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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콩 Dec 08. 2022

여전히 통장잔고는 0원.

마흔넷_결혼 14년 차, 변치 않는 통장 잔고에 대하여.

 "아이 유치원 셔틀버스비 3만 원을 내야 하는데,  돈이 하나도 없는 거야. 가진 통장을 다 털었지. 삼천 원을 빼고, 7천 원을 빼고, 잔고를 긁어모아서 겨우 3만 원을 만들었어."

 "쌀이 똑 떨어진 거야. 내일이면 굶게 생겼더라고. 그런데도 누구한테 돈 빌려 달라고 입이 안 떨어지는 거야."

 "50원 때문에 카드 회사에서 독촉 전화를 받았어. 50원을 낼 돈이 없더라고. 상담원도 어이가 없었을 거야."


가끔 내가 이런 얘길 하면, 듣는 사람들 대부분 할 말을 찾지 못하곤 한다. 80년 대도, 90년대도 아닌 21세기 한 아이를 키우는, 나의 이야기다.




 나는 계획에 없던 결혼을 했다. 일을 그만두고 긴 유럽여행을 떠났다 막 돌아왔을 때, 지금의 시아버지인 남자 친구의 아버지께서 폐암으로 입원해 계셨다. 수술은 잘 끝났다 하였지만,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으니 살아계실 때 결혼을 시키고 싶다며 우셨고_지금은 건강히 살아계신다_, 그 눈물에 속아 나는 예정에 없던 결혼을 서두르게 되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친정에서는 결혼을 반대했지만, 눈에 콩깍지가 씌워졌던 나는 보란 듯이 결혼식을 밀어붙였다. 남편을 부모님 눈에 들게 하려고 거짓말도 많이 했다.  남자 친구가 결혼 선물로 사 드리는 거라며 실은 내 카드를 긁어 친정에 김치냉장고를 보내고, 집은 걱정하지 말라던 시어머니가 남편에게 올 대출로 전셋집을 마련하게 했어도 시댁에서 집을 해 주셨다고 친정 부모님을 안심시켰다.

 모아놓은 돈이 없이 결혼을 진행하다 보니 믿을 건 카드밖에 없었다. 살림살이를 사고, 가구를 들이고, 신혼여행을 준비하고, 그러면서도 친정부모님껜 남편이 다 준비했다고 뻥을 쳤다. 내가 미쳤지!

 

 신나게 긁어댄 카드값의 여파는 신혼 첫 달부터 슬슬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일에 복귀했고, 다달이 카드값이 한 사람의 월급만큼 나갔어도 큰 걱정 없이 살았다. 둘 중 누구 하나 알뜰살뜰 아끼고 모으는 사람은 없었지만 펑펑 써대는 사람도 없었다. 둘 다 열심히 일했고, 일한 만큼 카드빚을 갚아내고, 가끔 여행도 가면서 신혼을 즐겼다.

 위기는 임신의 순간 찾아왔다. 예상치 못한 임신을 확인한 날, 아들에겐 참 미안한 말이지만, 속상해서 울었었다. 막 승진을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임신이야.라고 전화를 하자 3초간 침묵이 이어졌었지. 우리 둘 다 그렇게 마음도, 경제력도 준비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 아이를 가지게 되면서 정신 차리고 더 아끼고 모으기 시작했지만 그런다고 열 달만에 아이를 맘 편히 키울 만큼 저축이 되는 건 아니었다. 더군다나 아이가 희귀 질환을 가지고 태어나 신생아 집중치료실에서, 보험적용이 되지 못하는 치료용품을 사용하면서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나도 양심이 있지, 아무리 어려워도 친정에는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다. 그럼 시댁은? 하... 이 부분은 일단 생략하기로 하자. 어쨌든 마이너스 통장, 보험 약관대출받기, 카드 현금서비스받기, 카드 최소 결제하기 등 사채만 끌어다 쓰지 않았지 돈 없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을 하며 살게 되었다.  

 아픈 아이를 키우느라 내가 일 하러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보니 남편 외벌이로 살아야 했다. 나날이 빚은 더 해지고, 그러다 어느 날 쌀이 똑 떨어지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아이가 유치원 때였다.  때마침 아무것도 모르던 형부가 지인에게 쌀을 많이 받았다고 보내주어서 굶지 않게 되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를, 지금은 무용담처럼 늘어놓지만, 그 시절엔 아픈 아이만도 서러운데 경제적인 압박까지 더해지니 참 많이 힘들었었다.

