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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아 Sep 23. 2024

사랑에 정답이 있을까

07 영일과 미화


 며칠간 입원해 있으라던 의사의 말을 뒤로한 채, 미화는 집으로 향했다.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버린 터라 몸이 아픈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불도 켜지 않은 채 혼자서 독주를 들이켜는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미화가 신경질적으로 닦아내며, 마지막으로 남은 담배 한 개비를 물어 불을 붙였다. 작게나마 남아있던 희망이 담뱃재와 함께 짓이겨졌다.     


*     


 시간은 새벽 두 시를 넘어가고 있었지만 영일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거실 소파에 앉아 마냥 그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는 예린이었다. 핸드폰을 껐다 켜길 반복하면서도 차마 연락을 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그대로 자리를 떴음에도 아무런 걱정조차 하지 않는 영일이 원망스러웠다. 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걸까, 문득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설마 아직도 미화와 함께 있는 건 아닐까, 혹시 그녀를 데리고 아예 집을 나가버린 건 아닐까. 많은 생각이 들자 서러운 감정에 눈물이 흘렀다.

 그토록 바라던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예린은 진작 알고 있었다. 못 먹는 음식이 많아졌고, 그와 밥을 먹다가도 심한 입덧 탓에 화장실로 달려가던 예린이었다. 하혈이 심할 때도 혼자 병원을 다녀온 그녀를 늘 외롭게 두던 영일이었다. 그런 그에게 예린이 바란 건 그저 대화할 수 있는 시간뿐이었지만, 끝내 그는 그녀를 외면했다.

 지금 눈물이 흐르는 이유는 12년 동안 기다려왔던 임신 사실을 알고도 영일이 기뻐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런 그의 태도에 자신뿐 아니라 태어날 아이까지도 받게 될 상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     


 “도착했습니다.”

 석호가 대리비를 지불하고, 잔뜩 취해있는 영일을 부축했다. 몸도 가누지 못하는 그를 보며, 석호는 마음이 쓰라렸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됐는지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사람의 마음이 어쩔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멀리 오게 된 상황이 그저 안타깝기만 했다. 

 석호가 영일을 소파에 눕힌 뒤 거실로 가 식탁 위에 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불편한 자세로 잔뜩 인상을 쓴 채 잠들어있는 그의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영일에게 얇은 이불을 덮어주는 석호였다. 잠시 바닥에 앉아 숨을 고르는 석호의 머릿속에 문득 운아와의 약속이 떠올랐다.     


 “오늘 저녁에 치맥 사주세요!”     


 급히 시계를 보니 이미 매장 문을 닫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깜짝 놀란 석호가 바로 매장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한참이나 통화연결음만 들린 채 운아는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다 운아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거는 석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미안해, 자나보다. 일이 있어서. 진작 연락해 줬어야 되는데, 정신이 없었어.]     


 이윽고 문자를 입력하던 석호의 손가락이 멈췄다.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고 있었다는 걸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아닌 척하면서도 자꾸만 동요하는 마음을 애써 모른 척해왔다는 걸. 그럼에도 감정을 억눌렀던 건 같은 일을 두 번 반복해 또 다른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외면했던 마음조차 잊어버릴 만큼 운아에 대한 걱정과 미안한 감정이 앞서버렸다.     


*     


 “충남 서산이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몰골로 시외버스 티켓을 구매하는 미화였다. 이곳에서 어떻게 더 이상 장사를 할 수 있을까. 그보다 한 가정을 파탄 내버린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나 있을까.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숨 쉴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었으니까.

 그녀의 머릿속에선 어젯밤 예린이 가게를 나선 뒤 한참을 멍하니 자리에 서있던 영일의 모습만 반복해 생각이 났다. 그에게 아이가 생겼다고 했다. 내 아이가 아닌, 와이프의 아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뱃속의 아기에게 미안한 감정부터 들었다. 기회만 준다면 예린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사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잠깐이었지만 남편에게 마음을 주어서 미안하다고, 그와 사랑을 나눌 뻔했던 자신을 용서하라고. 버스를 기다리는 미화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뒤이어 버스가 도착하자 미화는 핸드폰을 꺼버린 채 버스에 올랐다. 이렇게 무책임하게 떠나버리는 자신을 용서하라고 속으로 빌고 또 빌면서.

