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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아 Sep 22. 2024

두 여자

07 영일과 미화


 창문을 활짝 연다는 건, 먼지를 바깥으로 내보낸다는 것이었다. 운아가 매장을 돌아다니며 책장에 쌓인 먼지를 털어냈다. 책을 진열하지 않는 책장의 위쪽은 손이 잘 닿지 않는 터라 조금만 신경을 못써주면 금방 뽀얀 먼지가 쌓이는 듯했다. 운아가 간이의자를 가져와 올랐다. 발 뒤꿈치를 들어야 겨우 손이 닿는 높이였다. 

 그런 운아의 뒤로 또각거리는 구두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는 이내 서점 앞에서 멈추었다.

 “실례합니다.”

 운아가 손으로 코 앞을 휘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네, 어서 오세요!”

 빨간 립스틱에 빨간 구두, 선글라스와 검은 정장을 입은 여자였다. 어쩐지 우아하고 당당해 보이는 모습에 운아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혹시 강석호 사장님 계시나요?”

 석호를 찾는 낯선 여자의 모습에 운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금 자리 비우셨는데… 연락 남겨드릴까요?”

 “아니요.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 온 거라, 그러실 필요까진 없어요.”

 들어와 기다리라는 운아의 말에 여자는 괜찮다며 손을 들어 보인 채, 가만히 서점 곳곳을 들여다보았다. 저 여자는 누구길래 석호를 찾는 걸까.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얼굴이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사진으로만 봤던 선명은 아닌 듯했다. 괜히 기분이 좋지 않은 운아가 그녀를 뒤로한 채 청소를 이어했다.

 “여기 직원 분이시죠?”

 운아가 뒤를 돌아보자, 이윽고 그녀가 선글라스를 벗어 운아와 눈을 마주쳤다. 

 “여기 근처에 꽃집이 있나요?”

 ‘… 꽃집?’

 생기 없이 퉁퉁 부은 눈으로 꽃집을 찾는 예린이었다.     


*     


 미화가 가게로 향했다. 영업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지만, 집에 누워만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미화가 따뜻한 물을 데워 미숫가루 한 잔을 타 마셨다. 날이 더웠지만 어쩐지 한기가 돌고 있었다. 속이 따뜻해지면서 몸에 힘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얼핏 영일이 계설저점에 배송할 시간인 듯했다. 잠시 고민하던 미화가 시원한 미숫가루 세 잔을 준비했다. 

 “운아씨- 석호 씨 없네?”

 미화가 가져온 미숫가루 세 잔을 카운터에 올려두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석호를 찾는 미화였다. 안 그래도 입맛이 없어 빈 속으로 출근한 운아가 미숫가루를 들었다. 든든하게 마시라며, 오늘은 특히 더 맛있을 거라며 말을 건네는 미화였지만 어쩐지 조금 야위어보이는 미화였다. 손님이 있는 것을 본 미화가 목소리를 낮췄다.

 “… 영일 씨도 아직 안온거지?”

 환한 웃음을 거두며 운아에게 묻는 미화였다. 그리고 한쪽에 서있던 예린이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영일도 아직 안 왔다는 운아의 말에 미화는 알겠다며 서점을 나섰다. 오늘따라 두 남자를 찾는 여자들이 많다고 생각한 운아의 미간이 희미하게 찌푸려졌다. 

 여기서 조금만 더 있다가 가면 혹시라도 영일과 마주치지는 않을까, 미화가 서점 밖으로 나와 담뱃불을 켰다. 그리고 그런 미화를 예린은 멀리서 팔짱 낀 채 지켜보고 있었다. 끝내 축 처진 어깨를 하고 다시 매장으로 향하는 미화의 뒤를 쫓아가는 예린이었다. 운아가 남은 미숫가루 두 잔을 냉장고에 보관하는 사이 예린은 말없이 서점을 나서고 있었다.      


 “다녀오셨어요?”

