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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아 Sep 29. 2024

사계절의 봄

09 여름


 누군가는 봄을 기다렸고, 누군가는 이대로 시간이 멈추길 바랐다.      


 “저 손님은 왜 안 찾아가시지?”

 “자기한테 온 건지 모르나 보지.”     


 숨을 고르며 여름이 서점에 도착했을 때 앞에선 미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자 여름의 말라버린 눈물샘이 다시 터져버렸다. 여름이 미화를 꼭 안아주었다.

 잠시 문을 닫아두었던 마음서가에는 찾아가지 않은 책 한 권이 들어있었다. 비밀번호는 0304. 석호와 여름이 처음 만나던 날이었다.      


*     


 환하게 웃고 있는 젊은 인옥의 사진 너머로 국화꽃 세 송이가 놓였다. 앞에선 상복을 입은 삼 남매가 나란히 선 채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은 세 명뿐이었다. 그 순간 상철은 함께하지 않았다. 그래야만 했다.

 수감생활을 반복하던 상철은 끝내 이성을 잃고 인옥의 숨통을 끊었다. 그는 한순간의 실수였다며, 눈물로 선처를 호소했지만 세상은 더 이상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만일 겨울이 우연히 교섭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조차도 알 수 없었을 노릇이었다. 오랜 가족이었고, 자신을 괴롭혀온 마음의 짐이기도 했던 여름의 풍선이 터져버렸다.     


*     


 짧은 새에 선월동은 인구수가 5만 명이 넘어가면서 선월 1동과 선월 2동, 두 개의 동으로 분리되었다. 연말을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며 가을의 카페에도 새 바람이 불어왔다.

 “핫초코 한 잔, 따뜻한 바닐라 라테 한 잔 맞으시죠? 준비되면 진동벨로 알려드릴게요.”

 준우가 이어서 주문을 받았다. 옆에서 가을이 분주하게 음료 제조를 시작했다.

 날이 추워지면서 커피의 날씨 역시 몸을 녹이러 온 주민들로 가득 찼다. 무엇보다 가을이 아이디어를 내어 만든 시그니처 메뉴가 SNS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먼 타지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이 생겨났다. 이제야 비로소 찬영의 빈자리가 제법 익숙해진 가을이었다.

 “우리도 신규직원 얼른 뽑아야겠네, 더 정신없겠어.”

 준우가 분주하게 커피를 내리며 말하자 가을이 그를 보며 웃어 보였다.     


*     


 “이 정도면 괜찮아요?”

 높은 사다리에 올라있던 남자가 뒤를 바라보며 수평을 맞췄다. 벚꽃이 흩날리는 계절을 앞두고 조금씩 불어오는 꽃향기에 서점에 들른 손님들의 발길이 멈춰 섰다. 서점에 새로운 이름이 생겼다. 사계절서점, 봄을 맞이하며 여름이 서점의 이름을 새로 지어 보였다. 간판을 보며 좋다고 대답하는 여름의 옆으로 봉석이 다가왔다.

 “간판 잘 뽑았네!”

 “선생님 도움이 컸어요, 감사합니다.”

 손사래를 치는 봉석을 보는 여름이 웃어 보였다. 편의점에 물류가 들어올 시간이라며 이윽고 자리를 뜨는 봉석이었다. 편의점도 많이 바빠졌지만 이제는 봉석이 혼자 모든 일을 해내고 있었다. 가끔 육아도서를 찾기 위해 동하와 만삭인 효원이 서점에 들를 때면, 그런 봉석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아직 태어나기도 전인 아기를 예뻐하는 봉석이었다.     


*     


 석호의 행방을 알고 난 뒤에도 여름은 힘든 시간을 보내왔다. 그리고 모든 아픔을 받아들이던 때에 그녀에게 생겨난 새로운 숙제는 서점이었다.     


 “여름이가 해야지, 뭐.”

 수화기 너머로 농담 섞인 미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일 그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면 서점은 자신이 가질 것이라고 장난스레 얘기했던 여름이었다. 그리고 모든 게 현실이 되어버린 현실이었다. 그는 평생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서점을 인수하며 여름은 다짐했다. 평생 마음속에 그를 간직하겠다고.

