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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콩 Dec 28. 2022

하루종일 쇼핑했는데, 아무것도 사지 못했다.

마흔넷_결정장애는 머니에서 기인하는가.

 마흔넷인 나에게는 결정적인 단점이 하나 있다. 바로 결정장애다. 그런데 알만한 주변 지인들은 그 결정장애가 유독 나 자신의 일에만 한정적인 것을 알고, 나에게 심심찮게 자신들의 고민을 상의 한다.

아들 피아노 학원을 그만둘까?
선생님께 이런 말을 해도 될까?
아우터, 흰색이 나을까? 민트 색이 나을까?

 나는 다른 사람의 고민을 들으면 냉정하게 생각하고 장, 단점을 따져 빠르게 결론을 내려준다.


피아노 학원? 아들이 계속하고 싶어 해? 그렇지 않으면 재능이 있어? 학원 하나 더 보내야 해서 돈 없다고 하지 않았어? 재능도 없어, 애도 하기 싫어해, 돈도 필요해. 그럼 피아노 학원을 계속 보낼 이유가 있을까? 그냥 엄마의 욕심이지 않을까?


 대부분 나의 이야기를 수용하고, 잘 결정했다며 고맙다 말한다. 사실, 본인들에게는 심각하고 결론이 나지 않는 고민들이, 제삼자가 들었을 때는 고민거리가 아닌 것들이 많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결론 내릴 수 있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특별히 내가 지혜로워서, 결정이 쉬운 여자라 그런 게 아니란 말씀.

 그렇다면 왜! 내 것에 있어서는 그 간단한 결정이 내려지지 않는 것일까. 특히, 그것이 쇼핑과 관련된 것이라면 결정장애는 유독 심해진다. 나 역시 본인에게만 심각한 일일 뿐일까? 제삼자에게 물어보면 해결이 될 문제인 걸까?



 겨울 부츠가 다 낡고 못 신게 되어, 재활용 봉투에 넣고 전실에 둔지 2주째 되었다. 새 부츠를 사게 되면 버려야지 하던 것이다. 혹시나 그전에 신을 일이 있을지도 모르고 해서 말이다. 물론 2주 동안 버리려던 부츠를 신은 일은 없다. 나는 2주가 다 되도록 부츠를 버리는 것도 결정을 못했고, 사는 것도 결정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어제는 마음을 다 잡고 아침부터 책상에 앉아 부츠 쇼핑을 했다.

 어떤 디자인을 선택할 것인가에서부터 결정장애는 시작되었다. 나는 힐을 신어본 적이 거의 없다. 가끔 차려입고 나가야 하는 자리에 신고 가려고 저렴한 구두 한 켤레를 샀었지만, 도대체 불편해서 웬만해서는 신지 않는다. 좋은 브랜드는 힐을 신어도 편하다고 하던데, 뭉툭한 내 발의 구조 때문인지, 저렴한 신발이라 생긴 것부터가 불편해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래서 마흔넷이 된 나에게는 차려입어야 할 때 맞추어 신을 신발이 한 켤레도 없다.

 곧 있으면 아들의 졸업식도 있고, 벌써부터 친구 엄마들은 예쁘게 꾸미고 갈 거라고 벼르고 있던데, 졸업식에 마저 운동화를 신고 가기엔 좀 그렇지 않은가? 마침 부츠도 사야 하는데 이번 기회에 정작에 어울릴만한 힐로 된 부츠를 살까? 하고 살펴보다가, 몇 번 있지도 않을 '차려입어야 하는 날' 때문에 신발을 사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평소에도 잘 신을 수 있는 통굽의 부츠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진짜 소가죽으로 할지 다소 저렴한 인조 가죽으로 할지. 털이 있는 것으로 할지, 없는 것으로 할지. 발 모양은 뾰족한 것으로 할지, 네모난 것으로 할지. 지퍼는 옆으로 오는 것을 할지, 뒤쪽에 있는 것으로 할지. 그냥 무광 스웨이드로 할지, 광택 나는 가죽으로 할지. 발목이 넓은 것으로 하면 추울 것 같고, 좁은 삭스형은 통통한 내 발목에 맞지 않을 것 같고 말이다. 이렇게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부츠를 고르고 고르다 보니 오전 내내 쇼핑을 해도, 아무것도 결정할 수가 없었다.


 점심을 먹고 나는 심기일전하여 오늘은 기필코 부츠를 장만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노트에 부츠 선택에 도움이 될 것들을 적어 보았다. 그랬더니? 이래나 저래나 결론은, 발모양 이쁘고 굽은 높지 않으면서 여성스럽고 따뜻하고, 관리가 쉬우며 정장과 캐주얼 모두에 어울리면서도 가격이 저렴한 것이었다. 그런 부츠가 세상에 있을 리가.


 아들 녀석이 하교해 배고프다고 아우성일 때까지 하루종일 쇼핑을 했지만, 결국은 아무 소득 없이 컴퓨터를 꺼야 했다. 엉덩이가 얼얼하도록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던 내 시간이 허무해지는 순간.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결정장애가 심한가 하는 생각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런 사소한 결정에 하루를 소비하다니 으아악! 정말 싫다 이런 내 성격이!

 어떤 날은 만 원짜리 티 셔츠 몇 장을 사는데도 한 달이 걸린 적이 있다.  고르고 고르다가 '에잇, 아무거나 사자'하고 보면 세일이 끝났다던가, 계절이 다 지나 차마 사지 못하곤 했다.


만 원짜리를 가지고 뭘 고민해? 사서 아니더라도 고작 만 원 이잖아. 만 원 때문에 고민하는 그 시간이 더 아깝지 않아?


유독 내 것의 쇼핑에 결정장애를 심하게 겪는 내게, 지인이 충고했다.


그래, 이건 다 돈 때문이야!


 생각해보니 나의 결정장애는 모두 부족한 총알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경제적 상황이 넉넉해서 신발을 두 켤레 살 수 있었다면, 편하게 신을 부츠와 특별한 날 신을 신발을 따로 구입하면 되었겠지. 그렇다면 훨씬 더 선택이 쉬웠을 것이다. 금액적 제약이 없었다면 맘에 드는 디자인을 찾기 더 쉬웠을 테고 말이다.

 쇼핑도 해 본 사람이 한다고, 부족한 형편에 맞추어 살다 보니 무언가를 사는 것에 익숙하지가 않다. 마흔넷이 지나도록 한결같이 부유하게 살아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내내 결정장애가 내 성격인 것처럼 붙어 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다 돈 때문일까?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아들의 밥상을 차려주고 돌아서 다시 책상에 앉았다. 곧 중학생이 되는 아들의 겨울 방학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공부 계획을 짜 주어야 할 때다. 이미 달 초부터 친구들은 방학 특강을 잡고, 문제집을 구입하고 있던데 나는 아직까지도 아이를 학원에 보낼지, 스마트 기기 학습을 신청할지, ebs 인강을 듣게 할지, 문제집으로만 할지도 결정하지 못했다. 나의 결정장애 때문에 늘 아들의 학습권이 침해받고 있는 건 아닐지 고민하면서 말이다.

그래, 그것도 다 돈 때문이야. 넉넉히 있었으면 학원 보내는 것도, 스마트 학습 신청하는 것도 선택이 훨씬 쉬웠을걸?

 나는 하루종일 쇼핑을 하고도 아무것도 사지 못한 내 성격적 결함을 여유롭지 못한 환경 탓이라고 어물거리며 포장했다.

 이러다 부츠를 사기 전에 겨울이 또 다 가버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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