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돌콩 Oct 30. 2022

전다해 여사가 아니라서 죄송합니다.

마흔 넷_무릎 탁! 그 이름의 뜻이 그런 것이었다니!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은 아직도 만화영화 '헬로 카봇'을 좋아한다.

 매일 보는 그 만화영화가 지겹지도 않은지, 아들은 어제 봤던 카봇을 오늘 또 본다. 이제는 하도 많이 보아서 만화 속의 대사를 내가 다 외울 지경이다.


 만화의 주인공은 초등학생 차 탄으로, 남극 세종기지에 가 계신 외할아버지가 보내온 선물 '큐브'를 받게 된다. 그 큐브를 돌리며 헬로 카봇을 외치면 자동차 모양을 한 변신로봇 카봇이 나타나 차탄의 부탁을 들어준다는 내용이다. 차 탄의 아빠는 차 산 형사이며, 탄이의 엄마는 전 다해씨다. 차 산 형사 덕에 우리 아들의 꿈은 경찰서장이 되었고, 탄이의 엄마 때문에 아들은 자꾸 자기 엄마_나_의 자격증을 신경 쓰게 되었다.


 전다해 여사는 못하는 게 없는 슈퍼 우먼이다. 아들 차탄의 말에 따르면 엄마의 자격증은 무려 500개! 어떤 때는 경호원이 되었다가 어떤 때는 산모 도우미가 되었다가, 공사현장 크레인을 몰았다가 _물론 급한 성격 탓에 결과는 좋지 않은 편이지만_ 못하는 게 없는데, 그럴 때마다 촤르륵~ 자격증 카드를 늘어 뜨리며 보여준다.


 아들의 눈에는 그 많은 자격증이 대단해 보였나 보다. 어느 날 아들이 당연히 엄마라면 자격증 몇 개정도는 가지고 있겠지 하는 얼굴로 물었다.


-엄마는 자격증 몇 개 있어?

-엄마? 엄마.... 도 논술 지도사 자격증, 창의 수학 지도사 자격증, 독서치료사 자격증, 운전 면허증...


 아들에게 '엄마는 자격증이 몇 개나 있어?'라는 질문을 받고 나니, 마치 전다해가 아닌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치열한 20대를 보냈고, 아이를 키우느라 본의 아니게 경력 단절이 되었지만, 육아를 하면서도 게을러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블로그에 글도 꾸준히 쓰고, 무료 자격증 취득을 위해 수업을 듣고 나름 노력하는 삶이었는데, 자격증의 개수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것이었다.  


 나는 지난 10년간 틈틈이 마련한 _물론 공짜로_ 자격증을 모두 말해주었다. 사실 아이를 키우며 자격증을 딴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님을 엄마들은 안다. 게다가 쓸만한 자격증_예컨대 취업에 도움이 될만한_은 돈 백은 족히 들여야 딸 수 있다는 것도.

 전업주부에게 그것은 큰 돈이다. 그래서 무료로 딸 수 있는 자격증을 주로 선택하게 되는데 사실 그것들이 경.단.여 취업을 위해서 크게 도움이 되진 않더라._아, 물론 나만. 나의 노력 부족일 수도 있다.


 아들에게 '엄마는 자격증 몇 개 있어?'라는 말을 들은 그날 저녁, 아들이 카봇을 보며 밥을 먹는데 문득 차탄이의 엄마 전다해의 이름이 다할 줄 아는 사람이라~ '저는 다 해요'의 전다해구나 하고 무릎을 탁! 쳤다.

관심이 없으니, 그게 그건줄 이제야 알다니!

 나는 한참 재밌게 만화를 시청중인 아들에게 현실감이 없는 만화영화라고 소릴 했다. 저 많은 자격증을 따려면 돈이 얼마나 드는 줄 아냐고. 쓸만한 자격증 500개를 따려면 아마도 현실에서는 파산했을 거라고.


