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석호와 운아
미화가 고향으로 내려갔다는 소식과 함께 조금은 차가워진 공기가 서점 안을 가득 메웠다. 그 후 영일은 옛날의 유쾌하고 장난기 가득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날로 수척해져만 갔다. 마치 인생의 행복을 포기하기라도 한 듯이. 서점에 들러서도 아무런 말조차 건네지 않은 채 책만 배송한 뒤 매장을 나서기 일쑤였다.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가라는 석호의 말에 됐다는 손짓만 건넨 뒤 트럭으로 향하길 반복했다. 미화에 대한 아픔을 애써 잊기 위해 더욱 일에 몰두하는 듯한 영일을 보며, 대체 사람의 인연이란 게 뭔지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운 석호였다.
결국에는 다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 운아는 그 말이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무책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고통의 시간을 끝내 이겨내라는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러면서도 때로는 그 말이 가장 큰 위로가 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그날, 운아의 고백 이후 석호와의 관계는 이전과 다를 게 없었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석호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으니까. 혹시 대답이 없는 것도 대답이었던 걸까. 운아가 기다리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러만 갔다. 서점에서의 시간이 특히 그랬다. 어느새 학생들은 한 번의 방학을 보내고, 새로운 학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선월동에는 대규모 아파트들의 입주가 이어져 두 개 동으로 나뉜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대낮에도 텅 비어있던 도로와 인도에 몇 달 새 사람들로 가득한 걸 보니,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듯했다. 손님의 책을 포장하다 말고 운아가 사장님, 하고 말을 걸었다. 석호가 다소 놀란 표정으로 운아를 쳐다봤다.
“제가 책 포장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는데요.”
큐레이션에 대한 운을 띄우는 운아였다. 선월동으로 이사 오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서점을 처음 방문하는 고객들도 증가한다는 게 그녀의 의견이었다. 그랬기에 블라인드북과 같이 계속해 바꿔나가야 하는 큐레이션보다는 한 가지로 오래 할 수 있는 서점만의 시그니처 큐레이션을 기획해야 한다고 했다.
“근데 조금 걸리는 게 있기는 해.”
“뭔데요?”
“우리 매장에 오시는 손님들이 많이 찾으실까?”
그도 그럴 것이 계절서점의 주 연령층은 학생과 아이, 그리고 학부모였다. 간혹 대학생들이나 데이트하는 젊은 연인의 방문이 있기도 했지만 극소수였다. 운아의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선 서점 이용 고객의 타겟층을 살피는 게 우선이었다. 서점의 매출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많은 사람에게 관심을 받아야 했다. 손님의 책을 리본으로 묶어 마무리한 운아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운아의 의견에 따라 계절서점만의 큐레이션 「마음서가」는 특별한 타겟층을 설정하지 않고, 매장을 방문하는 모든 고객이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엄마가 딸에게, 예비사위가 예비장모에게, 친구가 친구에게, 그리고 연인에게. 그런 그녀의 말을 긍정한다는 듯 석호 역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사실 이번만큼은 대다수가 대상이 아니라, 소수의 사람들을 위하고 싶어요.”
운아가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꼭 해야 하는 말이 있어도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을 수 있잖아요.”
다만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은 두 가지였다.
1. 책을 받는 이가 직접 서점을 방문해 선물을 수령해야 한다는 것
2. 보내는 이의 정보는 익명으로 처리되어 선물을 수령하기 전까지는 절대 알 수 없다는 것
운아는 분명 알고 있었다. 어쩌면 수요가 많지 않을지도 모를 이 큐레이션이 누군가에게는 큰 도움이 될 거라는 사실을. 그리고 잊고 있었던 또 한 가지….
“제가 사장님한테 좋아한다고 고백한 거 잊으셨어요?”
운아의 두 번째 고백이었다. 석호가 그만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운아는 크게 웃어버리는 석호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운아의 표정이 귀여워 석호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처음 보는 그의 호탕한 웃음에 운아의 얼굴에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이내 겨우 웃음을 멈춘 석호가 운아를 쳐다보며 말했다.
“잊은 적은 없는데….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몰랐네, 미안.”
순간 운아의 온몸이 얼어버렸다. 자신의 머리 위에 얹은 석호의 손 덕분인지 찌릿한 전율이 느껴졌다.
사실 석호의 대답이 늦어진 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였다. 끝내 상처가 될 관계는 애초에 시작하고 싶지가 않았으니까. 자신의 눈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이 아이와의 미래를 한 순간의 감정으로 판단할 수는 없었다. 현실적인 부분을 감당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건, 더 이상 다른 조건들이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커져버린 감정 때문이었다.
“대답이 더 필요한가?”
“…”
“그러자고.”
이번엔 운아의 차례였다. 석호가 운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지금 저한테 만나보자고 하신 거, 맞죠…?”
