “서점 일이 잘 맞나 보네, 다행히. 사장이랑은 많이 친해졌고?”

 영일의 말에 운아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걔가 나이만 먹었지 숫기가 없어서 그래. 겉보기엔 그래도 속은 여린 놈이에요.”

 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사장님 어디쯤 오셨는지 연락 한 번 드려볼까요?”

 “아이- 놔둬요. 올 때 되면 오겠지, 뭐.”

 잠시 기대감에 반짝이던 운아의 눈빛이 금세 아쉬운 표정으로 변했다. 눈치 빠른 영일이 그런 운아의 모습을 놓칠 리 없었다. 장난기 어린 미소로 농담을 건네는 영일이었다.

 “왜, 내 핑계로 전화 한 번 하고 싶어서?”

 그런 영일의 말에 운아가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농담인데, 뭘 그렇게 놀래?”

 영일의 장난에 얼굴이 빨개지는 운아였다.     


*     


 “이런 것도 했어?”

 매장 곳곳을 돌아다니던 영일이 운아가 만들어둔 블라인드북 코너로 향했다. 책마다 예쁘게 포장해 둔 솜씨를 보며, 손재주가 좋다고 생각한 영일이었다. 어쩐지 석호가 운아에게 매장을 맡긴 채 자리를 비운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영일이 매대를 구경하는 사이, 멀리서 양손 가득 박스를 든 채 걸어오는 석호가 보였다. 그런 석호를 쳐다보는 운아의 표정이 밝아졌다.

 “사장님, 다녀오셨어요-”

 석호가 입고대에 박스를 얹고는 할 일 없이 매장을 돌아다니고 있는 영일을 쳐다봤다.

 “뭐지, 그 눈빛은? 왜 여기 있냐는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아 줘.”

 영일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뒤, 석호가 운아와 박스를 풀었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는 영일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운아씨, 주변에 괜찮은 언니 없어? 있으면 사장 소개 좀 시켜줘 봐- 얘 혼자 늙어 죽어!”

 그런 영일의 말에 운아가 당황한 듯 보이자, 석호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냐며 영일을 타박했다. 

 “뭐 어때, 운아씨보다 네다섯 살 정도만 많으면 딱이지. 연상도 괜찮잖아?”

 운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를 본 석호가 더 이상은 안 되겠던지 영일을 바래다주고 오겠다며 매장을 나섰다. 뒤돌아 손을 흔드는 영일에게 고개인사를 건네고는 다시 박스를 정리하기 시작하는 운아였다.     


*     


 쫓겨나듯 매장 밖으로 나온 영일이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문 채 술 한 잔 하자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요즘 들어 술자리가 부쩍 잦아졌다는 건, 그만큼 예린과의 사이도 더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쩌냐, 오늘은 가봐야 되는데. 아버지 기일이잖어.”

 석호의 말에 영일이 깜빡했다며 손등으로 이마를 훔쳤다. 선명 없이 처음으로 혼자 챙겨야 하는 아버지의 기일이었다. 같이 있어주겠다는 영일에게 고개를 저으며 씁쓸하게 웃어 보이는 석호였다. 오늘은 혼자 먹어야겠다는 영일을 마중한 뒤 석호가 계절서점으로 향했다. 

 “나 오늘 일이 있어서 먼저 좀 퇴근할게. 마무리만 부탁해.”

 “네, 들어가세요.”

 석호가 매장을 나서자 여름은 어쩐지 혼자 남겨진 느낌에 서운한 감정이 들어 기분이 이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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