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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아 Sep 25. 2024

낙엽이 지면

08 석호와 운아


 문 밖으로 영일의 트럭이 들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석호가 얼른 카트를 끌고 영일에게 다가가는 뒤로 매장 전화가 울렸다.

 “네, 계절서점입니다.”

 운아가 전화를 받았지만 수화기 너머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몇 번이나 말을 되묻고 난 뒤에야 상대방이 목소리를 냈다.

 “잘 지내지, 운아씨….”

 미화였다.

 “그냥… 갑자기 운아씨가 생각났어. 안부 전하려고.”

 여전히 목소리에 힘이 없는 미화를 보니, 운아의 코끝이 찡해졌다.      


 미화가 고향에 내려간 지도 벌써 세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녀는 가끔 석호에게 전화를 걸어 영일의 안부를 물었다고 했다. 이제는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는 그녀였지만, 운아가 들은 그녀의 목소리엔 아직도 그날의 슬픔이 묻어있었다. 영일이 여전히 잘 지내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면 미화는 그런 그가 안타까워 속상해했지만,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혼자 아픔을 참아야 하는 외로운 공간, 그곳에서 미화는 조금씩 지금의 삶에 익숙해져 갔다.

 “참, 운아씨 소식 들었어. 석호 씨랑 만나고 있다며…. 축하해.”

 석호의 얘기가 나오자 운아의 표정에 설렘이 가득해졌다. 하지만 그녀의 앞에서 차마 행복한 티를 낼 수는 없었는 운아였다. 그리고 미화가 이를 알기라도 하는 듯 두 사람을 응원했다. 가까운 사람들이라도 많이 웃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함께 많은 시간을 나누고, 마냥 행복하기만 하라고.

 “… 여기는 언제 한 번 안 오세요?”

 운아가 조심스레 묻자 미화가 다소 벅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 반겨주는 건 운아씨밖에 없네…. 상황 좀 나아지면 갈게. 고마워, 운아씨.”

 다음에 또 통화하자는 미화의 말을 끝으로 수화기를 내려놓는 운아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람의 인연이란 건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처음과 끝은 언제나 같지 않았으니까. 멀리서 석호와 영일이 카트에 책을 한가득 실은 채 매장 문을 열고 들어섰다. 시간이 지나면서 영일의 얼굴에는 점점 근심과 걱정이 쌓여가는 듯했다. 그리고 오늘 역시 그의 얼굴에선 웃음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와 예린은 여전히 각방을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다 가끔 예린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을 때면 영일은 그녀의 방으로 건너가 예린을 간호했다. 그 이유는 뱃속의 아이 때문이었을지언정 예린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저 이를 악문 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의 옆에서 평생을 후회하고 불행해하는 모습을 두고두고 지켜보고 싶었다.

 영일은 운아의 인사에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방금 전 매장으로 미화에게 전화가 왔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지만, 점점 야위어만 가는 영일을 보며 운아는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가 힘겹게 마음을 다잡은 채 살아가고자 겨우 뿌리를 내리고 있는 땅이 흔들릴 것만 같았으니까.

 두 남자가 수십 개의 책더미를 다 내리자, 석호가 땀방울을 훔치며 영일에게 말했다.

 “고생했어, 형. 이따 밥 먹고 갈 거지?”

 하지만 그런 석호를 툭 치며 등을 돌리는 영일이었다.

 “… 집에 가봐야지.”

 트럭에 오르는 영일의 모습이 안타까운 듯 그저 서로를 바라보는 석호와 운아였다.     


*     


 “고생했어.”

 서점의 오후도 숨 가쁘게 흘러갔다. 수십 개의 박스를 정리한 뒤 서가에 진열하며, 바삐 오는 손님들을 맞이했다. 꼬박 마감시간을 채우고 나서야 석호가 겨우 서점 문을 닫았다. 

 “젊어서 그런가, 체력이 좋네.”

 운아는 계절이 변하면서 남기고 가는 공기를 좋아했다. 특히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때의 냄새가 그랬다. 그래서인지 오늘처럼 쉼 없이 일한 날 석호와 함께 집까지 걸어가자고 보채는 운아였다. 당장이라도 쓰러져 잠들고 싶었지만, 운아의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금방 겨울 오겠는데요?”

 운아가 외투를 여미며 말했다. 둘을 둘러싼 밤공기는 어느덧 찬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아직 겨울이 오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지만 올해는 조금 일찍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고 싶은 석호였다.

 “트리 사러 같이 갈까?”

 “직접요? 어디로요?”

 “음, 서울로 데이트할 겸?”

 석호의 말에 운아가 설레는 표정으로 빙그르르 돌아 보이고는 그를 마주 본 채 뒤로 걷기 시작했다.

 “넘어져, 앞에 보고 걸어.”

 석호가 운아의 손을 잡았다.

 “사장님이 이렇게 잡아주면 되죠-”

 운아가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쉬며 계절의 냄새를 들이쉬었다.

 “아직 우리 동네는 낙엽 지려면 멀었겠죠?”

 “이러다가 하루아침에 생길걸.”

 “얼른 낙엽 지면 좋겠다.”

 석호의 손을 꼭 잡은 채 운아가 활짝 웃어 보였다.

 “데이트하고 들어갈까?”

