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세어라
전에 간간히 언급한 적이 있지만 글이 혹시 무거워질까 봐 깊게는 다루지 않았던 주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정신건강. 해외에 나와 살면서 멘탈이 갈릴 일들이 꽤 많은데 그 속에는 항상 불안, 외로움, 지침 등이 있다.
유학생으로 오게 된다면 학생 때까진 사실 버틸만하고, 버틸만한 것을 넘어서 꽤나 즐겁다. 과제는 힘들겠지만 학교라는 울타리가 있고, 부모님께 경제적으로 서포트를 받는다면 딱히 걱정할만한 것이 없다. 유학을 준비하며 그토록 꿈꿨던 새로운 환경과 학교, 기숙사 생활, 자유, 방학 때마다 갈 수 있는 여행이 그저 신나고 즐겁다. 물론 생활비와 용돈이 아주 여유로운 편이 아니라면 적정선에서 잘 아껴가며 써야겠지만, 돈 관리만 할 줄 안다면 힘든 것은 아니다.
나는 처음 미국에 왔을 땐 아버지께서 주신 신용 카드를 쓰다가, 내가 얼마를 썼는지도 모르겠고 돈을 모을 수도 없어서 필요한 금액을 계산한 뒤 부모님께 용돈을 받는 것으로 변경했다. 이게 부모님께는 돈이 조금 덜 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카드를 쓴다면 쓸 때마다 마음에 짐이 느껴지긴 하겠지만, 카드에 한도 말고는 스탑버튼은 없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해서 용돈을 받게 되었고, 나는 만일을 대비해서 조금씩이라도 모아두고 싶었기 때문에 더욱 아껴 썼다. 미국의 학비가 비싸고, 비자 관련해서도 경제력을 증명해야 하는 게 있으니 어느 나라에서든지 미국으로 유학을 오는 유학생들은 대체로 본국에서 풍족하거나 부족함이 없이 살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도 비싼 물건들을 턱턱 사거나, 명품을 두르고 다니거나, 학교 밀플랜이 있음에도 음식이 질린다며 거리낌 없이 자주 외식을 했다. 나는 용돈을 모으느라 외식은 한 달에 한두 번 할까 말까 했고, 우버도 비싸서 걸어 다녔다. 차를 타면 10분, 15분이면 가는 걸 나는 시간을 희생하되 세이빙 하는 것을 선택해서 3-40분 혹은 한 시간도 걸어 다녔다. 밤엔 위험해서 밖에서 걸어 다닐 수가 없으니 나가질 않았다. 그렇게 당연하게도 기숙사-학교-기숙사-학교만이 나의 루틴과 일상이 되었다. 지루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걸어 다니면서 보는 운치 있는 풍경들, 나무들, 집들, 스쿨버스에서의 낭만들 등등의 소소한 기쁨이 있었기에 내게는 힘들어도 좋았던 기억들로 남아있다.
아래는 필자가 걸어 다니면서 찍은 사진들이다.
학교 건물들이 도시 전역에 띄엄띄엄 떨어져 있어서, 학교에선 스쿨버스를 운영했다 (노란 스쿨버스 아님). 버스 노선도 여러 개가 있었고, 버스들을 추적할 수 있는 앱도 있었다. 외관은 뭔가 튼튼할 것처럼 생겼는데, 막상 타고나면 창문이 느슨히 고정되어 있는지 창문 흔들거리는 소리가 정말 시끄러웠고 흔들림이 굉장히 많았다. 그래도 스쿨버스 덕에 꽤나 편히 돌아다닌 것은 사실이다. 만약 스쿨버스가 없었다면 난 아마 걸어 다니느라 말라죽지 않았을까.