 “… 괜찮겠어?”

 겨울은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가슴에 품으며, 그의 흔적을 간직하기로 한 여름을 걱정했다. 어쩌면 평생 볼 수 없는 강석호라는 이름 세 글자를 간직하겠다는 선언과도 같은 여름의 결정이었다.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 그의 공간에 남아 영원히 그를 떠올리기로 마음을 먹은 여름이었으니까. 모두가 그녀의 선택을 존중했다. 사계절서점이라는 새로운 이름과 함께 여름의 인생에도 봄이 생겼다.     


 “서사장님!”

 멀리서 영일이 굽실대듯 허리를 숙이며 다가왔다. 옆에는 이제 막 돌을 맞은 예쁜 딸, 그리고 예린과 함께 어느 정도 안정감을 찾은 듯한 모습이었다. 여전히 서먹한 듯 보였지만 다시금 웃음을 찾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이는 딸 덕분이었으리라. 영일이 여름에게 손을 내밀어 잘 부탁한다며 악수를 청했다.     


*     


 “예, 어서 오….”

 원두를 갈던 미화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였다. 영일을 닮은 손님이었다. 순간 온몸이 굳어버린 미화를 향해 남자가 물었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남자는 눈시울이 붉어져버린 미화를 향해 주문을 한 뒤, 편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미화가 얼른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대답했다.

 미화는 고향에 내려가 작은 동네 카페를 열었다. 여전히 그녀의 서랍 한 구석에는 몰래 찍었던 영일의 사진이 놓여있었다. 한동안 모든 남자가 다 영일처럼 보이던 미화였지만, 이제 그를 놓아줄 때가 왔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잘 지내, 영일 씨….'

 미화가 웃어 보이는 위로 매장 전화가 울렸다. 여름이었다.

 “인테리어도 새로 다 하고, 규모도 커졌어요. 무엇보다….”

 “대표님!”

 멀리서 여름을 부르는 앳된 목소리가 들렸다.

 “대표? 직원 뽑았구나, 여름씨.”

 통화 중인 여름의 뒤로 숨이 차는 듯 헐떡이며 달려오는 채연이었다. 여름이 수화기를 막은 채, 왜? 하는 표정으로 묻자 채연이 침을 삼키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사계절서점 대표님이실까요? 안녕하세요, 저희 새로 작은 도서관이라고 합니다.”

 그가 근처에 새로 입주한 아파트 단지의 도서관 팀장이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여름이 그가 건넨 명함을 받아 들며, 미화에게 다시 전화하겠다는 말을 전했다. 그는 도서관 예산에 맞춰 책을 대량 주문해야 된다며, 온라인보다는 지역서점의 활성화를 위해 찾아왔다며 말을 이어갔다. 그의 얘기를 듣는 여름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서관은 왜요?”

 석호는 동네에 도서관이 오픈하면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날 거라고 한 적이 있었다.

 ”도서관은 서점하고 경쟁업체 아니에요?”

 운아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되묻자 석호가 대답했다.

 ”보통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기 때문에 사람들이 서점에서 책을 안 산다고 생각하잖아.”

 운아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런데 사실은, 서점하고 도서관이 협업하는 일이 더 많지 않을까? 예를 들면 책을 도서관에서만 빌리는 게 아니라 서점에서도 빌릴 수 있게 되는 시스템 같은 거지.”

 ”그게 가능한 일이에요?”

 믿기 힘들다는 표정의 운아를 보며 석호가 웃어 보였다.     


 석호가 했던 말이 떠오르자 방긋 웃어 보이는 여름이었다.      


*     


 여름이 새로운 인수인계장을 만들었다.. 자신이 감당할 모든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야 조금 마음이 편해지고 있는 그녀였다. 자신의 삶에 함께였던 사람들이 없는 새로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자연스럽게 시간에 맡기겠다고 다짐하며, 여름이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잘 자라고. 고맙고, 행복했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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