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석호와 운아
서점에는 「휴무」라는 팻말이 기분 좋게 걸려있었다.
“서울이다!”
운아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두 팔을 힘껏 펼쳐 보였다.
“그렇게 좋아?”
석호가 운전석에서 내리며 운아를 향해 활짝 웃어주었다.
1년 만의 서울이었다. 평생을 서울에서 살아온 운아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공기였지만, 과거와 지금의 느낌은 너무도 달라져있었다.
사실 운아는 밤새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느라 잠을 설친 탓에 거의 한숨도 못 자고 데이트를 준비했다. 밤을 꼴딱 새우다시피 한 터라 괜히 피부도 칙칙하게 느껴지는 운아였다. 아침에 석호와의 약속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어젯밤 미리 입을 옷을 골라둔 게 다행이었다. 집을 나서기 전 운아는 상옥의 번호가 제대로 차단되어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오늘처럼 중요한 날, 데이트를 방해받으며 마음 졸일 수는 없었으니까.
석호는 평소와 다를 게 없어 보였지만 사실은 내심 긴장하고 있는 터였다. 1년을 하루종일 붙어있다시피 지내었지만 동네가 아닌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떠나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오늘은 서로에게 색다르고 기쁜 특별한 날이 되어줄 것이란 기대감이 들었다.
*
운아의 첫 번째 버킷리스트인 '한복 데이트'에 따라 둘은 한복집으로 향했다.
“한복 입으면 경복궁 입장 무료인 거 알죠?”
운아가 놀리듯 석호에게 묻자, 석호가 허- 하며 기가 찬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한복 잘 어울리는데? 되게 예뻐, 지금.”
석호가 곱게 차려입은 운아를 한참이나 쳐다봤다. 운아는 지금 이 순간이 마치 꿈만 같이 느껴져 행복해했다.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경복궁엔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둘은 여느 연인들처럼 사진으로 서로를 기억했다. 그리고 기적처럼, 11월의 어느 날 그곳에서 두 사람은 첫눈을 맞이했다.
“어…?”
석호와 운아가 동시에 하늘을 쳐다봤다. 서로의 볼에 떨어진 눈 한 방울을 닦아 보이며,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우산을 쓸 정도는 아니었기에 둘은 손을 꼭 붙잡은 채로 서울 길을 걸었다. 함께 길을 걷는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기분이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을 부러워하는 것만 같이 느껴지는 운아였다.
운아는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앞으로 늘 이렇게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다. 사실은 이렇게 행복한 지금을 믿을 수 없었다. 평범하지만은 않은 자신의 삶이, 늘 불안정했던 환경 속에서 사랑이란 건 꿈조차 꿀 수 없었던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마음을 받아도 그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었다. 그 마음 뒤에는 늘 자신이 챙기고 책임져야 할 가족의 미래가 있었으니까. 그런 자신에게 이런 날이 오다니, 어쩌면 평생을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운아였다. 석호라면, 그러면….
“저 파스타 먹고 싶어요!”
운아가 신이 난 목소리로 석호에게 말했다.
“가자.”
석호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행복해요?”
“행복하지-”
“나 만나서?”
“그럼. “
“그러고 보니까 우리 서로 생일을 모르네-”
“나는 아는데?”
“어떻게? 아… 이력서!”
운아와 석호가 마주한 채 웃어 보였다.
“사장님 생일은 언제예요?”
“우리 처음 본 날.”
“면접날…?”
석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보이자, 운아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갸우뚱해 보였다.
오늘도 아무런 성과 없이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고 있는 여름의 시선에 한 남자의 등이 보였다. 널찍한 등을 내보이며 열심히 무언가를 써붙이고 있던 남자가 자리를 떠났을 때, 그곳에는 '직원구함'이라는 네 글자가 붙어있었다.
'계절서점?'
여름과 석호의 첫 만남이었다.
*
한참을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초겨울의 저녁달은 사람들에게 유난히 빠른 밤을 선물해주고 있었다. 마트에 들러 매장에 놓을 트리를 고른 채, 석호와 운아가 간단히 집에서 먹을 음식을 샀다.
“초밥, 닭강정, 새우… 어? 이거 내가 좋아하는 와인인데!”
선월동엔 없는 대형마트에 오자 운아가 신이 난 듯 여러 가지 음식을 카트에 담았다.
“다 먹을 수 있겠어?”
석호가 놀라는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도 그런 운아가 귀엽다는 듯 볼을 꼬집어 보였다. 이렇게 하루가 빨리 간 적이 있을까. 유독 짧게 느껴진 하루가 아쉬운 운아였다. 하루종일 돌아다닌 탓인지, 낮에 잠깐 맞은 첫눈 때문인지 어느새 운아는 옆에서 잠들어있는 모습이었다. 석호가 뒷좌석에서 담요를 꺼내 덮어주었다. 집 앞에 도착해서도 그는 그녀를 깨우지 않았다. 그런 둘 위로 한 겨울의 눈송이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그들의 사랑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한 채.
*
그 사이 운아는 꿈을 꿨다. 석호와 자신이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모습을. 그와의 사이에는 예쁜 딸과 귀여운 아들도 있었다. 꿈속에서는 천진난만하게 웃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널리 들려왔다. 아주 평범하고 화목한 모습이었다.
자신은 이렇게 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운아였기에 그 순간을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다. 꿈속의 시간이 영원하길 바라며 그녀가 눈을 떴을 땐, 창문 너머로 밝은 햇살이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곤히 잠들어있는 석호가 보였다.
운아가 먼저 잠에서 깨 몸을 뒤척이자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석호가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깜짝 놀란 운아가 고개를 돌려 석호를 바라봤다. 잠들어 있는 석호의 귀여운 얼굴을 평생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운아의 몸이 석호를 마주 본 채 그대로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소중하게 생각한 건 처음이었다.
너무도 아껴주고 싶은 사람을 만났다. 사람을 믿고 의지하게 됐고, 이 사람을 위해서라면 많을 걸 포기하면서까지 다 해주고 싶었다. 어쩌면 운아가 지금까지 힘든 시간들을 보내온 것도, 그러면서 이곳 선월동으로 이사를 오게 된 것도, 서점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 것까지 모두 가벼운 우연은 아닐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의 앞에 곤히 잠들어있는 사람과 예쁜 사랑을 하고, 한 가정을 꾸리고, 서로를 닮은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낳아 키우며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싶어졌다. 처음으로.
석호의 볼을 쓰다듬던 운아의 손이 멈췄다. 안정감을 느낀 건지 그대로 다시 잠들어버린 운아였다.
“누군가한테 가장 확실하게 복수하는 방법이 뭔지 알아?”
그가 내게 물은 적이 있다.
“그 사람 없이도 잘 먹고, 잘 사는 거 아냐?”
그런 나를 보며, 이내 '아니'라고 대답하는 그였다.
“...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사람이 되고 나서 영영 사라지는 거야, 그 사람한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