 주변에 정말 열심히 사는 40대가 있다.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고, 보육교사 자격증을 따고, 제과제빵 자격증을 딴 후, 얼마 전에는 앙금 플라워 자격증을 땄다. 그 외에도 내가 모르는 자격증이 여러 가지 더 있는 것으로 안다. 매번 백만 원 이상의 비용이 발생했다고 들었다. _물론  무료인 것들도 있을테지맛.

 그는 미라클 모닝을 한다고 새벽에 일어나 강의를 듣고, 오전에는 글쓰기를 한다.  얼마 전엔 어린이집 시간제 교사로 들어가 일을 하고 글쓰기 모임에서 공동으로 책을 출간했다. 그의 삶은 늘 바쁘고, 그의 눈은 늘 잠을 간절히 요구하고 있었으며, 매일을 피곤해했다.

 그이처럼 파산을 하지 않고도 여러 개의 쓸만한 자격증을 딸 수는 있다. 늘 노력하는 그의 모습이 한편으론 부럽고, 자극이 되기도 했고. 하지만, 사람에게는 저마다 사정이 있지 않은가. 내게는 쓸만한 자격증을 딸 돈이 단 일원도 없다. 희귀 질환을 갖고 태어난 아들이 언제 어디서 다치기라도 하면 바로 달려가야 하는, 5분 대기조의 마음으로 살면서 무언가를 진큰하게 배울 맘의 여유도 없고.  때문에 자격증을 따려면, 최소한 앞으로 무언가를 하겠다는 결론이 서고 난 다음, 그것에 필요한 자격증을 따고 싶은데 사람들은 그 결심이 언제 서는 것이냐며 일단 무어라도 시작하라고 권하는 것이다.


 이제는 일을 해야 하지 않겠냐는 사람들의 말은, 나의 자존감을 바닥으로 꾹꾹 짓밟아 일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요즘 컵 케이크 만들어서 파는 사람들도 돈 많이 번다던데? 넌 손재주 좋으니까 한번 해 봐.

-사회복지사 자격증이나 따 봐.

 

 안다. 대부분이 나를 걱정하고, 나를 위해 하는 말이라는 것을. 일을 시작하지 못하는 데는 저마다 사정이 있다.  그런데 그 사정도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면 '무능함'으로 둔갑한다. 내게 어떤 사정이 있었든 간에, "이제는 일을 해야 하지 않아?"라는 사람들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일을 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테두리 안에 갇혀 버린다. 그래서 나 스스로도 무언가를 시작해야겠다는 압박을 느끼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음에 불안해지곤 하는 것이다.


 현실 속 전다해는 존재하지 않는다. 전다해가 되려고 노력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내가 잘할 수 있는 한 가지를 찾고 싶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싶다.

 누군가는 또 말하겠지. 이제는 마흔이 넘었다고. 마흔에는 새로운 직업을 찾고 노력하기에는 늦다고. 당장 무언가를 시작해 달려가도 모자를 나이라고.


 무엇이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지금 가장 답답한 사람은 다름 아닌, 마흔다섯을 향해 가고 있는 나란 사실이다! 그러니, 여러분. 마흔에는 그러면 안 된다던가, 시작이 반이라던가, 어설픈 독려로 나를 아프게 하지 말지어다. 충분히 두렵고, 충분히 불안하다. 경력단절이 오래돼 가고 있는. 집에서 '엄마'로 지낸 시간이 '경력'직 여성으로 지낸 시간을 넘어가는 경단녀 마흔은 알 것이다.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불안한 나이 마흔.

 그래도 우리는 고민하자.

 한번 시작하면 멀리 가야 한다. 실패가 두려운 나이기 때문에 시작을 고민하는 것이 뭐 어때서! 괜한 말에 자존감 떨어뜨리지 말자. 충분히 고민하고, 준비하고, 시작하자! 그렇다고 너무 늦지는 말고.







매거진의 이전글 피 같은, 피를! 헌혈하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