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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아 Sep 21. 2024

낯선 여인

07 영일과 미화


 “매니저님-”

 직원들이 룸에서 다른 손님들과 함께 있던 미화를 불렀다. 영일이 왔다는 말에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지만 빠져나오기는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30분쯤 흘렀을까, 영일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미화가 향했을 땐 이미 잔뜩 술에 취해있는 그가 보였다. 

 “연락을 하고 오지, 오빠.”

 미화가 영일의 옆에 앉아 그의 빈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석호씨는 안 왔어?”

 영일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채 그저 술잔만 비울뿐이었다. 미화는 그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옆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그를 위로했다. 처음 그를 만나던 날, 그가 미화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와 처음 마주하던 그 순간부터 어쩌면 미화는 다른 감정을 느껴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네 원래 꿈은 뭐였는데?”

 “나? … 가수.”

 좋아하는 노래를 해보겠다며, 자신을 알아주는 기획사에 들어갔지만 쉬운 길은 아니었다. 남은 건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뿐이었던 미화가 도망치듯 외국으로 떠나버렸다. 돌아오지 않을 생각으로 아주 오랫동안.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이 하고 싶은 노래를 원 없이 부를 수 있는 바에서 일을 했다. 점점 사람들과 어울리며 술과 마약에만 의지하는 생활이 됐지만.

 그녀가 한국으로 돌아오던 때는 하나밖에 없는 가족인 엄마가 돌아가시던 날이었다. 이후 믿었던 친구에게까지 사기를 당하면서 미화는 삶의 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우울증으로 여러 차례 자살시도를 하기도 했지만 삶은 손쉽게 자신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죽지 못해 살아가던 미화가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지금 이곳, 바에서 영일을 만난 뒤부터였다. 앞에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자신을 무시하고 경멸하던 사람들의 시선과 달리 그는 자신을 인간적으로 대해주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손님에게 미화가 마음을 열었다.

 그런 영일 앞에서 혼자서도 눈물을 참았던 미화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런 그녀 옆에서 영일은 그저 아무 말 없이 함께 있어줄 뿐이었다. 미화가 자신의 이야기를 한 건 그게 마지막이었다.

 어쩌면 그 뒤로 그녀는 영일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가 예린과의 관계로 힘이 들 때에도, 일이 어려울 때에도 미화는 늘 그의 얘기를 들어주었다. 그게 미화가 영일을 사랑한 방식이었다. 영일 역시 그녀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지만, 둘 사이에 그어져 있는 보이지 않는 선을 넘을 수는 없었다.   

  

 힘들어하는 영일의 모습을 보는 미화의 마음이 아려왔다. 그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털어놓길 바라는 미화가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또 와이프야?”

 미화가 입에 물고 있던 담뱃재를 털어내자, 영일이 그런 미화의 손목을 잡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영일이 이내 미화와 눈을 맞췄다. 당황한 미화가 그의 손을 쳐내려 했지만 영일은 잡고 있는 손에 더 힘을 줄 뿐이었다.

 “놔, 아퍼. 왜 이래?” 

 미화가 인상을 쓴 채 다시 한번 손목을 빼내려 했을 때, 영일은 이미 그녀에게 입을 맞춘 뒤였다. 갑작스레 선을 넘어버린 영일로 인해 놀라 얼어버린 미화였다. 영일이 이성의 끈을 놓고 있었다. 여기서 멈춰야 했다. 미화가 자신을 달래며, 더 세게 다가오는 영일을 뿌리쳤다. 

 “정신 차려, 김영일! 너도 내가 우습니? … 이딴 건 니 와이프한테나 가서 해.”

