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여름
다시 여름의 일상이 시작되고 있었다. 총판 사람들은 웃으며 책을 배달해 주었고, 손님들 역시 여름에게 살이 많이 빠졌다며 안부를 전했다. 물론 괜찮아진 건 아니었다. 그녀의 매 시간은 석호에 대한 기억으로 괴로웠다. 출근할 때도, 퇴근할 때도, 집에 혼자 있을 때도 그랬다. 그리고 그렇게 기다리다 세월이 흘러도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자신도 그저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서점에 오는 손님들 중 일부는 책을 주문하고 갔고, 마음서가에 책을 맡겼으며, 가만히 앉아 읽던 책을 사가기도 했다. 석호가 사라진 그날부터 여름의 시계는 멈춰버렸다.
*
오늘도 여름은 손에 집히는 대로 편한 바지에 후드티를 주워 입었다. 그저 추위만 막으면 될 일이었다. 외투를 걸치고, 백팩을 멘 채 집을 나섰다.
금방이라도 봄이 올 것 같던 날씨가 다시 변덕을 부리기 시작했는지 밤새 함박눈이 내렸다. 겹겹이 길목마다 수북하게 쌓인 눈을 밟으며 걸어간 지 10분쯤 됐을까. 저 멀리 [계절서점]이라 쓰인 간판이 보였다. 겉보기엔 작아 보이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생각보다 웅장한 내부에 손님들이 감탄하는 규모였다. 오늘처럼 봄이 오길 시기하는 겨울이 눈을 흩뿌리는 날이면 유난히 따뜻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되는 동네 서점, 그러나 주인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가게였다. 여름은 조금씩 석호 없는 이 서점에 적응해나가고 있었다.
히터를 켜고, 따뜻한 난로에 몸부터 녹였다. 이 시간을 제일 좋아하는 여름이었다. 불 꺼진 공간에 서서히 따뜻한 열기가 차오르길 기다릴 때면 마음이 평온해졌으니까.
오픈을 하는 순간부터 여름의 머릿속은 석호로 가득했다. 작년 9월, 9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혼수상태였던 여름이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 석호는 이미 그녀를 떠나버린 뒤였다. 컨디션을 회복해야 할 시기에 경찰서와 동네 사람들을 수소문하며 다니는 여름을 보며 주위 사람 모두가 그녀를 말렸다.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그의 부재를 받아들여야 했던 두 달 동안 여름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방 안에서 꼼짝 않고 누워있기만 했다. 모든 걸 포기한 채 내려놓고만 싶었다. 봄이 없던 제 삶에 봄을 기다리게 만든 사람이 곁을 떠난 순간부터 자신도 살아갈 이유가 없어졌다. 가족도, 친구도 보이지 않던 시간이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매일을 오가는 이 길도, 가는 길에 마주치는 가게 주인들도. 새로 들어서는 상점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과 석호가 곁에 없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그대로였다. 사람의 기억이란 참 신기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잊으려 하면 할수록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더욱 생생해졌으니까.
계절서점에도 캐럴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냥 기쁠 것이라 생각했던 올해의 크리스마스는 석호의 부재로 인해 밝지만은 않았다. 가을과 영일이 석호를 대신해 서점의 입구에 트리를 설치해 주었다. 석호가 떠나가던 날 밤, 함께 골라놨던 트리를. 서점 앞에는 빨간 우체통과 트리가 놓였다.
“조용히 지나갔으면 좋겠어요.”
여름이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는 사람처럼 그저 덤덤히 카운터를 지킨 채 서있는 여름이었다. 그렇게 여름은 혼자 서점에서 새해를 맞이했다. 어쩌면 아직 작년 이맘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 석호가 돌아올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
서점이 오픈한 지 2주년을 맞이하고 있었다. 석호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여름은 믿고 싶었다. 올해는 반드시 그가 자신을 보러 와줄 거라고. 매 순간 같은 일이 반복될 때마다 여름은 석호를 떠올렸다. 아니 무의식 중에 그가 생각나고는 했다.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자꾸만 떠오르는 그와의 추억에 여름의 눈시울이 자꾸만 붉어지기를 반복했다.
이 공간은 그런 의미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그를 잊지 못하게 하는 곳,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다 그를 떠오르게 만드는 신기한 공간. 어쩌면 여름은 이제 마음을 내려놓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스스로 무너지지 않아야 했건만, 여전히 그를 떠올리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이제는 정리할 때가 된다고 느낀 걸까.
잠깐 엎드린 사이, 잠이 들었다. 꿈에서 어렴풋이 석호의 모습을 본 여름이었다. 분명 자신을 향해 웃고 있던 석호였다.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불렀지만 그는 끝내 자신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런 석호를 붙잡으며 여름이 잠에서 깼다.
