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여름
주변에서 들려오는 분주한 소리에 여름은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사람들은 주변으로 바쁘게 뛰어다녔고, 여기저기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겹쳐 시끄러운 듯 여름이 인상을 썼다.
‘선생님…? 간호사…?'
가장 많이 들리는 단어들을 되뇌며 여름이 힘겹게 두 눈을 떠보였다.
”여름아, 언니 알아보겠어?”
흐릿한 시야 사이로 가장 먼저 보인 건 자신을 걱정스레 쳐다보고 있는 겨울이었다. 입을 틀어막은 채 울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 비몽사몽 했던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는 듯했다. 아무런 표정도 지어지지 않았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여기는 어딘지 파악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가만히 눈만 깜빡이던 여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환자복을 입은 채 누워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는 여름이었다.
“… 석호 씨는?”
여름이 작고 힘없는 목소리로 겨울을 향해 첫마디를 내뱉었다.
“석호씬, 아직도 연락 없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울기만 하는 겨울을 보며, 여름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팔에 꽂혀있는 링거바늘을 전부 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름아! 서여름! 선생님!”
“서여름 씨!”
병실을 나서는 여름의 걸음걸이가 빨라졌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들을 뒤로한 채 여름이 허겁지겁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도 그녀를 말리지 못하자 겨울이 다급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가을비가 폭우처럼 세차게 내리치는 밤이었다. 여름이 외투도 걸치지 않은 채,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병원 밖으로 뛰쳐나가 무작정 택시를 잡았다. 자신의 얼굴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빗물인지 눈물인지도 모른 채.
“계절서점으로 가주세요….”
택시기사는 환자복을 입은 채 비를 쫄딱 맞은 상태의 여름을 백미러로 흘깃 쳐다보았다. 자신이 왜 환자복을 입고 있는 건지, 대체 석호는 어디로 갑자기 사라진 건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부디 서점에 석호가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
“14200원입니다.”
택시가 계절서점 앞에 다다랐다.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여름이 얼른 주머니를 뒤졌지만, 환자복에는 핸드폰도, 지갑도 있을 리 만무했다. 당황한 여름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택시기사는 몸을 돌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여름을 쳐다보았다.
“아니, 아가씨….”
택시기사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여름에게 말을 건네려는 찰나 똑똑똑, 하고 누군가가 택시 창문을 두드렸다. 동시에 택시기사와 여름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요금 얼마예요?”
미화였다. 창문 너머로 택시기사에게 돈을 건네는 미화를 뒤로한 채 여름이 무작정 문을 열고 내려 서점으로 달려갔다. 정리되지 않은 낙엽이 잔뜩 쌓여있는 서점 앞에서 여름이 망연자실한 채 주저앉아버렸다.
“참, 우리 마음서가 말인데요. 우체통을 하나 더 들일까요?”
“우체통으로만 두 개?”
“생각보다 찾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운아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석호가 말을 이었다.
”음… 아니면 책장으로 바꿀까?”
”그게 더 좋은 것 같아요!”
석호의 의견에 따라 수요가 많아지는 마음서가는 우체통 대신 책장으로 교체하기로 했다.
”트리 보는 김에 책장도 같이 둘러보지, 뭐.”
”좋아요!”
석호와 함께 바꾸기로 했던 마음서가 자리에는 여전히 빨간 우체통이 놓여있었다. 그와 서울 데이트를 하던 그날, 자신과 함께 새로운 마음서가 책장을 찾아 바꾸기로 했는데…. 그게 석호와의 마지막이 될 줄은 알지 못했다. 그가 모든 것을 내버려 둔 채 자취를 감춰버렸다. 자신과 행복한 미래를 그리고, 데이트를 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한 모든 약속은 전부 거짓이었던 걸까. 어떻게 하루아침에 자신만 남겨둔 채 이곳을 떠날 수가 있는 건지 그저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는 여름이었다. 그런 그녀를 뒤에서 지켜보던 미화가 여름에게 다가왔다.
“운아씨!”
여름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날이 얼마나 추운지, 신발이 벗겨진지도 모른 채 여름은 무작정 석호에게로 달려갔다.