 화가 나 자리에서 일어나는 미화를 영일이 다시 한번 붙잡았다. 그의 힘에 이끌려 주저앉은 미화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눈물을 보는 영일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손에 힘이 풀려버렸다.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미화가 방에서 뛰쳐나갔다. 혼자 남겨진 영일의 동공이 공허한 듯 흔들렸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미화는 지금 자신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자존심이 상하는 건지, 그 순간에도 자신은 왜 그의 와이프를 떠올린 건지. 모든 걸 다 알면서도 그를 밀쳐내기가 왜 그렇게 어려웠던 건지…. 밖에는 한여름의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많은 감정이 교차하는지 미화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뒤늦게 영일이 미화를 쫓아 나왔지만, 미화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급히 택시를 잡아탔다. 영일이 머리를 감싼 채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여태 잘 참아왔는데 술기운에 대체 왜 그런 행동을 한 건지 죄책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자신의 신경은 예린이 아닌 미화에게 가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렇게 소나기가 그칠 때까지 한참을 멈춰있던 영일이었다.     


*     


 그날, 석호는 집에서 단출하게 아버지의 기일을 챙겼다. 사람이 한 명 없을 뿐인데도 작년까지 매년 함께였던지라 그녀의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늘 석호를 챙겨준 건 선명이었다. 그가 휴대폰을 들어 선명의 번호를 찍고는 끝내 한숨과 함께 '삭제' 버튼을 눌렀다.    

 

사랑은 늘 한 순간에 찾아오죠, 마치 소나기처럼 말이에요.

만일 우산 없이 소나기를 만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비어있던 블라인드북 한 권을 마저 채우고 난 여름이 마감 정리를 시작했다. 석호가 매장을 나선 뒤부터 어쩐지 내내 기분이 좋지 않은 여름이었다. 그 이유가 뭘까, 문을 닫고 서점을 나서는 여름의 머리 위로 한 두 방울 소나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름은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자신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었는지. 아무런 이유 없이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왜였을까…. 소나기가 내리기 전 얼른 집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지만, 우산조차 없던 여름은 걸음을 멈춰버렸다.     


*


 “지금이 몇 시야?”

 0889. 아무런 의미 없는 숫자 네 자리를 누르고 집으로 들어갔을 땐, 거실 소파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예린이 보였다. 비를 쫄딱 맞은 채로 들어서는 영일을 보며 예린의 눈이 커졌다. 영일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목을 조르고 있던 넥타이를 풀었다.

 “왜, 또. 오늘 늦는다고 했잖아.”

 “… 술 마셨니?”

 귓가를 울리는 예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엔 온통 자신의 앞에 선 예린이 아닌, 경멸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던 미화가 맴돌고 있었다. 영일이 예린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은 채 곧장 침실로 향했다. 

 “이제는 사람 취급도 안 하니…?”

 예린이 두 눈에 독기를 가득 품은 채 그의 뒤를 쫓았다. 재킷을 벗고 있던 영일을 끌어당겨 강제로 입을 맞추는 예린이었다. 영일이 아무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그대로 밀쳐졌다. 더 이상 저항할 의지조차 없는 영일이었다. 예린이 작정한 듯 영일의 몸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마치 너와 나는 끝난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라고 하려는 듯이. 그리고 그런 예린을 향해 영일은 아무런 저항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절대 들켜서는 안 됐으니까. 예린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지켜보는 영일의 마음이 아파왔다. 사실은 그 이유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지만 상황이 달라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온몸이 쑤시고 아파 잠에서 깬 영일이었다. 그가 눈을 떴을 땐, 자신의 옆에서 이불만 덮은 채 잠들어있는 예린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도 영일은 어젯밤 울던 미화의 모습이 생각나 괴로웠다. 

 영일이 자리에서 일어나 옷도 챙겨 입지 않은 채 방을 나섰다. 그리고 그의 뒷모습을 본 예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자신의 지난밤 행동은 그에게 자신을 봐달라고 발버둥 치던 그녀의 외침이었다.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느낌은 더 이상 슬프지 않았다. 이제 예린에게 남은 건 그저 화가 나고 분한 감정뿐이었다.

 어젯밤, 예린은 잠든 영일의 옷과 휴대전화를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그의 지갑에서 미화네 가게 영수증을 확인했다. 심증이 물증이 되는 순간, 예린의 손이 떨려왔다. 이윽고 영일의 잠꼬대 소리가 들렸다. 미화의 이름을 부르고 있던 내 남편의 목소리…. 입술을 깨문 예린의 입 안에서 비릿한 냄새가 퍼져 나왔다. 