'역시 꿈이었구나….'
시계를 보니 벌써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깜짝 놀라 서점 문을 닫은 채 여름이 부랴부랴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르겠어.”
안전벨트를 푸르며 걱정스레 말하는 겨울의 손을 꼭 잡아주는 준우였다. 그의 눈빛은 마치 다 잘될 거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조금만 기다려주자. 아직 준비가 안된 것 같아.”
준우의 말에 겨울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런 겨울의 볼을 준우의 크고 따뜻한 손이 어루만져주었다. 갈게, 겨울이 차에서 내렸다. 자기 전에 전화하라며, 겨울을 향해 손을 흔든 뒤 차를 출발하는 준우를 멀리 배웅한 겨울이 계단을 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현관문을 여니 거실 탁자에 누워있는 여름이 보였다. 그날 이후, 여름은 늘 같은 하루를 반복했다. 서점에서 석호를 기다렸고, 집으로 돌아와 혼자 술을 마시며 쓰러지듯 잠을 청했다. 석호가 언제 돌아올지, 대체 어디로 간 건지, 금방이라도 정신이 나갈 것만 같은 상태의 여름이었다. 오늘따라 겨울은 혼자 쓰러져있는 여름의 뒷모습이 안타까워 그녀를 뒤에서 꼭 껴안아주자 여름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엄마 하나로 족하잖아…. 왜 석호 씨까지 사라져서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거야, 언니….”
여름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꼭 안아준 채 함께 흐느끼는 겨울이었다.
*
밤새 울다 지쳐 잠들어버린 여름의 곁에서 겨울은 한숨도 잠을 자지 못했다. 아침이 돼서야 여름이 눈을 떴을 때, 겨울은 덤덤하게 말할 뿐이었다.
“오늘은 언니랑 어디 좀 같이 가자, 출근하지 말고.”
여름이 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겨울을 쳐다보았다.
“미화 씨한테 부탁해 놨어. 오늘 하루만 서점 봐달라고.”
“… 어디 가는데?”
달리는 택시 안에서 여름은 겨울에게 몇 번이고 물었지만 겨울은 그저 묵묵히 창밖을 바라본 채 입을 닫았다. 30분쯤 지났을까, 택시가 선 곳은 선월동에서 멀지 않은 한 납골당이었다.
“여긴 왜…. “
겨울은 그저 표정 없이 여름의 얼굴만 묵묵히 쳐다보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 건지 도통 알 수 없었지만 택시에서 내려 건물로 향하는 겨울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그녀의 뒷모습은 어쩐지 자꾸만 꿈에서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석호의 뒷모습과 닮아 불길한 예감이 드는 여름이었다.
”이게 무슨….”
겨울을 따라간 그곳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석호의 사진이 보였다. 겨울이 놀라 굳어버린 여름의 옆에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언니…. 서겨울! 말해봐, 석호 씨가 왜 여기 있어? 어?”
믿기 힘든 상황에 여름이 울분을 터뜨렸다. 그동안 왜 자신에게 말을 해주지 않았냐며, 겨울을 밀쳤다.
“기다려주려고 했어. 네가 힘들까 봐. 차라리 마냥 석호 씨를 기다리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알아듣게 좀 얘기해!”
여름의 온몸에 힘이 빠져버렸다. 자신을 버리고 사라져 버린 그가 사실은 죽었었다고? 혼란스러웠다. 겨울이 하고 있는 말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여름이었다.
*
”잠시만요! 위급 환자입니다!”
병원으로 두 대의 구급차가 빠르게 들어왔다. 의료진들이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들것에 실려있는 여름과 석호를 응급실로 데려갔다. 병원은 응급처치를 하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들을 따라 어수선했다.
여름이 수술대에 오르자 가을과 겨울이 병원으로 달려들어왔다. 그리고 응급실 앞에서 기도하는 둘의 뒤로 긴급속보가 전해졌다.
”모두가 희망을 바라는 1월 1일 새벽, 고속도로에서 8중 추돌사고가 일어났습니다. 크게 전복된 차량에서 한 명의 사망자와 아홉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여….”
한참을 수술 중인 여름의 옆으로 석호에게 흰 천이 써졌다.
“진작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여름이 크게 충격받은 표정으로 겨울을 쳐다봤다. 밀려드는 배신감에 부르르 떨려오는 여름이었다. 전부 다 알고 있었으면서, 자신이 그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봤으면서 어떻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을 수 있었는지 속이 상했다.
현실을 마주하게 된 여름이 이내 주저앉아버렸다. 미화도, 총판 사람들도, 아니 온 동네 사람들이 전부 그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자신만 몰랐다는 사실에 배신감도 들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