스쿨버스에선 간간히 로맨스도 일어난다. 어느 평범한 날, 수업을 들으려 스쿨버스로 이동 중이었고 도착지에 다다라서 내릴 준비 중에 내 앞에 앉은 어떤 남자아이가 용기를 낸 듯 자기 핸드폰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화면을 들여다보니 글이 쓰여 있었는데, 읽어보니 자기소개가 있었다. 본인의 이름은 무엇이고, 어느 학과에 다니며 어떤 것에 관심사가 있는지 적혀 있었고 나와 알고 지내고 싶다며 내 연락처를 물어보는 글이었다. 이때만 해도 영어에 어려움이 있던 때라 읽느라 시간이 조금 걸렸었는데, 다 읽고 나서는 '이렇게 번호를 물어보다니...! 이게 바로 스쿨 로맨스지. 정말 풋풋하고 귀엽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미국에 발을 내딛기 전부터 이미 남자친구가 있었고 (남편) 쭉 연애 중이었으므로 남자친구가 있다고 미안하다며 거절했다.
기숙사에선 미국인 학생들 네 명과 같이 지냈는데, 애들이 겨울에도 에어컨을 틀어놓고 여름에도 추울 정도로 에어컨을 틀어대서 항상 얼어 죽는 줄 알았다. 온도를 올리거나 에어컨을 끄면 귀신같이 알고는 다시 내려놓더라. 기숙사 매트리스는 또 어찌나 딱딱하고 얇은지, 병원 간이침대만도 못한 매트리스였다. 이렇게나 학비와 기숙사 비용이 높은데, 시설이 이지경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나랑 방을 셰어 하던 미국애는 부모님께서 매트리스 타퍼, 두툼한 이불, 쿠션 등등을 모조리 가져오셔서 되게 좋아 보였는데, 나는 월마트에서 산 싸구려 침구세트 (10-20불짜리 팩 하나에 이불, 시트, 베개 등등이 들어있다.)로 1년을 버텼다. 물론 뭐든지 사려면 살 수는 있었다. 하지만 내겐 돈을 세이빙 하는 것이 더 중요했고, 기숙사는 그저 거쳐가는 곳이며, 돌아갈 집이 없는 나는 물건이 늘어나면 처치가 힘들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냥 몸으로 때우는 걸 선택했다. 부모님께서 이걸 아시면 속상해하시겠지만, 나도 그러실걸 알기 때문에 이런 거 하나하나 굳이 말하지 않았다.
미국에선 일찍 결혼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도시에서 멀리 벗어난 외곽 지역 혹은 작은 마을(시골?)에서 그런 경향이 더 나타나는 듯했다. 나의 suitemate 중 한 명도 그중 하나였는데, 22살이었음에도 벌써 결혼을 해서 남편이 있었다.
혹한기 같던 기숙사에서의 1년이 끝나고, 계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었다 (우리 학교의 기숙사는 1년마다 신청을 할 수 있고, 계약 또한 1년 동안 유효하다. 중간에 끝내고 나가버리면 페널티를 내야 한다). 기숙사 비용+밀플랜(강제)이 퀄리티에 비해 대단히 비쌌기 때문에 off-site로 살기로 결정하고, 이사를 나가게 된다. 다른 도시에서의 새 출발을 생각하며 학교 캠퍼스 또한 옮기고 이사를 갔기 때문에, 그 새도시에서는 어떤 동네가 좋은지 나쁜지도 모르고 이사를 가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위험한 동네는 아니었어도 네이버후드가 시골 같은 좀 낙후된 동네로 집을 계약하게 되었다. 기숙사에서의 생활을 경험했던 나는 이마저도 너무 기뻤고, 이 집에서 살게 된 것이 업그레이드나 마찬가지였다.
이 집에서 2년간을 (계약 때문에) 지내게 되는데, 그 안에 꽤 많은 일들을 겪게 되었다. 집 뒷마당엔 펜스가 없어서 교육받지 않은 이웃집 아이들이 우리 집 뒷마당까지 넘나들며 놀고, 다른 사이드의 옆집에선 닭들이 돌아다녔다 (ㅋㅋㅋ). 게다가 차고는 지하실이었는데, 옆집에서 키우는 개 때문인지 벼룩들이 살았다. 어느 순간부터 발목부근만 자꾸 간지럽고 동시 다발적으로 벌레 물린 흔적들이 있어서 알게 되었고, 그 후론 지하실에 갈 일이 있으면 버그 스프레이를 뿌리고 긴팔 긴바지를 입고 가게 되었다. 또 집 뒤쪽 수풀이 우거져있어서 벌레가 많은데, 그중에 바퀴벌레와 지네도 만나봤다.