 얼굴 위로 쏟아지는 햇빛에 영일이 몸을 일으켰다. 잠기운이 깨면서 두통이 심해지는 탓에 다시 그대로 누워버리는 영일이었다. 그토록 바라던 아이가 생겼는데 왜 마냥 기쁘지만은 않을 걸까. 그런 자신이 싫었다. 왜 하필 모든 걸 포기해 버린 지금인지, 어쩌다 이런 타이밍이 된 건지 영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윽고 입술을 꽉 깨무는 영일이었다.

 방에서 잠이 들었던 석호 역시 눈부신 햇살에 눈을 뜨지 못한 채 손으로 주변을 훑었다. 운아에게 문자를 보낸 뒤, 연락을 기다리다 그대로 잠들어버린 석호였다. 아무런 답장도 와있지 않은 것을 확인한 석호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실로 나온 석호의 눈에 뒤돌아 누워있는 그가 보였다. 그의 어깨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석호가 부엌으로 향했다.     

 

*     


 오늘따라 평소보다 일찍 출근을 한 운아였다. 일찍 눈이 떠졌지만 일어나자마자 석호가 남겨둔 문자에 가슴이 설레어 더 깊은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운아는 석호가 보낸 문자를 몇 번이고 계속해 챙겨보았다.     


 [내일은 내가 꼭 밥 사줄게]     


 미리 포장해 둔 선물을 가방에 챙겨 넣는 운아였다. 설레는 표정으로 환하게 웃어 보이는 운아의 뒤로 매장 전화벨이 울렸다.

 “네, 계절서점입니다.”

 수화기 건너로 짧은 정적의 순간이 흘렀다.

 “… 운아씨, 나야.”

 미화였다. 운아는 갑작스레 고향으로 내려가게 되었다는 미화의 소식에 다소 놀란 듯 보였다. 어쩐지 힘없이 무겁게 가라앉은 미화의 목소리에 운아는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레 되물었지만 그녀에게선 아무 일도 없다는 답변만 되돌아올 뿐이었다. 미화는 당분간 휴식을 취하고 싶다고 했다. 돌아올 계획이 없다는 그녀의 말에 운아는 잘 지내라며 아쉬움을 내비쳤다. 

 “그러게. 그래도 몇 달간 정들었는데, 아쉽네….”

 미화는 석호와 영일에게도 안부를 전해달라고 했다. 혹시나 자신의 빈자리가 크다면 종종 연락을 달라는 미화였다. 그런 미화에게 운아는 한 가지 이야기를 더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운아의 말에 미화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축하해. 석호씨지?”

 이미 다 눈치채고 있었다는 듯 미화가 말하자, 그제야 운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서 서점으로 뒤늦게 출근하는 석호의 모습이 보이자 운아의 입가에 참을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양반은 아니네, 강석호- 끊어, 운아씨.”

 눈치 빠른 미화가 전화를 끊음과 동시에 석호가 운아의 앞에 섰다. 운아와 마주 선 석호는 숨을 가쁘게 내쉬고 있었다. 자신이 왜 그렇게 부랴부랴 다급하게 서점으로 향했는지 조금의 이유를 알 것도 같은 석호였다.     

*


 석호가 차려준 아침을 뜨는 둥 마는 둥 한 채 영일이 집으로 향했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으로 들어가자, 그의 눈에 예린이 싸놓은 짐더미가 보였다. 방에선 예린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은 채 어떠한 인기척도 내지 않고 있었다.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아무런 말 없이 외투를 벗는 영일의 귓가에 힘없는 예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 그 년이랑 자고 왔니?”

 영일은 더 이상 하고 싶은 말이 없는 듯 대답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게 맞았을 것이다. 분명 미안함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바뀔 수 있는 건 없었다. 옷장에서 갈아입을 옷을 꺼내는 영일을 예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쳐다봤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는 초점 없이 멍해있었고, 혈색이 돌지 않아 하얗다 못해 사색이 돼있는 얼굴이었다.

 “… 내가 나갈게.”

 영일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그게 전부였다. 얼마 있지도 않은 자신의 옷더미를 챙겨 방을 나가는 영일의 뒷모습을 보며 예린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고, 끝내 동공이 흔들렸다.

 “… 고작 그거야?”

 분노를 참는 예린의 목소리에 영일이 발길을 멈췄다. 

 “이따위로 만들어놓고 어딜 가!”