 카트에 한가득 문제집을 싣고 온 석호가 서점으로 들어왔다. 입고대에 책을 내려둔 뒤, 날이 더운 듯 석호가 냉장문을 열었다. 운아가 얼른 미숫가루를 꺼내 차가운 얼음을 띄워 석호에게 건넸다.

 “고마워.”

 “미화언니가 가져다주셨어요.”

 석호가 미숫가루를 시원하게 들이켜자, 어느새 그 뒤로 들어오는 영일이었다.

 “왔어?”

 “안녕하세요-”

 오늘도 운아는 영일을 향해 여느 때처럼 밝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오늘따라 영일은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자신의 할 일을 이어나갔다. 운아가 건넨 미숫가루를 본 영일의 표정이 굳어졌다.

 “안 마셔?”

 “… 이따 술이나 한잔 해.”

 미숫가루에는 손도 대지 않는 영일을 보며, 운아와 석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마주쳤다. 

 “오늘은 안돼. 내일.”

 석호는 저녁에 운아에게 치맥을 사주기로 한 터였다. 말없이 손을 흔들며 돌아가는 영일의 뒷모습을 본 운아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아, 근데 이 근처에 꽃집이 있어요?”

 운아가 석호에게 물었다. 

 “있잖아, 미화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운아였다. 미화네 가게를 두 남자는 '꽃집'이라 일컫고 있었다. 운아가 아까 어떤 여자가 찾아와 꽃집을 찾았다는 얘기를 들은 석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 순간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적으로 파악하는 석호였다. 석호는 신호음만 계속해 울리는 전화를 끊지 않고 붙들고 있었다. 영일이 운전 중인지 전화를 받지 않자 다급해진 석호는 이내 전화기를 내려둔 채, 매장을 나섰다.

 “나 어디 좀 다녀올게.”     


*


 “언니, 일찍 오셨네요-”

 “컨디션 나아지셨어요?”

 미화가 서점에서 매장으로 돌아왔을 땐, 막 출근 준비를 마친 직원들이 보였다. 그녀들은 어젯밤, 말없이 사라진 미화를 걱정하는 눈치였다. 

 “내가 누구니? 나 홍미화야!”

 미화가 되려 더 밝게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활기차게 얼른 영업 준비를 시작하자는 미화의 뒤로 다시 매장 문이 열렸다. 한 여성이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직원들이 아직 영업 전이라며 안내했지만, 그녀는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서 매장을 훑어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미화를 보는 그녀였다.

 “… 여기가 꽃집이구나.”

 꽃집, 영일과 석호만 알고 있는 단어가 낯선 여자의 입에서 나오자 미화의 등이 찌릿해졌다. 미화가 천천히 등을 돌려 자신의 뒤에 선 그녀를 마주 보자 이윽고 선글라스를 벗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두 눈에 독기를 한가득 품고 있었다. 미화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방금 전 서점에서 본 여자라는 것을.

 “홍미화라는 사람이 누구죠?”

 미화와 정확하게 눈을 마주치며 묻는 예린이었다. 미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전데….”

 미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매장 곳곳에서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예린이 미화의 머리칼을 한 움큼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아귀에 이끌려 휘청이다 이내 바닥에 주저앉아버리는 미화였다. 지금 미화가 눈물을 흘리는 건 그렇게 당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신세가 한탄스럽기 때문일 것이었다. 자신이 그의 와이프였다 해도 그랬을 테니까.

 “네 년이 다 망친 거야, 이 썅년!”

 예린의 입에서 험한 말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이러지 마세요! 왜 이러세요, 경찰 불러 얼른!”

 직원들이 예린을 뜯어말리며 미화와 떨어뜨려 놓으려 했지만, 예린은 더 크게 울부짖을 뿐이었다.

 “니 년 때문에 내가 무너져버렸어. 죽어버려!”