 운아가 석호의 품에 안겼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온몸으로 표현해도 다 담지 못할 기분이 들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가 옆에 있다면 뭐든 다 헤쳐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앞으로 다가올 특별한 모든 날을 석호와 함께 하고 싶은 운아였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밤 위로 환하게 뜬 보름달이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     


 잠에서 깬 여름이 창문 모서리를 살짝 열었다. 이불을 목 끝까지 덮은 채 가만히 코를 갖다 대니 차가운 겨울의 시원한 공기가 콧속을 찔렀다. 아직 한겨울이 되기엔 이른 날씨였지만, 제법 겨울냄새가 나는 걸 보며 여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긴 겨울잠을 자고 싶을 때 기분 좋게 잠을 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여름이 부지런히 서점에 출근하기 위해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서점 협회 모임에 간 석호의 빈자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가 없는 계절서점은 조용하고, 허전했다. 오전에 해야 할 일을 차근차근 마무리한 뒤, 석호에게 문자를 남기는 여름이었다.  

   

 [잘하고 있어요?]     


 당장이라도 석호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지만 오늘은 참기로 했다. 내일 그가 돌아오면 못다 한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을 테니까.     


 석호는 일이 바쁜지 여태껏 운아가 남긴 문자를 읽지 않고 있었다.

 ‘점심은 먹었나...'

 그가 없는 매장에서 혼자 점심을 먹고 싶지는 않았기에, 오늘은 집에 걸어갔다 와야겠다고 생각하는 운아였다. 석호의 연락을  기다리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나는 운아의 뒤로 매장 전화가 울렸다. 발신인은 석호였다.

 “어? 왜 매장으로 전화했어요?”

 “서점에 별일 없나 해서-”

 “별일 없죠. 밥은 먹었어요? 나 지금 막 집에 갔다 오려던 참인데.”

 “피곤한 것만 빼면, 잘하고 있지.”

 오후나 돼서야 듣게 된 석호의 목소리가 반가운 운아였다. 길게 통화하자며 핸드폰으로 다시 전화하겠다는 운아의 말에 석호는 다시 들어가 봐야 한다며, 전화를 마무리했다. 그와의 통화가 끊기고, 서점 문을 잠그는 운아의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바람이 차가워서 코끝이 찡한 건 아니었다. 자꾸만 눈물이 새어 나오려는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사소한 것에도 섭섭한 감정이 들고 있었다. 아마도 그의 사랑이 고파서였을까. 이렇게 하루라도 그를 보지 못한 날이면 그가 그리워지는 운아였다.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마친 채 서점으로 돌아가는 운아의 눈에 굴러다니는 낙엽 하나가 보였다.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해서였을까, 마르고 비틀어진 모양이 꼭 자신을 닮아 있는 낙엽이었다. 그럼에도 운아는 얼른 낙엽을 주워 손에 꼭 쥔 채 매장으로 돌아왔다. 그와의 약속을 생각하면서.     


*     


 “어서 오세요-”

 언제부턴가 계절서점은 하교 시간이 되면 매장 문을 열고 삼삼오오 모여 들어오는 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역시나 같은 시간이 되자 학생들이 물 밀듯이 서점 안으로 들어왔다. 친구들 사이에서 벌써 소문이 났는지, 아이들은 문제집을 고르다가도 입구에 놓인 마음서가에 관심을 갖고는 했다. 눈 깜짝할 새에 운아가 서있는 카운터에는 마음서가를 신청하겠다는 학생들이 줄을 서있었다. 

 “책 받으실 분께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실까요?”

 “여기에 선물 받으실 분 성함하고 연락처 적어주세요.”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게 될 줄이야…. 우체통은 단 하나, 그 안에 책은 대략 열 권 정도가 쌓여있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는 운아였다. 당장이라도 내일 석호를 만나 나눠야 할 얘기들로 운아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을 만큼 바쁘게 움직이던 운아가 겨우 한숨을 돌리고 나니, 벌써 시간은 저녁을 가리키고 있었다. 운아가 천천히 매장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오늘은 석호도 없던 데다가 손님이 많았기에 수시로 서가를 점검하지 못한 터였다. 매대에 진열된 책들은 조금이라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금방 제자리를 잃어버리곤 했다. 다른 위치에 꽂혀있는 책과 넘어져 있는 책, 그리고 띠지가 벗겨져있는 책 등을 원상 복구하며 생각을 정리하는 운아였다. 온갖 생각들이 뒤엉켜 정리가 되지 않던 찰나 그녀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 왔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쳐다본 자리에는 석호가 서있었다. 

 “내일 온다더니 어떻게 된 거예요?”

 내일이나 돼야 도착한다던 석호가 눈앞에 보이자, 운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마도 좋아서 흐르는 기쁨의 눈물이었으리라. 운아가 석호의 품에 와락 안겼다. 석호는 운아의 표정만 보고도 그녀의 오늘 하루를 짐작했다. 그가 운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오늘 많이 힘들었지….”

 미안함 가득한 석호의 목소리에 운아가 일부러 더 환하게 웃어 보였다.

 “참, 나 보여줄 거 있는데!”

 운아가 얼른 석호의 품에서 빠져나와 카운터로 향하고는 서랍장에 꼭 숨겨두었던 낙엽을 꺼냈다. 

 “짜잔! 오늘 집 갔다 오면서 주웠지-”

 석호를 향해 낙엽을 흔들어 보이며 밝게 웃는 운아에게 석호가 다가가 입을 맞췄다. 어떻게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 있을까. 단 하루, 아니 고작 반나절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이토록 서로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는 건 석호도 운아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키스를 나누는 두 사람을 둘러싼 서점의 공기가 알싸하게 퍼져갔다. 긴 입맞춤 끝에 석호가 입을 열었다.

 “그럼 내일 서울 다녀오자.”

 운아가 석호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입술이 다시 포개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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