 노력하면 다시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영일의 냉정한 태도는 그저 일이 힘들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멀어진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 거라 확신한 예린이었다. 그런데 그런 예린의 믿음이 어젯밤 전부 산산조각 나버렸다. 그녀의 마음엔 증오의 뼈대만 남겨지고 있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건, 망가뜨린 건 영일이었다.     

*     


 일찌감치 잠에서 깬 미화였다. 사실은 자꾸만 눈물이 흐르는 탓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어젯밤, 영일의 행동으로 인해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그와 입을 맞추던 순간, 자신도 그를 받아들이고 싶었으니까. 한편으론 밤새 연락 한 통 없는 영일을 원망하는 마음도 있었다. 잠시 멈춰있던 눈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비를 맞은 탓인지 몸이 무거워 일어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한참을 누워있던 미화의 휴대폰이 울렸다. 

 “어, 오빠. 나 몸이 안 좋아서…. 늦게라도 나가야지. 그래, 이따 봐.”

 미화를 찾는 다른 손님이었다. 그대로 누워있을 수만은 없었다. 미화가 힘겹게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배송을 하다 말고 영일이 미화네 가게 앞에 차를 세웠다. 닫힌 문을 가만히 바라보며 한참을 있었지만, 미화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이 됐지만 차마 연락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끝내 차를 돌려 영일이 다른 배송지로 향했다.     


*     


 석호가 일찍 매장에 나와 운아가 만들어둔 블라인드북을 살폈다. 그중에서도 어젯밤 마지막으로 완성한 책이 유독 눈에 띄었다. 반듯하게 쓰인 운아의 손글씨는 평소 그녀의 정직한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잘했네.”

 석호가 혼잣말로 읊조리고는 운아의 첫 매대를 사진에 담았다. 선명과 함께 일할 때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큐레이션이었다. 한 사람이 간 자리에 다른 사람이 오니 또 다른 서점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자신이 찍은 사진을 살피는 석호의 뒤로 운아의 목소리가 들렀다. 

 “안녕하세요.”

 어젯밤 혼자 오랫동안 일한 운아가 내심 마음 쓰였던 석호였다.

 “늦게 출근해도 된다니까.”

 그런 석호의 말에 운아의 표정이 어쩐지 굳어져있었다.

 “오늘 총판 어디 들려야 하지?”

 출근 전 석호는 미용실에 들른 듯했다. 짧아진 그의 머리를 본 운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지금 자신의 심장이 뛰는 건 그의 낯선 머리가 어색해서인지, 그에 대한 마음을 알게 돼서인지 모를 일이었다. 운아가 뜨거워진 자신의 얼굴이 들킬까 석호와 시선을 맞추지 못한 채 달력을 들추었다.

 “오늘 정독이랑 선림당은 문 앞에 놔주신다고 하셨고, 예명은 내일도 배송 오신다고 오늘 주문 넣어달라세요.”

 자신과 시선도 맞추지 않은 채 말하는 운아가 어쩐지 이상하게 느껴지는 석호였다. 운아는 석호를 쳐다도 보지 않고, 바로 매대 정리를 시작했다. 가지런히 정돈된 책들을 괜히 한 번씩 더 정리하는 운아를 보며, 석호가 다녀오겠다는 말을 건넸다. 자신에게 서운한 게 있는 건지, 혹시 어제 일찍 퇴근한 탓인지 괜히 그런 운아가 신경 쓰이는 석호였다. 

 “… 저, 사장님!”

 운아가 카트를 챙겨 서점을 나서려는 석호를 불러 세웠다. 갑작스러운 운아의 부름에 놀란 석호가 뒤를 돌아보았다. 무언가 말을 할 듯 우물쭈물하던 운아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 몇 시에 오세요?”

 “픽업 갔다가 바로 와야지. 두 군데 들리면 두세 시간 걸릴 것 같은데, 왜?”

 “저 그럼… 오늘 치맥 사주세요!”

 운아가 용기를 냈다.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석호는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알았다고 하며 서점을 나섰다. 뒤돌아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는 운아의 입가에 미소가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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