 그렇다면 이 사정이 어떻게 나아졌느냐? 아이러니하게도 빚을 더 내어, 빚을 청산하면서 우리의 삶은 윤택해졌다. 헛.


 한참 살고 있던 지역의 부동산이 껑충 뛰면서 전세 보증금 1억을 더 올려줘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더 이상의 전세 대출로는 감당할 수 없어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결심하고 알아보는데,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어느 지역에 아파트 매매가가 그때 살고 있던 지역 전셋값보다 싼 것이었다. 그리하여 아파트를 매매하기로 하고 첫 생애 대출을 받게 되었는데, 이자가 저렴해서 최대한의 대출을 받아버렸다. 그 대출로 약관대출, 카드값 등등 다른 대출을 갚아버렸더니 경제적 압박감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뭐 사실 눈 가리고 아웅인 격이지만, 당장의 경제적 어려움이 사라지고 나자 숨통이 트였다.


 그렇다고 살림살이가 확 편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아픈 아이에게 먹는 것까지 아끼지는 않기로 했다. 잘 먹이고, 잘 키우기로. 대신 웬만한 사교육은 내 선에서 끝내기로 했다. 내가 가르칠 수 없는 피아노 학원만 보내고 나머지 교과 공부는 내가 선생님이 되어 지도했다. 다행히 아이도 잘 따라왔고, 고학년이 되어서도 영어학원 하나 보내지 않고 버텨냈다.

 

 주변에 아이 둘을 키우는 외벌이 가정이 몇 있는데, 두 아이 모두 학원을 여러 군데 보내는 것이었다. 영어학원, 피아노 학원, 태권도 학원, 수학학원 그 많은 학원들을 어떻게 다 보내냐고, 남편이 월급을 많이 받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랬더니, 빚을 내서라도 아이들의 학업은 포기할 수 없다고 하더라. 아이들이 배워야 할 때가 있는데 돈이 없다고 안 시킬 순 없지 않냐고.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아들에게 미안해지지만, 빚을 많이 져 쌀마저 똑 떨어지는 경험을 해 본 나로서는 빚지는 것만큼 끔찍하고 숨 막히는 일이 없다. 사교육이 더해지는 순간 우리는 마이너스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결혼 14년, 외벌이 12년 차. 현재 우리 집 통장 잔고는 0원이다. 누군가는 말하더라. 마이너스가 아닌 게 어디냐고. 요즘 누가 저축하며 사냐고. 잘 버텨온 거 아니냐고.

 글쎄다. 큰 빚을 내어 소소한 빚을 줄였을 뿐, 우리는 여전히 많은 빚을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마음가짐이다. 첫째, 당장에 경제적 압박을 받지 않으니 큰 빚이 있다는 걸 잊고 살 수 있다. 둘째, 풍족하게 살진 못해도 속상하지 않을 만큼 잘 먹고, 가끔 여행도 다니면서 우울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산다. 돈이 없어서 죽을상을 짓고 살았던 예전과는 다르게 외식할 수 있고, 차 한잔 마실 여유가 있는 지금이 그저 감사하다.


 어떤 이는 결혼 3년 만에 1억을 모았다고, 가계부 책자를 내고 불티나게 팔리고 하더라만, 집집마다 사정이 다르고 돈을 모으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이 형편에 이 정도 살았으면 잘 살았다.  "애 키우는 집에서 어떻게 통장에 10만 원도 여유가 없냐?" 남편에게 늘 하는 말이지만, 아픈 아일 키우며 외벌이로 마이너스 없이  살아온 건  잘 산 거라고 스스로를 쓰담 쓰담해 줘 본다.


 이제는 아이가 자라 곧 중학교 입학할 나이가 되었고, 내 손에서 놓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필요하다면 학원도 보내야 할 것이고,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본격적으로 저축을 해 나가야 하는 시점이다. 가장 많은 돈이 나간다는 학년기에 저축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보니 어느새 경력단절 10년 차. 설 수 있는 곳이 없다. 다시 무언가를 배우고, 계획을 하고 일을 시작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겠지. 통장을 100만 원, 1000만 원 채우면서 잔고 0원에서 탈출하는 날까지, 파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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