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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아 Sep 17. 2024

서가정리

06 석호와 운아


 “어, 나 지금 선월동 계절서점. 말도 마, 지금 오픈 전이라 책 나른다고 정신없어. 아무튼 나 바쁘니까 끊어봐- 아, 이거 한두 번으로는 안 되겠는데?”

 휴대폰을 어깨로 받치고 있던 영일이 이내 트럭에서 책을 내려 열심히 카트 위로 겹겹이 쌓았다. 찬바람이 세게 부는 2월이었지만, 영일은 목에 건 핸드타월로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내었다. 흠뻑 젖은 등판을 내보이며 영일은 계절서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     


 서점 안에선 운아가 열심히 입고를 잡고, 석호가 카테고리별로 책을 분류했다. 운아가 바코드를 찍어 옆으로 책을 쌓으면, 석호가 서가별로 책을 꽂는 작업이었다. 이윽고 바퀴 끄는 소리가 가까워지며 카트를 끌고 들어오는 영일이 보였다. 책을 분류하던 석호가 하던 일을 멈추고, 영일에게 다가가 산처럼 쌓여있는 책을 함께 내리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생을 한 명 쓰지 그래? 돈도 많은 사람이. 이럴 때 돈 좀 써!”

 영일이 투정을 부리듯 석호에게 말했다.

 “내가 무슨 돈이 많아요, 이 형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런 석호의 반응에 영일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운아에게 물었다.

 “사장이 밥은 잘 사줘요?”

 “네, 잘 사주세요.”

 운아도 책을 정리하다 말고 영일의 말에 대답했다.

 “힘들면 그냥 때려치워버려- 돈 더 내놔, 사장놈아! 해-”

 농담 반 진심 반으로 실없이 얘기하는 영일의 말에 운아가 웃어 보였다.     


 오픈을 앞둔 한 달 동안은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정신없는 날들이 연속되었다. 단행본과 문제집, 만화책 등 종류별로 책이 들어오면 입고를 잡고 분류를 해 각 서가별로 꽂는 작업이 반복됐다. 가장 일이 많았던 건 총판과 직원을 챙기면서 매장관리까지 해야 했던 석호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꼭 운아의 식사와 휴게 시간을 챙겨주려 노력하는 사장이었다. 그런 석호의 모습에 운아는 처음으로 소속감을 느낄 수 있었다.

 “직원 잘 뽑았다, 야. 사장이라고 벌써 편드는 거 봐-”

 영일이 눈꼴시다는 표정으로 석호를 흘겨봤다.

 “근데 쟤 되게 재미없죠?”

 영일이 아예 운아에게 다가와 비밀스러운 얘기인 듯 귓속말을 건넸다.

 “쟤가 일만 할 줄 알지 말은 또 무지하게 못 하거든.”

 원래 직원들끼리는 사장을 욕하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며 속삭이는 영일이었다. 그리고 이를 귀신같이 알아챈 듯 그들의 뒤로 석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거기! 농땡이 좀 그만 피우고 얼른 책이나 내리지?”

 “예, 예! 강사장님- 갑니다!”

 석호의 말에 구시렁거리면서도 이내 못 이기는 척 다시 책을 가지러 카트를 끌고 서점을 나서는 영일이었다. 

 “이거 책만 꽂다가 서점 질려서 일 그만두게 되면, 무지 억울할 거 같은데?”

 영일의 쉬지 않는 수다 덕분에 일하는 분위기가 다소 풀어졌다.     


*     


 “오빠들- 힘들 텐데, 한 잔씩 마시고 들 하셔.”

 퇴근을 앞두고 마무리 정리를 하고 있는 서점으로 한 여자가 들어왔다. 큰 키에 날씬한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는 미화였다. 길고 풍성한 웨이브머리와 진한 화장이 그녀의 얼굴을 더욱 화사하게 만들고 있었다. 운아는 그런 그녀의 이미지가 어쩌면 서점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영일은 늘 있는 일인 듯 자연스레 그녀의 양손에 들린 미숫가루를 받아 마셨다. 석호 역시 미화를 힐긋 보고는 ”왔어?” 인사를 건넨 뒤 하던 일을 마저 이어갔다. 미화가 인테리어를 마친 서점 안을 둘러보며, 연신 예쁘다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다 한쪽 벽면에 서있는 운아와 눈이 마주치는 미화였다.

 “어? 새로운 언니야네?”

 운아가 살짝 고개인사를 건넸다.

 “직원 뽑았어. 여긴 꽃집 언니, 인사해.”

 미숫가루를 원샷한 영일이 대답했다.

 “홍미화예요. 잘 부탁해요- 편하게 미화언니라고 불러도 좋고. 앞으로 자주 볼 거니깐?”

 미화가 큰 손으로 운아에게 악수를 건넸다. 낯을 전혀 가리지 않는 미화가 신기한 듯 운아가 놀란 토끼눈이 되어 꾸벅 인사를 건넸다. 그런 운아를 향해 방긋 웃어 보이며 다른 손에 든 미숫가루를 건네는 미화였다. 석호는 안 줘도 된다며 장난스레 코를 찡긋해 보이는 미화의 성격은 시원시원했다.

 “솔직히 말해봐, 이거 미숫가루 아니고 홍삼이지?”

 “어떻게 알았어? 사실은 오빠 거에만 홍삼 탄 건데- 들켰네!”

 미화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영일의 가슴에 어깨를 툭 갖다 대며 말했다. 영일이 미숫가루 덕에 힘이 난다며 다시 열심히 카트를 옮기기 시작했다. 분주하게 돌아가는 서점을 보며 아쉬운 듯 입술을 삐죽 내밀어 보이는 미화였다.

 “오늘은 나랑 놀아줄 시간들 없겠네- 다음에 셋이 같이 놀러 와요, 우리 집 떡볶이 맛있어.”

 미숫가루를 마시는 운아에게 미화가 다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잠시 자리를 지키던 미화가 서점을 떠나고, 영일 역시 배송을 다녀오겠다며 미화의 뒤를 따라 나갔다. 석호와 운아만 남은 서점에는 다시 적막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 정적을 깬 건 운아였다.

 “미화언니네 꽃집에는 음식도 파나 봐요.”

 그런 운아의 질문에 말없이 일을 하던 석호가 별다른 대답 대신 보일 듯 말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순간 그의 웃는 얼굴을 처음 본 운아가 멈칫했다. 생각보다 웃는 얼굴이 예쁜 석호였다. 그의 미소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운아는 더 이상의 질문은 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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