운아가 되물었다. 석호가 다소 쑥스러운 듯, 헛기침을 해 보이고는 이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한 운아가 다급히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보였다. 운아의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감정에 복받친 듯 석호의 품에 안기는 운아였다. 행여 손님이라도 볼까 당황하면서도 석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 순간 마음을 다잡는 석호였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도 환하며 웃어주는 운아를 사랑하기로. 아니, 이미 사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저기… 책 포장….”
선물 포장을 요청한 손님이었다. 석호와 운아가 급히 서로에게서 떨어지며, 손님에게 예쁘게 포장된 책을 건네고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손님 역시 둘을 보며 웃음을 꾹 참고는 매장을 나섰다. 잘 어울린다는 말을 남긴 채.
*
“어머, 이건 뭐예요? 마음서가?”
“어떻게 하는 거예요?”
운아의 아이디어에 따라 새로 기획된 큐레이션인 「마음서가」는 어느덧 서점을 지키는 트레이드마크가 되고 있었다. 서점 입구에 빨간 우체통이 눈에 띄게 놓이자 꽤나 많은 손님이 관심을 보였다. 책을 선물한다는 것의 의미가 특별하다는 것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손님들은 너도 나도 「마음서가」를 찾고는 했다.
“안녕하세요.”
방학 동안 서점을 자주 방문했던 여학생이 보였다. 사복을 입었을 땐 어엿한 숙녀 같았는데, 교복을 입고 나니 유독 앳된 얼굴이 돋보이는 효원이었다. 춘추복으로 바뀐 걸 보니 이제 2학기가 시작된 듯했다.
효원이 가장 많이 찾는 서가는 문제집 코너였다. 그다음으로 청소년 소설을 좋아했고, 가끔 시나 에세이를 읽기도 했다. 늘 보고 싶은 책을 한 두 권씩 찾아와 운아에게 서가 위치를 묻는 효원이었다.
“어서 오세요. 포인트 적립 해드릴까요?”
운아는 효원과의 첫 만남을 기억했다.
“회원가입하시면 5% 적립되세요.”
“어떻게 하는데요?”
운아가 종이를 내밀었다.
“여기에 성함과 전화번호만 적어주시면 돼요.”
그런 운아의 말에 효원은 단호하게 괜찮다며 포인트 적립을 사양한 뒤, 골라온 책 한 권을 결제했다. 어려서부터 함부로 개인정보를 적지 말라는 엄마의 말이 떠오른 효원이었다. 운아의 순수한 의도를 거절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서점을 다시 찾았을 땐, 엄마 혜미가 옆에 있었다. 그때부터 두 모녀는 포인트를 적립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운아에게는 효원이 굉장히 똑 부러지는 학생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남아있었다.
포인트를 적립한 뒤, 서점을 나서던 효원이 혜미와 함께 우체통으로 시선을 향했다. 즐거워하며 이용규칙을 보다 이내 발길을 돌리는 두 모녀의 뒷모습을 보는 운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들이 서점에서 멀어지자마자 운아를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장님!”
동하였다. 그는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학업에 집중하기 위해 편의점 아르바이트 자리를 봉석에게 인수인계한 뒤로 한 번도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서점을 제 발로 찾아온 건 효원 때문이었다.
“혹시 지금 나간 여자애, 무슨 책 사갔어요…?”
효원을 향한 관심이 온 얼굴에 다 드러나는 동하를 보며 운아가 귀엽다는 듯 웃어 보였다.
*
새로운 학기의 시작은 서점에도 성수기가 다가왔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신간 도서들이 물밀듯 들어왔고, 바뀐 교과과정에 맞춰 문제집들도 전부 새로 교체되며 서점의 분위기도 분주해졌다. 오픈부터 마감까지 한숨도 쉬지 않고 일만 하는 날도 생겼다. 석호와 운아가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시간은 유일하게 점심때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요즘 운아는 유난히 점심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어있던 상가마다 새로운 상점들이 입점하면서 가보고 싶은 식당이 많아진 탓이었다.
“여기도 먹고 싶고, 저기도 먹고 싶고.”
손님이 줄어들고, 운아가 배달 어플을 켰다. 운아의 눈에는 석호와 가보고 싶은 식당 투성이었다. 뭘 먹을까 고민하는 운아의 눈빛이 반짝였다. 사실 가장 구미가 당기는 건 곱창이었다. 운아가 석호의 얼굴에 핸드폰을 들이밀어 보이며 말했다.
“오락실 옆에 곱창집 생겼는데, 되게 맛있대요!”
그런 운아의 말에 포스기 영수증을 갈아 끼우던 석호가 되물었다.
“곱창? 점심시간인데 문을 열었어?”