이곳에서 있던 일들을 쓰면 하루 종일 쓸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여기서 멈추고 다시 학교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때쯤이 아마 3학년쯤이었을 것 같다. 슬슬 다른 미국애들은 방학 때 인턴쉽도 하고 하는데, 나는 유학생 신분이기 때문에 인턴쉽을 하려면 CPT 혹은 인턴쉽을 크레딧으로 대체할 수 있는 수업을 신청해야 했다. 그 당시의 나는 CPT가 뭔지 몰랐고, 복잡해 보여서 신청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인턴쉽을 크레딧으로 대체 가능한 수업은 말 그대로 수업이기에 내가 학비를 내고 일을 하는 셈이었다. 둘 중 무엇이 되었든 내가 인턴쉽을 찾아야 하고, 인터뷰도 봐야 하는데 그 당시의 나는 포트폴리오조차 준비되어있지 않았고 돈이 아깝다고 느껴져서 마음을 접고 미래의 졸업한 나에게 미루기로 했다.
집 렌트 계약날짜인 2주년이 다가오면서 이 이상한 동네에서의 생활은 점점 끝이 보였다. 주의를 주었음에도 뒷마당에는 여전히 이웃집 애들이 가끔씩 넘나들었고, 나는 항상 창문에 블라인드를 쳐놓은 상태로 지냈다. 어찌 되었든 이제 곧 상관 없어질 사람들이니까 신경을 끄고 내 할 일만 하며 지내던 무렵, 코로나가 터졌다. (관련글 클릭) 이사는 가야 하는데, 이상한 동네에서 살면서 스트레스를 받은 게 있었기 때문에 좋은 동네로 가고 싶었지만 나는 돈이 없었다. 가지고 있는 물건도 많이 없었고 차도 없었다. 졸업은 두 학기 정도 남은 시점이었고, 미래는 불분명했기에 내게는 단기 계약 가능 + 몰까지 걸어 다닐 수 있는 인프라가 갖춰진 좋은 동네 + 그나마 형편에 맞게 렌트비를 내며 살 수 있는 룸렌트가 가장 알맞은 조건이었다. 그런 조건들을 찾아 헤매다가 딱 맞는 곳을 찾았고, 그곳이 mall 근처의 게이트가 있는 타운하우스 커뮤니티에 사는 젊은 백인 부부의 집이었다.
그곳으로 룸렌트를 (룸렌트란, 집주인에게 매달 돈을 내고 방 한 칸에 세 들어 사는 방식이다.) 들어가는 것으로 계약을 하고, 계약서를 작성하고 (룸렌트는 계약서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는 곳이 많다), 디파짓을 넣었다. 이삿날이 되어서는 혼자서 짐 정리를 하고, 집 청소를 하고, U-Haul에서 난생처음으로 9ft cargo van을 빌려서 이삿짐을 나르고 운전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 큰 카고 밴을 운전하는 게 조금 무서웠다. 하지만 어쩌랴, 이 일을 할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는걸. 긴장은 했지만 의지할 곳이라고는 나 자신밖에 없으므로 용기를 내서 렌트를 했고 운전했다. 짐을 꾸리고 카고 밴에 집어넣는 것은 나 혼자 했지만, 새 집으로 짐을 옮기는 것은 친구 한 명의 도움을 받아서 옮기고 이사를 마쳤다.
그곳으로 이사를 하고 보니, 전에 살던 동네와는 같은 도시가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분위기였다. 1층은 모두 내 차지였어서 공간도 넉넉했고, 뒷마당도 있었으며 게이트가 있는 타운 하우스 커뮤니티에 집주인들까지 한 지붕 아래에 있었으므로 그곳에서는 안전함과 여유로움을 느꼈다.
젊은 미국인 부부도 상냥하고 좋았다. 방 위층에는 집 전체의 공용 주방과 거실이 있었는데, 그곳에 여주인 전용의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 여주인이 흔쾌히 마음대로 쓰라고 해주어서 가끔씩 피아노를 치기도 했다.
비록 룸렌트였지만 사진으로 보이듯 꽤나 좋은 곳이었고 그럭저럭 살만해서 괜찮다고 생각할 찰나,
BLM이 터졌다.
이어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