 주변에 잡히는 모든 물건을 집어 영일을 향해 던지는 예린이었다. 가만히 서서 맞고만 있는 영일을 보며 예린은 더욱 화를 냈다. 왜 자신만 분한 건지, 가장 큰 축복의 순간에 이렇게까지 힘들어야 하는 건지 울분이 터지는 그녀였다.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르는 예린을 영일은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다. 예린이 서글프게 울기 시작했고, 영일 역시 눈물이 흘렀다. 어쩌면 어긋난 버린 타이밍이 이들을 그렇게 만든 건 아니었을까. 이내 영일이 짐가방을 든 채 집을 나가려 하자 예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게 나가기만 해. 여기서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현관문 손잡이를 잡던 영일이 굳어버렸다. 예린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간절함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평생 나 떠나지 마, 김영일. 두고두고 후회하면서 살아. 나한테, 내 새끼한테…. 평생 사죄하면서 지옥처럼 살아.”

 한참을 제 자리에 서있던 영일이 이내 발길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예린과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래. 내가 작은 방 쓸게.”

 예린이 하라는 대로,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영일이었다. 모든 삶의 의욕이 사라져 버린 듯한 표정으로 각방을 쓰자는 영일의 말에 예린은 가슴이 아파 아무런 말도 이어가지 않았다. 작은 방으로 들어온 영일 역시 가슴이 미어진 건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에도 예린의 걱정보다, 태어날 자신의 아이보다, 미화가 먼저 생각나는 영일이었으니까.

 작은 방으로 들어온 영일 역시 끝내 억눌렀던 감정을 터뜨렸다. 그렇게 끝나버린 미화에게 연락을 하고 싶었지만 차마 통화 버튼을 누를 수 없었다. 지금은 괜찮아진 걸까, 상태는 어떨까, 혹시 너무 크게 다쳐버린 건 아닐까 하는 수만 가지 생각이 영일의 머릿속을 괴롭혔다. 바닥에 주저앉아 가슴을 치는 영일을 보며 예린이 눈물을 닦아 보였다.     


*     


 그리고 그날, 석호와 운아는 약속대로 서점 문을 닫은 뒤 근처 맥주집으로 향했다. 어쩐지 다른 때보다도 긴장한 듯한 석호의 모습에 운아의 표정에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면접을 보던 날부터 여러 번의 식사자리를 가졌지만 오늘만큼은 전혀 다른 새로운 느낌이었다. 가게 직원이 다가와 마감하겠다는 말을 전할 때까지 둘은 끊임없는 얘기를 나누었다. 주로 말하는 쪽은 운아였고, 듣는 쪽은 석호였다. 그 시간 동안 지금까지는 알지 못했던 서로의 모습을 알아갔고, 감정을 공유했다.     


 “너무 늦었다. 가자, 데려다줄게.”

 석호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 운아의 모든 신경이 반응했다. 감정이 요동치기 시작한 운아였다. 갑작스럽거나 신중하지 못한 감정은 아니었기에, 집으로 향하는 내내 발걸음은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집 앞에 다다른 운아가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석호에게 건넸다.

 “사장님, 선물이에요.”

 어느 때보다도 정성스레 포장한 듯 보이는 선물이었다. 표지에는 운아의 손글씨로 책의 한 구절이 적혀있었다. 서점을 운영하는 사람에게 책을 선물하다니, 석호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 운아의 순수함이 귀엽게 느껴지는 석호였다. 시원한 밤공기 덕분이었을까, 다소 취기가 올라서였을까. 끝내 그녀가 집 앞에서 용기를 냈다.

 “저, 사실 사장님이 좋아요….”     


그러니까 이 글을 만개하지 못한 고백 때문에 쓰였어요.

-이원하, 『내가 아니라 그가 나의 꽃』     


 운아를 들여보낸 뒤, 집으로 가는 동안 석호는 운아가 건넨 책을 펼쳐보았다. 내용은 짝사랑하는 남자에게 쓴 여자의 편지로 구성돼 있었다. 당돌하고 당찬 모습이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성향의 작가라며, 운아는 이 작가의 작품을 매우 좋아한다고 했다.

 석호 역시 그녀가 싫지만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마음 역시 운아에게 향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스스로도 자신의 마음이 헷갈려 마음을 제자리에 붙잡아둬야 한다고 생각해 왔지만.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자신을, 상처로 그늘진 마음의 얼굴을 감당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자꾸만 깊어지려는 마음을 애써 뿌리치려 노력한 석호였다. 

 하지만 그날 밤, 석호는 밤새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운아의 생각으로 한숨도 잠들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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