*
“석호 씨! 석호 씨!”
여름이 석호의 집 현관문을 세게 두드렸다. 손바닥이 새빨갛게 부어오르는 것도 모른 채 그녀는 계속해 울부짖듯 소리쳤다. 여름은 한동안 온 동네방네를 돌아다니며 석호를 찾았다.
“석호 씨! 나와봐, 석호 씨! 강석호!”
멀리서 소리치는 여름을 발견한 미화가 달려와 여름의 두 손을 힘주어 잡았다.
“여름아….”
“언니, 석호 씨 어딨어요? 어디….”
여름의 눈물을 닦아주는 미화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미화가 그런 여름을 꼭 안아주었다. 여름은 떨고 있었다. 그렇게 미화의 품에 안겨 한참을 오열하는 여름이었다.
*
정신이 든 뒤에도 여름에게 남아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석호가 없는 자신의 일상은 지옥과도 같았으니까. 밥도 먹지 않았고, 물도 마시지 않았다. 석호에 대한 생각으로 깊은 잠에 들기는커녕 울다 지쳐 선잠을 자는 일이 반복됐다. 그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실종신고도 해보았지만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대체 그가 무엇 때문에 사라졌는지 이유라도 알고 싶은 여름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옆에 평생 함께 있겠다던 석호였다. 영원히 자신을 사랑하겠다던 그였다. 그랬던 그가 하루아침에 자신만 남겨둔 채 떠나버린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분명 그랬다.
가을과 겨울은 방안에 누워서만 지내는 여름을 걱정했다.
“여름아, 언니 갔다 올게.”
“누나, 이따가 일어나서 밥 조금만 먹어. 차려놨어.”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여름의 눈가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나왔어, 운아씨.”
미화는 매일같이 여름의 집을 방문했다. 가을이 차려두고 간 식사를 챙겨 여름의 입에 넣어주었다. 자신이 여름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녀는 같이 울어주었고, 함께 슬퍼하였으며 말없이 떠나버린 석호를 원망했다.
여름은 퇴근길에 큰 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아마도 석호의 행방에 의한 충격 때문이었으리라. 다행히 큰 수술을 피했지만, 그 뒤로 여름은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그렇게 9개월이 흐른 뒤 여름이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의 머릿속엔 석호로 가득했다. 첫눈 오던 겨울밤, 그 모습이 석호와의 마지막이었다.
간밤에 지독한 악몽을 꾸었는지 온몸이 땀으로 젖은 여름이었다. 오랜만에 샤워기를 틀어 온몸을 물에 적셨다. 자신의 눈물로 욕조가 가득 찰 만큼 여름은 그 안에서 한창이나 나오지 못했다. 그렇게 그녀는 조금씩 석호의 부재를 받아들였다. 그를 원망하는 것도, 자기 자신을 자책하는 것도 전부 부질없다고 생각하는 여름이었다. 어떻게든 그를 만나야 했다. 그러려면 자신이 서점을 지켜야 했다.
그때부터 여름은 억지로 기운을 차린 채 계절서점으로 향했다.
여름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옷을 벗은 나무들은 하얀 옷으로 갈아입었고, 그마저도 얼어붙은 모습이었다. 차가운 공기에 눈가가 촉촉해졌다. 눈물은 아니었다. 이미 눈물샘은 말라버린 지 오래였으니까.
여름이 천천히 서점을 향해 발길을 돌렸을 때, 카운터에서 결제를 하고 있던 미화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가가자 미화가 고개를 들어 여름과 눈을 맞추고는 웃어 보였다. 싱긋이.
석호를 기다리겠다는 여름의 말에 미화가 물었다.
“그러다 안 돌아오면…?”
“그럼… 서점 제가 가지죠, 뭐.”
여름이 웃어 보였다. 언제까지고 석호를 기다리겠다고 마음먹는 여름이었다. 반드시 그가 돌아올 거라고 믿었으니까. 틈만 나면 떠오르는 석호에 대한 생각 때문에 눈물부터 흘렀던 여름이었지만, 마음을 굳게 먹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