석호의 말대로 영업 시작시간은 다섯 시였다. 금세 시무룩해진 운아의 표정을 발견한 석호가 크게 웃어 보였다. 일상이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먹고 싶은 것을 같이 먹었고, 좋은 것을 같이 봤고, 또 하고 싶은 걸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점 빼고는. 그리고 무엇보다 석호가 자주 웃게 되었다는 것까지도. 고민 끝에 오늘의 점심메뉴는 짜장면으로 정한 둘이었다. 운아가 서점 문 앞에 팻말을 걸어둔 채 안으로 들어왔다.
『점심시간』PM13:00~14:00
오전 내내 손님들을 응대한 뒤, 모든 기가 다한 듯한 표정으로 운아가 석호를 껴안았다.
“매장에선 조심해야 된다니까-”
“뭐 어때요, 문도 다 잠갔는데?”
석호를 안은 채 가만히 눈을 감고 나면 어쩐지 운아의 마음이 편안해졌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걱정거리들이 전부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그 잠깐 사이에 석호의 품에서 잠이 들 뻔한 운아였다. 그리고 그런 운아의 행동을 제지하기라도 하듯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 오는데?”
석호가 운아의 핸드폰을 집어 들자, 운아가 화들짝 놀라며 그의 품에서 멀찍이 떨어진 채 핸드폰을 껐다. 스팸이라며 말을 얼버무렸지만 유독 당황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석호는 아무래도 이상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운아가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도망치듯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피했다.
운아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전화가 있었다. 그럴 때면 석호는 그녀를 걱정하면서도 굳이 어떤 전화인지는 묻지 않았다. 다소 의아하더라도 대수롭지 않을 거라 여겼다. 사실은 뭐가 됐든 상관없었다. 그저 자꾸만 무거워지는 자신의 마음을 애써 외면하는 것이 힘든 석호였다. 오랜만에 찾아온 감정을 참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분명 욕심이란 걸 알면서도 그녀가 자신에게 책을 선물하던 그날, 뒷일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화장실로 도망치듯 달려온 운아가 급히 상옥의 번호를 수신 차단 목록에 넣었다. 매장이 너무 바빠 잊어버린 탓이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모든 걸 솔직할 수 없다는 건, 감춰야만 하는 비밀이 있다는 건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간들이었다. 석호의 있는 그대로가 좋았기에 운아는 더더욱 자신의 콤플렉스를 감춰야만 했다. 모아둔 돈 한 푼 없는 자신을,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았던 자신을, 그리고 지금 반드시 외면해야만 하는 가족이라는 존재를.
절대 들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운아가 다시 매장으로 향했다. 가장 마음이 편해야 할 사람 앞에서 점차 마음이 불편해지고 있는 운아였다.
운아가 마음을 가다듬고 나왔을 땐, 석호가 배달된 음식을 테이블에 세팅하고 있었다.
“얼른 와, 먹자.”
어정쩡하게 서있는 운아를 보며 석호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건넸다.
“맛있겠다!”
그런 석호의 앞으로 운아 역시 환하게 웃어 보이며 자리에 앉았다.
“이제야 말하지만, 사실 난 처음부터 사장님한테 호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랩핑 된 짜장면 그릇을 뜯으며 운아가 말했다.
“그런 나한테 왜 그랬어요?”
“내가 뭘?”
석호의 눈이 운아를 향했다.
“내 마음도 몰라주고, 처음에 혼자 좋아하게 했잖아요-”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운아를 보며 석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석호의 눈에 왜 웃냐는 표정으로 나무젓가락을 입에 무는 운아가 귀여워 보였다.
“불겠다, 얼른 먹어.”
“잘 먹겠습니다-”
운아가 입안 한가득 음식을 넣고는 석호에게도 얼른 먹으라고 손짓했다. 그는 신기하게도 안 좋은 일을 생각나지 않게 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좋아해 주는 기분…. 이 사람이라면 나의 모든 걸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을까? 운아는 그저 함께 있는 이 시간을, 이 공간의 냄새를 마음속에 담기로 했다. 앞으로 그와 함께 할 날이 더 많을 테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간들이었다. 석호의 있는 그대로가 좋았기에 운아는 더더욱 자신의 콤플렉스를 감춰야만 했다.
매일 같은 공간에서 얼굴을 보고, 시간을 보내며, 밥을 먹는 일…. 생각보다 단순한 일상이었지만 둘은 이 모든 것에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더 이상은 사장과 직원이 아닌 남자와 여자로, 서로를 향한 감정은 하루가 다르게 커져갔다. 매장 문을 닫은 뒤 같이 영화를 보고, 드라이브를 하는 등 둘을 감싼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러다 유난히 집에 들어가기 싫은 밤이면 석호네 집에서 과자를 먹으며 예능프로그램을 보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운아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석호에게는 선명을 닮은 그녀를 향한 죄책감의 그늘이 드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