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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나를 살린 글쓰기.

브런치와 함께 이룬, 그리고 이루고 싶은 꿈

by 돌콩

“오~ 코끼리 로봇이 춤을 춘다~ 이것 좀 봐~~ 까르르 까르르”

“뽀롱뽀롱 뽀로로~~~ 까꿍~~”


밤마다 별별 쑈가 벌어졌다. 웃기는 사람도 눈물, 콧물 줄줄 쏟아내고, 그 쇼를 보고 있는 아이도 울며 발악을 했다. 돌이켜보면 어떻게 그 시간들을 견디어 냈나... 싶을 만큼, 아이는 변을 줄줄 지릴 정도의 극한 고통을 감당하고 있었다.


수포성표피박리증.


아들은 난생처음 들어보는 희귀 질환을 가지고 태어났다.

아이를 낳다 자궁무력으로 인한 과다출혈로 저세상을 갈 뻔 한 나는, 중환자실을 거쳐 일반 병실로 내려와 몸을 조금 회복할 때까지, 한 달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사진으로라도 아이를 만나지 못했다.

남편과 시어머니가 아이의 질환을 꽁꽁 숨긴 사연은 뒤로 하고, 여하튼 아이의 아픈 사정을 알지 못한 채, 제 몸 회복에 신경 쓰던 엄마는 40여 일이 지나서야 아이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온몸이 특수 드레싱 폼에 감싸져 안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채로.


의사에게 아이의 치료에 필요한 드레싱 방법 등을 교육받고, 집으로 돌아온 그날부터 우리에겐 지옥의 문이 열렸다.

아침, 저녁으로 아이를 치료해주어야 했는데, 풍선처럼 부푼 수포를 바늘로 쭈욱 찢으면 뜨끈한 물이 흘러나왔다. 어떤 날에는 핏물이 얼굴에 튀기도 했고, 아기 손톱이 툭 떨어져 나가기도 했으며, 살갗이 익은 복숭아 껍질처럼 벗겨져 심장을 훅! 떨어지게 만들기도 했다. 한 번 드레싱을 시작하면 두세 시간은 족히 걸렸다. 고통에 울던 아이가 울다 지쳐 축 늘어진 상태로 멍한 눈을 할 지경이 되면, 그제야 드레싱이 끝나 허리를 펼 수 있었다.

산후조리는커녕 온 신경을 다 하여 허리를 숙이고 치료한 나는 몸 곳곳이 망가져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날마다 지옥이었다.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이를 낳다가 그때 내가 죽어서 지금이 지옥에 있는 게 아닐까?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눈을 감으면 끝이었으면 했다.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었다. 걱정할까 봐 친정 식구들에게는 전화할 엄두가 나질 않았고, 친한 친구나 마땅히 전화할 곳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제발 이대로 아이와 나를 데려가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 날도 여러 날.


그러다 블로그를 알게 됐다. 그리고 거기에 아이를 치료하며, 아픈 아이를 키우며 느끼는, 누구에게도 말하기 어려웠던 감정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이가 너무 대견하다. 엄마도 아이도 힘내라”는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어느 지나가던 이웃의 격려글을 보고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나는 글로 감정을 쏟아내고, 모르는 이웃에게 위로를 받으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십여 년이 흐르고, 나와 아이는 죽지 않고 살아 ‘일반인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매 순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고, 매일 같이 치료하는 날들이 이어졌지만, 그래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 아이가 자라서 중학생이 되고, 스스로 달걀프라이와 우동을 끓여 먹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다시 일이 하고 싶어 졌다.


아이를 낳기 전 나는 방송작가로 일했다. 글이라는 건 그러니까 20대 나의 밥벌이 었고, 아픈 아이를 키우던 30대 나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러나, 다시 전문직 여성으로 당당히 서고 싶었을 때는 이미 경력단절 10년 이상. 일하고 싶다는 욕망은 강했지만, 마땅히 일할 곳을 찾을 수 없었다. 그 때, ‘브런치 스토리’를 만났다.


‘일단 뭐라도 써 보자.’


나는 브런치스토리에 나의 일상을 담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일종의 쓰기 연습? 몸풀기 같은 거였다. 너무 신기하고 감사하게도, 브런치 스토리가 나의 글을 다음(DAUM) 메인 화면에 노출시켜주고, 1천 명~2천 명... 많게는 몇십만 명이 나의 글을 봤다는 알림을 받게 되었다. 그런 경험들은 계속 글을 쓰게 했고, 자신감을 주었다. 사회에 나간 지 오래되어 생기는 두려움, 무엇을 다시 할 수 있을지 모를 막막함... 이것이 ‘브런치 스토리 작가’라는 한 개의 타이틀 추가로 조금 해소되는 것도 같았다.


어느 날, 지역 한 온라인 신문사에서 에디터를 구한다는 공고를 보게 됐다. 며칠을 고민 고민 하다가 이력서 한 페이지에 그동안 내가 브런치 스토리에서 작성한 글의 제목과, 잘 나온 뷰 수를 정리해 목록을 만들었다. 한마디로 “나 이렇게 뉴스 기사도, 사람들이 많이 보도록 쓸 수 있어!”를 입증할 하나의 자료를 만든 셈이다.

그리고 그 이력서로 당당히, 나는 신문사 에디터로 전문 글을 쓰는 기자가 되어 2년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일이 바빠서 또 상대적으로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올리는 일은 뜸해졌지만...


어느 날, 나를 면접 보았던 회사 부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오랜 기간 경력단절이던 나를 어떻게 선택하게 되었냐"는 질문에 그는, 이력서와 함께 첨부했던, 그동안 내가 방송작가로 써 온 대본이 흡족했고, 거기에 더해 이력서에 담긴 내용들이 그간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라는 걸 보여줬다고 말했다.

그렇게 브런치스토리는 내가 제2의 직업을 찾는데 키포인트가 되었다. 그러니 어찌 고맙지 않을까.


지금은, 몇 해 전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칠 때 브런치 스토리에 내 감정을 쏟아내고 있다. 누군가. 나처럼 보고픈 이를 볼 수 없는 사람들이 함께 공감하고, 울고, 감정을 털어내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길 바라면서...

브런치스토리와 함께 한 가지 꾸는 꿈이 있다면, ‘아버지’의 인생을 담은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일이다. 50년 지기 친구를 잃고 하루하루를 눈물로 버티고 있는 엄마에게, “그동안, 잘 살아왔다고” 아버지 이야기를 담은 영화로 위로해 주고 싶어서다.


내가 살아갈 이유가 되고, 나를 살게 해 주며, 나를 응원해 준 글쓰기.

지금 꾸고 있는, ‘아버지의 일생을 담은 영화 대본 쓰기’의 꿈도... 여기, 브런치 스토리에서 찬찬히 이루어 나갈 것이라고.

이 소중한 공간이 다시 한번. 그리하여 엄마를 웃게 하고, 내가 살아갈 이유가 되어줄 것이라 믿으며 오늘도 여기에 끄적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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