 미화는 말없이 맞으며 울고만 있었지만, 사실은 억울했다. 영일과 잠을 잔 것도 아니었고, 그저 실수로 한 입맞춤이 전부였다. 물론 유부남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상대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는 게 잘못이라면 죗값을 치러야겠지만.

 
  “뭐 하는 짓이야!”

 가게 문이 벌컥 열리자 예린의 손이 멈췄다. 

 영일이 성큼성큼 들어와 예린의 손을 낚아채자, 손바닥에서 한 움큼 뽑혀있는 미화의 머리칼이 보였다. 처음 보는 예린의 날카로운 표정이었다. 영일을 쳐다보는 예린의 눈빛에 살기 어린 미소가 번지자 당황한 듯 영일의 동공이 흔들렸다. 예린이 바닥에 쓰러져있는 미화를 향해 소리쳤다.

 “… 이 여자 구하러 달려왔니? 네가 그새 이이한테 전화로 고자질한 거야?”

 “그만해!”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영일이 화를 삼키며, 미화를 일으켰다. 자신의 손을 내치고 미화를 부축하는 영일을 보며 예린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 한예린, 너… 집 가서 얘기해. 얘 좀 병원에…”

 영일이 직원들에게 미화를 맡겼다. 그 모습을 본 예린은 헛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미쳤어, 당신? 지금 누굴 챙겨?”

 “병원부터, 얼른!”

 한숨을 내쉬며 예린을 쳐다보는 영일의 눈에 초점이 없어졌다. 더 이상 큰소리를 내기 싫은 듯 예린의 손목을 잡은 채 가게 밖으로 나서려 했지만, 예린은 있는 힘껏 손목을 뿌리쳤다. 악에 바친 듯한 예린은 떨고 있었다. 자신의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 영일에게 던졌고, 영일의 얼굴은 날카로운 모서리에 베여 새빨간 피가 고였다. 이윽고 바닥에 떨어진 사진을 보는 영일이 화들짝 놀랐다. 초음파 사진이었다.

 “…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니?”

 영일의 몸이 굳어졌다. 뒤이어 도착한 석호가 엉망이 된 몰골로 부축되어 매장을 나서던 미화를 챙겼다. 참을 수 없을 만큼의 눈물을 흘리며, 악에 바친 목소리로 소리치는 예린이었다.

 “3개월 됐어. 내가 그동안 너한테 얼마나 얘기를 해주려고… 근데 왜 그렇게 내 얘기를 안 들어줬니? 저 년 때문에 날 그렇게 혼자 내버려 뒀어!”

 영일의 손에 힘이 빠졌다. 예린은 말을 이어가면서도 배를 움켜쥐며, 고통을 참는 듯했다. 가만히 보고만 있는 영일을 보며 예린이 천천히 가게 문으로 향했다.

 “… 너네 둘, 가만 안 둘 거야. 내가 천벌 받게 할 거야.”

 쾅, 하고 문이 닫히며 예린이 모습을 감추었다. 적막감이 흐르는 가게 안에서 직원들은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고, 영일은 예린이 던져버리고 간 초음파 사진을 주워보았다.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그리고 그런 영일의 모습을 보는 미화의 가슴이 쓰라렸다.     


*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해가 저물어갈 무렵에도 석호는 매장에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한 차례 몰렸던 손님들이 전부 돌아간 뒤 운아가 중간 정산을 할 때까지도 그녀의 핸드폰은 울리지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걱정이 되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석호의 전화만 기다리던 운아의 핸드폰이 울렸다. 처음 보는 낯선 번호였다. 끝내 기다리던 석호의 전화가 오지 않자 운아의 표정에 실망감이 비췄다. 한숨을 내쉬며 검색한 번호는 서울의 한 공중전화였다. 아마도 상옥일 것이라는 생각에 받고 싶지 않은 운아였다. 아니, 받아서는 안 되는 전화였다. 자꾸만 쌓여가는 부재중 전화에 운아의 숨통이 조여왔다.

 그리고 그날, 석호는 매장 문을 닫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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